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탑 하나 세워 억울한 혼 달래고 싶다”

노치수(66)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 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20대가 될 때까지도 집안 어른들은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말을 삼갔다. 이상하다 여겼지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살았다. 행방불명 신고를 내고 호적을 정리하면서도 막연히 아버지는 사고를 당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뒤늦게, 너무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 죽음에 얽힌 사연은 기가 막혔다.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나라를 믿었던 사람들에게 나라가 저지른 배신은 너무 잔인했다. 그리고 그 배신 때문에 희생된 사람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서면 지하철역 7번 출구로 나오세요. 자주 가는 커피숍이 옆에 있으니 거기서 만납시다.”

처음에는 인터뷰 할 게 없다며 사양하던 노치수 회장이 마지못해 응했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지만, 혹시 인터뷰를 보고 억울한 피해자들이 저에게 연락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고….”

노 회장은 커피숍 한쪽 흡연 공간으로 향했다. 담배를 피울 일은 없었고 그저 사람이 적어서였다. 그는 무덤덤하고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별로 할 얘기가 없는데…”라고 말했다.

“요즘 작은 회사에 다녀요. 짬짬이 시간 내서 유족 소송이라든지 재심 청구를 거드는 일도 하고 있고요.”

그는 옆에 있는 의자에 서류가방을 놓았다.

/이승환 기자

너무 몰랐던 아버지

노치수 회장은 1947년생이다. 마산 구산면 수정리 안녕마을이 고향이다. 노 회장이 아주 먼 훗날 알게 되는 아버지 노상도 씨 희생 시기는 1950년이다. 노 회장이 4살 때 아버지는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가 풀어놓은 아버지 얘기는 자라면서 들었던 조각보 같은 기억이다. 거기에 국가 기관이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난 내용이 섞여 있다.

“아버님이 마산고 선생을 하셨어요. 학교 선생을 할 때도 시내에 거주하고 있어서 집에는 가끔 들어오셨다고 하더라고요.”

노상도 씨는 1948년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리고 7개월을 복역한다. 물론 교직 생활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야기는 바로 ‘보도연맹’으로 넘어갔다.

“1949년 이승만 정부에서 보도연맹을 만들었어요. 사회주의 했던 사람들에게 이전 행적은 묻지 않을 테니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했지요. 전국에서 30만~33만 명 정도 가입했습니다. 아버지도 당시 가입했던 것 같아요.”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반공 조직이다.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을 사상 전향해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며 철저한 반공주의 강령을 내세웠다. 명목은 보호였지만 목적은 통제였다. 그리고 가입자 명단은 6·25 전쟁이 터지자 고스란히 ‘살생부’가 된다.

“아버지는 1950년 7월 하순쯤 불려나갔다고 합니다. 부역하러 나오라고 해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가끔 부역을 하기도 했었다던데 당시 도로 보수 때문에 나갔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그렇게 파출소로 나가서 바로 교도소로 이송됐어요.”

/이승환 기자

노상도 씨는 8월 18일 재판을 다시 받았다. 혐의는 어이없게도 ‘포고령 위반’이었다고 한다. 7개월을 복역 이유로 들이밀었던 죄목이 똑같이 적용됐다. 노상도 씨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8월 25일 전후로 사망했다고 추정해요.”

노치수 회장 전화기가 울렸다. 법원에 넣을 서류에 대한 문의였다.

그는 이런 전화를 자주 받았다. 간단히 조언을 한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 회장이 꺼낸 아버지 얘기는 대부분 전해 듣거나 몇 십 년 뒤에 이뤄진 조사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저야 몰랐지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어렸을 때 집에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상하다는 생각이야 했지요.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는 돈 벌러 가셨다, 나중에 오신다고만 얘기했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요. 지나고 보니 숙부님 정도만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던 거죠.”

노치수 회장의 숙부는 노현섭(1920~1991) 씨다. 지역을 대표하는 지식인인 노현섭 씨는 혁신정당 운동을 벌인 진보정치인이자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만행을 가장 먼저 폭로한 인권운동가이다. 그는 부산부두노조 마산지부장, 대한노총전국자유연맹 위원장, 마산자유노조 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다. 노현섭 씨는 자신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이기도 했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형을 잃었고 자신도 학살 현장에 끌려가던 중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그는 1960년 ‘마산지구양민학살유가족회’를 결성하고 그해 10월 창립한 전국유족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노현섭 씨는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할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활발한 활
동을 펼친다.

“숙부님이 그렇게 활동을 하셨지만 막상 저에게는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요.”

노치수 회장이 20대가 돼서야 들은 얘기는 ‘아버지가 행방불명 됐다’는 정도였다. 게다가 숙부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처리 대상’이 된다.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 간부를 잡아들였고 처벌하기 위한 법을 나중에 만들었다.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었다.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맞지만, 이에 대한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북괴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논리였다. 노현섭 씨는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승환 기자

“숙부님이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집안에서는 더욱 쉬쉬하는 분위기였어요. 저는 그저 학교를 잘 다녔고 대기업에 취직도 했지요. 아버님은 행방불명 신고를 하고 5년이 지나 사망 판결을 받아서 호적 정리도 했어요.”

드러난 진실

2005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가 설치된다. 노치수 회장은 늘 마음에 걸렸던 아버지 죽음을 밝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변에서는 아무 소용없다고 말렸어요. 정부가 피해자에게 조사 신청을 받았는데 저는 2007년 신청 마감에 가까워서야 부산시청을 찾았지요. 그렇다고 무슨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지요.”

2009년 2월 노치수 회장은 조사 결과를 받아든다. ‘1950년 전쟁 당시 마산형무소에 구금 돼 있다 학살당한 358명’ 가운데 아버지가 있었다.

“특별한 감흥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막연하게 생각했던 석연찮은 죽음에 대해 확인했던 것이지요. 아무리 전쟁이지만 의심만 갖고 사람을 죽인다…, 허무했어요. 전쟁 포로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데 나라가 국민을 그렇게 죽인 것이지요.”

다시 노치수 회장 전화가 울렸다. 앞선 전화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노치수 회장은 마치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노 회장만큼 서러운 사람들이었다.

2009년 4월 25일, 노치수 회장은 유족들과 함께 ‘마산유족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당시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지금 국장이지요? 김 기자가 많은 도움을 줬어요. 저희들이야 뭐 압니까. 김 기자가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사람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지요. 김 기자가 중간에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시작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6월 20일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유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 마산유족회 창립총회를 열게 된다.

“서로 모르지만 같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처음 모였지요. 진실을 밝혀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정부 눈치 보느라 피해를 밝히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어요.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도 못하고, 대기업도 못 가고, 외국도 못 가고….”

노치수 회장이 유족들과 만나면서 황망했던 것은 학살 피해자들 죽음이 억울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좌익 활동 경험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덜 억울할 것이라고 했다.

/이승환 기자

“이승만 정권이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킬 때 지역마다 할당을 했어요. 실적을 매기고요. 그러다 보니 마을 이장 같은 사람은 먼저 가입하고 그랬어요. 나도 가입했으니 너도 가입해라, 좋은 거다 그러면서 사람을 끌어들인 거죠. 그냥 이장에게 도장을 맡긴 사람들도 많아요. 사상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 죽어요.”

연고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오히려 유족이라도 남아서 진실을 확인한 경우는 사정이 훨씬 나았던 셈이다.

“처음에는 언젠가는 위령탑 하나는 세워야 겠다 정도로 생각했어요. 소송까지는 생각도 못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건 민사 소송 감이 되는 거예요. 울산에서 소송도 먼저 하고 2011년 보상도 받아요.”

창원유족회도 2011년 6월 정기총회를 열어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을 받은 유족만 우선 집단 민사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한다.

과거사 대하는 태도 정부마다 달라

“저는 정치 같은 거 모르고 살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당시 사람들은 보수주의자였지요. 이승만을 떠받들고 그랬으니. 그런 분위기에 그렇게 큰 반감을 드러내지도 않았고요. 대기업 다니면서 정치 돌아가는 거 신경 쓸 틈도 없었지요.”

노치수 회장이 엷게 웃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마른 입술을 잠깐 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유족회 일을 하다 보니 다른 것은 모르겠고 정부가 바뀌니 확실히 우리를 대하는 것도 다르더라고요. 참여정부 때는 적극적이었지요. 민원을 넣으면 담당자가 대하는 태도가 달라요. 깍듯하고 먼저 나서고 열심히 하는 게 보여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니까 완전히 달라져요. 유족회 행사도 격하되고 당장 담당자들 말투도 바뀌고….”

그런 분위기는 노치수 회장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다른 유족회 사람들을 만나도 반응은 비슷했다. 확실히 정권에 따라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달랐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야권 쪽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지요. 아이고, 정치 얘기는 그만 합시다.”

노치수 회장은 대기업을 다니다가 나와서 사업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울산에 있는 무역회사를 다녔으나 유족회 활동과 병행하기는 어려웠다.

“유족회 활동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회사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지요. 나중에 권고사직 당했습니다. 지금은 개인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유족회 활동도 무리 없이 병행하고 있어요.”

노치수 회장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피해 당사자인 유족들이 소극적일 때다. 유족회 결성 초창기에는 기대가 없어서, 어느 정도 활동을 할 때는 얼마나 잘 하는지 보자는 태도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이승환 기자

활동 참여를 독촉하고 보상받을 수 있는 길도 제시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한참 뒤에 보상 판결이 나오자 뒤늦게 유족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겨우 생겼다. 이 모든 게 노 회장에게는 상처처럼 보였다.

“수십 년 동안 억울하다는 말조차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눈치만 보고 살았지요. 잘못 튀어나오다가 정 맞을 수도 있잖아요. 아직도 피해자 상당수는 멀찌감치 떨어진 채 그냥 상처를 삭히면서 살아요.”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옛 마산·창원·진해지역만 23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진실이 규명된 사람은 150명 정도다. 이 가운데 소송을 진행하는 사람은 절반 정도에 그친다.

“유족회 정회원이 170명 정도 돼요. 준회원까지 포함하면 250명인데 170명 정도가 실제 활동하는 분들이라고 봐야지요.”

짧지 않은 활동 기간 보람도 있었다. 합동위령제를 지낼 때 국방부 장관이 사과성 추도사를 보냈다거나 국방부에서 위령제 비용 일부를 지원했던 것은 유족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해 승소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 분들을 도왔을 때 내 일처럼 기뻤다고 했다. 그리고 노치수 회장이 기다리는 소식이 하나 있다.

“진실 규명을 더 진행해야 해요. 전체 민간인 학살 피해자 가운데 진실을 규명한 사람은 10%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지난 10월 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하는데 이 법안이 통과돼야 해요. 그러면 더 많은 유족들이 진실을 밝힐 수 있습니다.”

노치수 회장은 유족회를 중심으로 창원시 일대에 거주하는 유족들이 피해자 신청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더불어 지역에 위령탑을 세워 해마다 제를 올리고 싶다고 했다.

“유족도 없는 몽당귀신이 너무 많아요. 너무 억울한 영혼들을 달래주고 싶어요. 당연히 제를 지내줘야 합니다. 나라가 서둘러서 해야 할 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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