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캔터버리 대주교로 알려진 윌리엄 템플(1881~1944)과는 동명이인이다. 템플 대주교가 너무 많이 알려진 탓에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템플(1628~1699)은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임에도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했던 저술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찰스 2세 통치기간중 간헐적으로 취해진 친네덜란드 정책을 정립한 사람이다. 1674년 네덜란드와 벌이던 전쟁을 끝내는 조약을 체결했으며, <네덜란드 연방에 대한 고찰>이란 명저를 남겼다. 이 책은 다른 나라 국민에 대해 호의적인 해석을 내린 선구적 저술로, 오늘에 이르러서도 학자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공적인 기록을 요약하자면 이 정도다. 그런 그가 왜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됐을까? 17세기라는 시대에 ‘근대적인 사고와 세련된 내셔널리즘’을 지니고, 그런 정신을 가진 후배 외교관들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템플을 사사한 이들은 외교부문에서 ‘국제적 다수파’가 됐으며 이들은 이후 근대적 세력균형 정책을 펼쳐 대영제국 전성기를 이끈다.

템플은 처음 네덜란드에 갔을 때 영국에서 느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상인국가가 풍기던 ‘자립정신적 귀족성’이었다. 전제 왕정하에서 언론자유가 없던 영국과 달리 네덜란드 상인계급은 정치와 외교문제를 놓고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하곤 했다. 그는 이런 자립적 문화에 깊이 매료됐고, 거기서 ‘절대 왕정에 주눅 들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발견했다. 템플은 이를 토대로 ‘근대적 사고와 세련된 내셔널리즘’을 키우게 된다.

Sir William Temple./위키피디아

이후 그는 전제왕권에 대항하는 근대 의회제도와 팽창 지향적 국가를 견제하는 세력균형 외교가 일체가 되어, 국내 국제 문제에 작용해야 하며 그것이 곧 자유의 기초라고 일관되게 호소한다. 그래서 템플을 빼고서는 루이 14세로 대변되는 팽창 지향적 외교에 저항하며 영국이 세력균형 노선을 확립하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템플은 개인적으로는 또한 영국 젠틀맨(Gentleman)을 표상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 사대부에 비견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신사적 교양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된 사회적 책무를 달성한 이를 일컫는다. 템플은 시류에 저항하면서 국가적 혹은 역사적 시야를 가지고 소신을 관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리(私利)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때문에 그는 진정한 젠틀맨으로 불리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는 명예나 권력을 향한 충동에 부와 노력, 정신과 생명을 쏟아부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것을 보통 국가에 대한 봉사나 공공복지를 위한 구실로 포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공무는 실은 엄청난 노력과 고심을 수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선량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특별히 국왕의 부름을 받거나 자기 이외에는 적절한 사람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템플이 은퇴한 후 쓴 에세이에 나오는 말이다. 국왕의 부름이란 왕정시대 용어를 제외하면 지금 되새겨도 손색없는 말이다. 에세이가 공적(公的) 자세를 이야기했다면, 그가 남긴 ‘지식인의 긍지’는 말 그대로 긍지를 나타낸다. “제왕의 노여움도 대중의 광기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 경박한 세상의 시비에도, 외국의 협박이나 도시의 잡사(雜事)에도, 권력에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엄격한 자기관리, 그리고 헌신과 부동심(不動心)을 지녔던 이 젠틀맨이 외교관 시절 얻었던 별칭은 ‘교섭의 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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