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근대 최초의 인권운동 발상지”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

진주시 가좌동 새벼리. 교통량이 많은 이곳 도로 모퉁이가 살짝 굽어지는 곳에 짙은 갈색 표지판이 눈에 띈다. 큰 도로에서 20m나 들어갔을까. 수풀림 사이에 자리 잡은 묘소는 도심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고즈넉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부산스러운 발자국 소리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유난히 투명한 오후 햇살만이 길게 자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진주문화연구소 형평운동 유적 답사

진주문화연구소는 11월 2일 진주의 현재를 돌아보고 인권․평등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 주제로 형평운동 유적지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이번 답사에는 남녀노소 시민 50여명이 참가해 진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찾아 ‘타고 걷고’를 반복했다.

/권영란 기자

답사 길라잡이로 김중섭(경상대 사회학과) 교수가 나서 각각의 현장에 깃든 역사적 사실에다 흥미로운 해설을 곁들여 들려주고 다시 질문을 받아 답하는 ‘현장 강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김 교수는 형평운동을 34년 동안 연구하고 그 가치를 국내외 본격적으로 알려온 이다. <형평운동> <사회운동의 시대> 등을 집필하면서 진주를 비롯한 지역 공동체의 역사와 인권역사를 알려왔다.

김중섭 교수의 해설이 돋보였던 현장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그런고로 아등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아등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은 본사의 주지이라. …(생략)…”

형평사 발기인 일동이 선언한 ‘형평사 주지’이다.

/권영란 기자

형평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 40여만 명의 백정들에게 인간존엄과 사랑,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했던 근대 역사에 유례없는 백정 신분해방운동이다. 당시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을 지역사회 교육과 문화운동으로 실천하고 있던 진주의 부호 강상호의 힘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근대 최초의 인권운동’이라 일컫는 형평운동. 이날 답사는 90년이 지난 오늘 진주지역은,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를 생각게 했다.

/권영란 기자

이날 답사에 앞서 김중섭 교수는 형평운동이 시작되었던 진주교회에서 “형평은 백정들이 가장 많이 쓰던 도구인 저울의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며 “형평이란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당시 형평운동 주지문은 세계 학회서도 놀란다”며 “식민지 치하의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그 당시 인권과 평등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높이 사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장을 샅샅이 찾아가다

이날 답사는 진주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은 형평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동석 예배 거부’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반인 신도와 백정이 따로 예배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동석을 권했지만 일반인 신도들이 백정들과는 동석 예배를 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고 결국은 기존 방식대로 따로 예배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백정들에게 500년 동안 족쇄처럼 차고 있었던 백정 신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고 해방의식을 싹틔웠습니다.”

진주교회 주변에는 건립한 지 100년이 넘은 봉래초등학교가 있다.

봉래초등학교는 1910년 강상호와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봉양학교가 전신이다. 봉양학교는 이후 진주 사회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다시 이곳에서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옥봉 지역은 당시 백정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백정들이 소고기와 가죽을 갖다 바쳤던 향교가 있다. 향교에 오르면 진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점심 식사후 답사 일행이 걸어간 곳은 의곡사와 진주고등학교(당시 일신고등보통학교).

/권영란 기자

“이 장소는 당시 주민들이 형평운동을 반대하며 모의하고 집회를 벌였던 곳입니다. 신분사회를 뒤흔드는 이 사건을 두고 주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요. 진주지역 농청 대표자들과 군중들이 설립 인가 후 닦아놓은 학교 터에 소를 끌어다 놓고 구호를 외치며 협박하고…. 극렬한 반대 집회를 했습니다.”

진주성 앞 형평기념탑은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 선언의 날에 세워졌다. 진주 시민들과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이 기념탑은 인간존중, 자유, 평등의 형평운동 정신을 이어가자는 의지다.

진주는 인권도시로 거듭나야

형평기념탑 앞에서 이번 답사에 참여한 정주원(진주 대아고 1) 학생은 “진주의 대부호였던 강상호 선생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백정해방운동과 진주의 교육·사회운동을 일으켜 나갔다는 사실이 존경스럽다”며 “하지만 말년에 가난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참 안타깝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권영란 기자

이번 답사를 기획한 진주문화연구소 관계자는 “진주문화사랑방 답사기행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는 지난 6월 1차로 논개 유적지를 둘러보았고, 2차로 이번 형평운동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며 “형평운동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과 전개 과정을 알면 왜 하필 진주에서 일어났을까, 90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얼마나 변화했는가 등 의문을 갖게 된다. 거기서부터 지역에 대한 관심과 역사의식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고 당부했다.

/권영란 기자

형평운동으로부터 90년이 지난 오늘, 인간은 존엄하고 우리 사회는 평등한가.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현장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주민들, 열악한 사업장에서 저임금에 노동을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마저 빼앗긴 이들, 성소수자로서 여성으로서 청소년으로서 노인으로서 약자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

이번 답사를 마치며 김중섭 교수는 “형평운동의 가치, 이를 주도했던 강상호 선생 등 관련된 역사들을 좀 더 챙겨야 한다”며 “진주가 인권도시임을 시민들이 깨닫고, 형평운동을 진주의 자산으로 확실히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김 교수는 “내가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며 “지역을 변화시키는 일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50여 명의 남녀노소 참가자들이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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