말린 찻잎, 뜨거운 물로 우려내, 두 번 세 번 우릴 때마다 다른 향

선방의 스님들은 녹차를 선약(仙藥)이라 부른다. 신선이 먹는 약이란 뜻이다.

쌍계사에서 만난 지광 스님은 '마음을 비우고 마시는 차'라고 정리한다. 쌍계사 옆이 녹차 시배지인데 예부터 이 절의 스님들은 녹차를 즐겨 마셨다. 근래엔 칠불사 자응 스님이 수십 년 전부터 직접 녹차를 덖고 발효를 시켰다고 지광 스님은 기억한다.

◇마음을 비우고 마시는 차 = 찾아간 날은 첫 봄비가 운무와 함께 쌍계사 계곡에 낮게 깔린 날이었다. 이 비가 그치면 어린 찻잎들이 싹을 틔울 것이다. 선방 뒷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신다. 소박하고 정갈하게 차려진 모양새는 절로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든다.

"격식 차릴 거 있나요. 그냥 흘리지 않고 마시면 되죠. 차를 어려워들 하는데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마시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세작을 작은 한 스푼 정도 다관에 넣고 무선 전기포트에서 끓인 물을 붓는다. 잠시 후에 다관을 들어 원 모양으로 서너 바퀴 흔들어 숙우에 붓는다. 숙우에 담은 차를 찻잔에 부어 먹는다. 두 번째, 세 번째 우려낼 때마다 다른 향이 있는데 뒷문 밖 숲에서 오는 향인지 찻잔에서 오는 향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쌍계사 지광 스님. /권범철 기자

"요즘은 쌍계사 계곡에서도 발효차를 만들어 먹어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근방에서 처음 발효시킨 차들은 그냥 시래기 우린 맛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아주 좋아요."

빗소리에 묻힐 듯 말 듯 대화가 이어진다. 대화를 한다기보다 그냥 차를 마신다. 스님은 공부하기에 녹차가 좋은 동무라고 한다. 졸음이 오거나 마음이 흐트러질 때 녹차를 마시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요즘 커피를 많이 마신다죠? 스님들 중에도 커피를 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녹차를 즐기는 인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는데 근본만 지키면 다시 찾을 겁니다. 찻잎을 키우고 비비고 덖는 과정에 거짓이 없이 근본에 충실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다시 찾을 겁니다."

남은 차를 모두 비웠다. 무선주전자에 남은 물을 빈 숙우에 붓고 찻잔을 헹궈 나무 탁자에 뒤집어 놓는다. 금세 들어올 때 있던 차림대로 찻상이 정리되었다.

쌍계사 일주문을 지나 내려오면서 '마음을 비우고 마시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스님은 "흐리니 싫고 해가 나서 싫고 더워서 추워서 싫은 맘이 있습니다. 반면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또 그것대로 좋은 맘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아마도 마음을 비우란 말은 '욕심을 비우란 말'일 게다. 해가 났으면 하는 욕심, 덜 추웠으면 하는 욕심. 흐린 쌍계계곡에서 마시는 녹차는 고상하고 낭만적이어서 좋다.

◇발효차의 맛은? = 근처의 녹차박물관과 시배지를 둘러보고 쌍계계곡의 한 찻집으로 향한다. 지광 스님이 좋다고 일러준 발효차를 맛보기 위해서다. 화개 십리벚꽃길 가의 찻집인데 이 집 주인은 한사코 언론노출을 꺼렸다. 언젠가 어떤 매체를 통해 알려진 적이 있는데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차에 대한 설명엔 거침이 없으되 친절하다.

화개면 발효차와 모시떡.

여기 발효차는 '황차'다. 황색 빛깔이 나는 발효차란 뜻이다. 어린 찻잎을 손으로 따 덖지 않고 비벼 메주 띄우는 온도로 24시간 정도 섞어주며 둔다. 그렇게 하면 녹색에서 검정색으로 천천히 변하는데 그야말로 살청(殺靑)의 과정이라 할 만하다. 그 검은 잎을 바싹 말려서 항아리에 5년간 숙성시킨 차가 여기 발효차다.

"화개 녹차는 농약이 있을 수 없어요. 제가 증인이죠. 여긴 밤나무가 많아 그것들을 항공방제 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녹차에도 농약이 들었다는 말이 많았죠. 그런데 제가 지켜본 10년 동안 항공방제를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여긴 축사나 송전탑도 없고 공기와 물도 좋으니 녹차로선 최상의 조건이죠."

보통의 발효차는 중작이나 대작을 사용하지만 여기선 세작만을 사용한다. 맛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5월에서 6월경에 따는 중작이나 대작은 쓴맛과 떫은 맛이 더 심하기 때문이다. 녹차는 일조량이 많을수록 쓴맛이 난다고 한다. 때문에 이때 따는 잎은 티백용으로 사용하는데 그 쓴맛을 가리기 위해 현미를 넣는다는 주인의 설명이다.

발효차를 먹는 과정은 보통의 녹차와 같다. 물이 식으면 추가로 데워 준다. 3년 이상 된 발효차는 '해운'이 생긴다고 한다. 찻잔 위에 물안개처럼 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주의 깊게 보지 못해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 황차는 떫은 맛이 없고 단맛이 은은하게 돈다. 함께 나온 모시떡 또한 비슷한 맛인데 모자란 듯 하나 씹을수록 넘치지 않을 만큼 차오르는 느낌이 좋다.

쌍계계곡 한 찻집의 발효차.

화창한 날 쌍계사로 가는 도롯가와 건너편 계곡에 벚꽃이 만개한 풍경도 좋지만 봄비 내리는 지리산을 보며 찻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다. 끓는 물에 갓 말린 찻잎을 한 움큼 집어 넣어 대접에 부어 후루룩 마셔도 좋고, 오늘처럼 다관과 숙우를 거쳐 찻잔에 마셔도 좋다.

그리고 좋다는 것도 좋고, 좋지 않다는 것 또한 좋으며, 좋지 않음을 좋아한다는 것이 좋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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