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두,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어두운 불빛 아래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가수가 서 있다. 그 뒤로 반주자가 둥근 모양의 포르투갈 전통 기타를 들고 있다. 노래가 시작된다. 바로 눈앞에서 부르는 것이었지만, 노랫소리는 마치 어디 먼 곳을 흐르다 메아리쳐 돌아오는 것처럼 들린다. 파두(Pado)는 그런 음악이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려면 숙소 뒤편 언덕길을 걸어 올라야 했다.

그럴 때마다 지나는 오래된 주택가 골목들은 그 공기마저 한가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리스본에 어둠이 찾아들면 이 골목들에 생기가 돈다. 바이루 알투(Bairro Alto) 지구라 불리는 이곳은 그야말로 밤의 거리. 클럽은 밤새 음악을 틀어대고, 식당과 카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파두 하우스도 관광객들로 만석이다.

파두는 포르투갈의 민속 가요다. 포르투갈어로 파두는 운명, 숙명을 뜻한다. 그 기원은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8세기 브라질 등 남미와 아프리카의 음악이 포르투갈로 전해지며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주로 변두리 술집과 카페 등에서 서민들이 즐겨듣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리스본과 함께 파두로 유명한 대학도시 '코임브라'/이서후

암튼 리스본에 왔으면 파두를 꼭 들어야 한다고 해서, 어느 날 늦은 밤, 바이루 알투 지구에 있는 고급 파두 하우스 중 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느긋하게 파두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유명한 직업 가수만 나온다고 했다. 과연 파두는 어떤 느낌일까,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가수가 무대에 섰다. 멀대같이 앉아 있는 동양인 사내가 신기했는지, 그녀는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드레스 위로 풍만하게 솟은 가슴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부풀어 올라 휘휘 도는 노랫소리. 이것이 파두구나,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가락이었다. 그것은 걷기 여행 내내 듣고 다녔던 노래! 스페인 민요인 줄 알고 아이폰에 담아간 열 몇 곡의 노래들. 청명한 아침, 바람 부는 메세타 평원의 그 흔들리는 들꽃들과 너무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 사실은 파두였다니!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 그 노래들은 전부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9)가 부른 것이었다.

파두는 프랑스영화 <테주강의 연인들>(1954)을 통해 유명해졌다.

기타하라고 불리는 포르투갈 전통 기타. 파두 반주용으로 쓰인다./이서후

이 영화의 주제가인 <검은 돛배>가 바로 파두인데, 이 곡을 부른 이가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다. 파두는 그녀에 이르러서야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그 노래가 파두여서가 아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그만큼 파두를 잘 불렀다는 뜻이다. 고아로 가난하게 자라 10대에 밤무대 가수가 된 그녀. 그녀의 노랫소리에는 영혼이 실렸다고 평가받는다. 나는 그 영혼이 내는 소리가 애수나 그리움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걷기 여행에서 들은 그 목소리는 맑고 청아하고 밝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했다.

1999년 아말리아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포르투갈 수상은 3일간의 국장을 선포했다. 그녀가 살던 집은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박물관(Casa-Museu Amalia Rodrigues)으로 보존되고 있다. 어느 날 오전 나는 숙소에서 좀 멀리 떨어진 그 박물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오전 내내 거리를 헤맸지만, 박물관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나는 몇 번이고 그 박물관을 지나쳤었다. 하지만 그것이 박물관인 줄은 정말 몰랐다. 리스본의 흔하디흔한 3층 집. 국민 가수가 생전에 살던 집치곤 너무나 소박했다. 유별난 표지판 하나 없었다.

노래하는 파두 가수./뉴욕타임즈

오후 2시, 뜨거운 햇볕을 등에 지고 불쑥 입구로 들어서니 키 작은 할머니 한 분이 책상에 앉아계셨다. “따라오세요.” 입장료를 받고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신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우리는 길거리로 나와 사무실 옆에 달린 문 앞에 섰다. 할머니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이런, 내가 유일한 관람객이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내부와 관리인 스텔라 할머니./이서후

2층으로 가는 계단. 올라가 보니 진짜 그냥 가정집이다. “그녀는 여기서 44년을 살았죠.” 할머니는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가득한 거실을 소개하며 말했다. “그녀는 대단한 스타였는데, 그 집은 명성만큼 크진 않군요.” 내 말을 듣더니 할머니가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했다. “네, 그녀는 큰 스타였지요, 그리고 큰 사람이기도 했답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할머니의 이름은 스텔라(Stella). 별이란 뜻이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바이루 알투(Bairro Alto) 지구의 한 시끌벅적한 식당을 지나는데, 그곳에서 파두 소리가 흘러 나왔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식당 한가운데서 벌어진 파두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격식도 없이, 반주도 없이, 하지만, 아련히 피어오르는 그 노랫소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한참을 듣고 있다 뒤돌아서니 어스름 저녁 하늘에 문득 별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리스본 밤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무척 외로웠다.

바이루 알투 지구. 이 조용한 곳이 밤이 되면 사람들로 북적인다./이서후

*2년여 <피플파워>에서 사진 여행기를 써왔던 이서후 씨는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끝냅니다. 그는 세계의 어느 모퉁이에서 서있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지금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곧 네팔로 떠납니다’는 짧은 쪽지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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