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30년, 비정규직 설움과 고통이 함께 했다

지난해 11월 어느 날 밤, 휴대전화에서 ‘카톡'(카카오톡)’이 연방 울려댔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언니가 나왔어!”

잠결인지 꿈결인지 감이 안 왔다. 알고 보니 극 주인공인 마산 출신 나정(고아라 분)이가 “나는 김혜란 언니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카톡을 보낸 것이었다.

김혜란 씨. 올해로 DJ 30년, 이렇게 방송을 타기는 처음이었다고.

방송을 본 많은 이들이 김혜란 씨가 누구이며,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했다. <경남도민일보>는 그들의 호기심을 시원하게 해결해주고자 DJ 김혜란 (52) 씨를 지난해 창원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방송 후, 많은 분들이 혜란 씨의 안부를 궁금해 하더라고요.

“(웃음)그런가요? 방송이 나간 뒤 여기저기서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이렇게 방송을 타기는 또 처음이네요.”

-계속 DJ를 하고 있나요?

“그럼요. KNN 라디오 <김혜란의 달콤한 수다>를 진행하고 있어요. 마산MBC에서 이곳으로 옮긴 지 꽤 됐어요. 가만있자…. 2006년 9월부터 했으니까, 7년 정도 됐네요.”

-근데, 방송은 직접 봤어요?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돈 주고 다운받아봤어요.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이 자리를 빌어 제 이름을 기억하고 그 시절을 함께했던 많은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언제부터 DJ의 길로 들어섰나요?

“1985년 마산MBC 제1회 DJ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으면서 DJ계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원래는 창원대 방송국에서 PD를 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DJ 콘테스트에 참여하게 됐죠.”

-그때 당시 지원한 사람 중 여자는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요.

“대부분 남자였죠. 8월 여름방학 때 창동 모 음악다방에서 콘테스트를 했습니다. 한 40~50명 정도 지원을 했던 것 같아요. 본선에는 8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1등은 전문 DJ가 아닌 아마추어가 됐어요. 2등은 부산 출신이었고, 전 3등을 했습니다.”

방송인 김혜란 씨./김구연 기자

-그랬군요. <응답하라 1994>에서도 나왔지만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 당시 인기가 엄청 났다고 들었습니다.

“(웃음)그랬죠. 제가 대학교 4학년이던 1986년부터 4년여 동안 최고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했습니다. 그때 당시 학력고사가 끝나서 마산공설운동장에서 라디오 공개방송을 했었는데 사람들이 매우 많이 왔어요. 가수 이선희 씨는 예상외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공연도 제대로 못하고 서울로 갔죠. 지금 회상해보면 청소년들이 들을만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목소리가 너무 예쁩니다. 목소리만 들으면 30~40대 정도로 보여요.

“별 말씀을요. 과찬입니다.”

-라디오를 진행할 당시 인기가 많으셨을 것 같아요. 어떤 분은 “김혜란 DJ의 젖어드는 듯한 목소리가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그 목소리에 매료되어 방송이 진행 중인 스튜디오 안을 자주 상상해본다”는 말을 하던데….

“목소리만 듣고 키 170cm에 긴 생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을 상상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꽃다발을 보내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편지와 엽서를 많이 받았죠. 하지만 라디오 인터넷 홈페이지가 생기고, ‘보이는 라디오’가 나오면서 외모에 실망해 돌아선 팬이 많았죠.(웃음)”

방송인 김혜란 씨./김구연 기자

-스토커는 없었어요?

“그때는 없었고, 최근에 있었습니다.(웃음)”

-정말요?

“믿기지 않죠?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라디오를 진행하는데, 제 목소리를 듣고 밤마다 방송국으로 문자를 보내는 거예요. 처음에는 읽어줬는데, 하루에 50통이 넘게 오니까 포기를 했죠. 그런데 한 날은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술에 취해 방송국으로 무단출입했는데, 매일 문자를 보내던 그 남자인 거예요. 다행이 수위 아저씨가 와서 해결을 해줬죠. 웃긴 것은 그 다음날 문자가 왔는데, ‘못생겼데’라고 온 거 있죠?”

김혜란 DJ는 1994년부터 약 10년 동안 마산MBC <라디오 광장>의 시사코너 ‘아구할매’를 진행했다. 그래서 김혜란 하면 아구할매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지금이야 개그맨 강호동 씨처럼 방송에서 사투리를 쓰는 진행자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때 당시는 아니었다. 당연히(?) 서울처럼 지역 방송국도 표준어를 써야한다는 통념이 있었다. “야덜아, 내는 마산에 아구할매다. 내가 뭐 하능 사램인가 하몬 마산에서 아구찜 장사하능 칠십 문(먹은) 할맨데 시상 돌아가는 꼬라지 보이 더러봐서 가만히 몬 있것다.” 처음 방송을 듣는 청취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내용도 주로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구할매는 청취자의 답답한 속을 긁어주는 시원스런 입담꾼으로 사랑을 받게 됐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걸쭉한 입담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눈을 돌려 냉철한 비판을 하던 아구할매, 즉 김혜란 씨를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아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임나혜숙 PD와 박미영 작가 그리고 저, 세 명의 합작품이었죠.”

-어떻게 방송에서 사투리를 쓸 생각을 하셨죠?

“임 PD가 쓴 <나는 일부일처제가 싫다>라는 책을 보면 어떻게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지 잘 나와 있어요. 아귀 하면 마산의 고유한 상징이면서 또 입이 엄청 크죠. ‘아귀처럼 큰 입으로 걸지게 얘기하면서 매운 맛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자’라는 것이 기획의도였죠.”

방송인 김혜란 씨./김구연 기자

-그렇군요. 인터뷰 전 전화통화를 할 때 표준어를 쓰셔서, 서울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산 토박이더군요.

“네. 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어머니가 함안분인데 시어머니에게서 사투리를 많이 배웠어요, 왜 같은 경상도라고 해도 지역별로 약간은 다르잖아요. 그래서 시간만 나면 마산 어시장에 들러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사투리를 익혔죠.”

-기억나는 일이 참 많겠지만, 그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그때 방송했을 때는 젊었는데,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제 목소리를 듣고 청취자들이 할머니인줄 알았데요.(웃음) 할아버지들끼리 아구할매가 진짜 할매인지 아닌지를 두고 바둑내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리고 아구할매 초기에는 청취자들을 즐겁게 해준다고 야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느 날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보험설계사 소장이 아침회의 할 때마다 아구할매에서 나온 야한 이야기를 한다며 항의 전화가 오기도 했죠. 또 사투리 방송으로 인해 서울에서 온 국장이 방송 나가기 전에 원고를 제출하라고 했던 적도 있어요. 근데 같은 한글인데도 사투리로 적힌 원고는 해독하기 어려워하더라고요.(웃음)”

-가수 김산 씨가 “우리랑 이야기할 때는 갱상도 말 팍팍 쓰다가 방송 들어가면 억양이 싹~ 바뀌었다”고 회상하기도 하던데…. 사투리에 얽힌 뒷이야기와 방송 사고에 대한 기억은 없나요?

“<별이 빛나는 밤에>방송했을 때였어요. 방송에서 ‘침 삼키다’를 ‘춤 삼키다’고 말했는데 틀렸는지 전혀 몰랐습니다.(웃음) 숙직하던 PD가 지적을 해주더라고요. 어떤 날은 방송 마이크를 켜놓은 상태에서 중국집 배달원이 ‘짜장면 왔습니더’라고 말해 그게 방송으로 나간 적이 있었죠.”

-궁금한 점이 있는데, 왜 마산MBC에서 일하다가 부산 KNN으로 옮겼나요? 아구할매도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는데….

“마산MBC는 친정 같은 곳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 뒀고, KNN으로 옮긴 것은 지인의 추천이었습니다.”

지난 2001년 마산MBC 구성작가와 리포터, MC 등으로 구성된 여성 프리랜서 20명은 전국 최초로 프리랜서직에 대한 일괄 임금협상을 요구했다. 이들이 임금협상을 요구한 이유는 하루 8시간 이상 근무하면서도 낮은 임금과 야근수당이나 상여금 등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마산MBC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국여성노동조합 마‧창 지부 마산MBC분회조합원들은 근로자 인정을 요구하며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을 접수했다.

-마산MBC에서 DJ로 일하면서, 프리랜서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데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우가 달랐습니다. 월급도 1/3이고 갓 입사한 후배도 처음에는 깍듯이 인사를 하더니 어느 순간 인사를 덜 깍듯이 하더라고요. 정체성의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는 우리(비정규직)는 도대체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고 프리랜서 노조를 출범시켰죠.”

-어땠나요? 그때 상황이.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붉은 조끼를 입고 다녔는데 당시 국장님이 붉은 색 증후군에 걸릴 정도였습니다.(웃음) 살짝 공포감도 있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좋았어요.”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결과는 어땠나요?

“지방법원에서 졌지만 서울지법에서 이겼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죠. 당시 우리는 노무사 한분이었고, 회사는 김앤장이라는 국내 굴지의 로펌업체가 변호를 맡았습니다. 회사 측과 김앤장은 흥분했죠. 결국 우리는 고등법원에서 졌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대법에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왜죠?

“우리가 만약 저 버리면 우리 같은 후배들이 다시는 이런 소송을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고등법원에서 졌지만 우리의 존재감을 확인한 멋진 성공이었고 성취였습니다. 그 당시 마산MBC 박미경 분회장과 무서운데도 계속 함께 해주었던 후배들이 고맙죠.”

-올해로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산지 30년이 되었습니다. DJ라는 한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데는 혜란 씨만의 비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전 프리랜서에요. 1년에 두 번 제 목이 붙었다 떨어지죠.(방송 개편 때문이다) 늘 긴장하면서 살았고 아직도 위장병이 있어요. 그런 상황 덕분인지 제가 남들보다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난 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프리랜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생긴)열등감은 내가 만든 거구나. 조금씩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오히려 떳떳하게 말이죠?

“현실 인정한 거죠. ‘그래 나는 프리랜서다’라고. 제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자존감이 생겼어요.”

-라디오를 오랫동안 진행해왔는데, 시대별로 차이점을 느끼겠네요.

“제가 DJ로 입문하던 시기에는 편지와 엽서, 전화로 신청곡과 사연을 보내면 DJ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를 소개했죠. 청취자는 자신의 사연이 선택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선택이 되면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요즘은 실시간으로 메시지와 신청곡을 보낼 수 있고 청취자의 반응도 즉각적이죠.”

-현재는 라디오 진행 외에도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계획은요?

“스피치 강의를 합니다. 기회만 된다면 카메라를 들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 가고 싶어요. 내가 직접 촬영하고 내레이션을 하고. 멀티플레이어가 되는 거죠.(웃음)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목소리를 안 들으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잊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김혜란 하면 ‘아구할매’로 기억해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워요.”

오로지 DJ로서 30년을 걸어온 김혜란 씨. 과거 비정규직이라는 설움에 자존심도 상하고 열등감을 느꼈지만 ‘프리랜서 방송인 30년’엔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열정이 있었다. 매번하는 방송이지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진다는 김혜란 씨. 프리랜서 DJ로 걷고 있는 영원한 현역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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