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 타고, 리어카 끌고 여행…‘참 희한하네’

2008년 봄 어느 날. 서울 청담동 동양트랙터 본사 회의실.

동양 이사A: 발표 잘 들었어요. 참 재미있는 기획이긴 한데, 사실 좀 의문이 있거든요. 트랙터는 시속 30㎞가 최고 속돕니다. 시내 번화가에서 교통 체증을 만나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강기태: 충분히 걱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안 된다고 봅니다. 첫째는 다른 운전자들이 트랙터는 원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알므로 배려해주고 양보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둘째는 이번 여행이 농기계를 홍보하고 농촌 현장을 방문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도시 번화가로 트랙터를 운전해 들어갈 일이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동양 이사B: 일리가 있는 생각이군요. 하지만 만약 여행 중 트랙터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할 거죠?

강기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고민했습니다. 내가 수리 기술을 익혀 고쳐가며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긴 한데, 그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서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동양 트랙터가 고장이 잘 납니까?

동양 이사B: 흠~. 고장이 잘 난다면 농민들이 쓰지 않겠죠? 웬만해선 고장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획은 농업에 쓰는 게 아니라 여행입니다. 가혹 조건에서는 고장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기태: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동양 트랙터 AS 체계가 어떤가요?

동양 이사B: 전국 어디서나 1시간 이내에 전문 기사가 현장으로 달려가 고쳐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강기태: 그렇다면 걱정이 없군요. 여행 중 고장이 나더라도 1시간 이내에 전문가가 달려온다니 여행에는 큰 문제가 없겠군요. 더구나 ‘전국 어디라도 1시간 이내에 도착’하는 동양 서비스 체계를 전국에 홍보할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요?

“트랙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농촌경제의 발전과 우리나라 농기계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하동 농·특산물 홍보를 통해 지역 농촌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청년이 있어 화제다. 화제의 주인공은 하동군 하동읍에 사는 강기태(26) 씨. 강 씨는 18일 하동과 함께하는 국내 최초 동양트랙터 전국투어 출정식을 하고 ‘하동의 농·특산물을 홍보하고, 어려운 농촌현실을 극복하는데 작은 힘을 보태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경남도민일보> 2008년 9월 19일 자.

“트랙터를 타고 실크로드 대장정에 오르는 ‘무한도전’을 벌이는 하동 청년이 화제다. 21일 하동군에 따르면 지난 2008년 가을 트랙터를 몰고 전국 일주에 나섰던 강기태(29·하동읍 연화동) 씨가 오는 25일부터 내년 5월 31일까지 1년간 트랙터와 도보로 총연장 4만㎞의 터키와 중국, 중앙아시아 투어에 나선다.” <경남도민일보> 2012년 6월 22일 자

2008년 강기태(31) 씨 기사를 처음 봤을 때 ‘참 재미있는 청년’이라 생각했다. 이후로도 강 씨 이야기가 가끔 보도됐다. 그러나가 지난해에는 급기야 트랙터로 실크로드 대장정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피플파워> 인터뷰를 하고자 지난 10월 초순 그를 수소문했지만, 중국에 가 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원고 마감일을 넘긴 11월 12일에야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예비군 훈련받으러 하동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약속을 잡은 뒤 하동군청 북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강기태 씨./정성인 기자

다르게 생각하기

명함이 색다르다. 관제엽서 크기인데 앞쪽에는 트랙터 위에 서 있는 사진이 인쇄돼 있다. 중국 트랙터 여행 중 한 장면이란다. 그런데 그의 복장이 눈에 익다. 가만 보니 명함 앞면에 인쇄된 그 복장이다.

청바지에 하늘색 셔츠, 그리고 길게 늘여 맨 스카프까지. “이런 콘셉트를 좋아하는가 보네요” 했더니 “하하 옷이 이것밖에 없어요” 한다. 그만큼 트랙터 여행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있는 듯했다.

가장 궁금했던 게 왜 하필이면 ‘트랙터’인가였다.

“여행을 좋아합니다. 20대는 여행자로 살기로 오래전에 다짐했지요. 그렇게 다양한 여행을 해봤는데 뭔가 특별한 여행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 여행 했으면 좋겠다 싶어 둘러보니 내가 농부의 아들이더라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지금도 6만 평 벼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농민의 아들로서 우리 농산물을 널리 알릴 수도 있고 농촌 현실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메시지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56세인 그의 부친은 하동군청 별관 뒤편 들판에서 논 300마지기에 벼농사를 짓고 있다. 인터뷰하는 날 ‘매상’이라고 하는 정부 비축미 수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교원대에서 체육과 윤리를 전공하면서 학사장교(ROTC)과정을 거쳐 장교로 군에 갔다. 하동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사대부고를 졸업했다.

“대학은 부모님 기대에 맞춰서 갔습니다. 아무래도 부모님께서 농사를 짓다 보니 아들은 안정적인 직장, 공무원 뭐 그런 걸 원하셨거든요.”

하지만 워낙 활동적인 그에게 교원대는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뭔가 탈피해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할 방법으로 시작한 게 여행이었다. 더구나 여행하면서 다양한 경험도 쌓을 수 있어 20대를 여행자로 살기로 했다고.

그렇게 졸업하고 군에서 제대했을 때 26세였는데, 부친께 트랙터를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욕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농사짓는 트랙터를 가져가면 뭐로 농사짓느냐”며 조건을 하나 달았다. “트랙터 회사에 스폰서 받아 트랙터를 하나 가져다주고 집에 있는 것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부친은 그 정도 하면 트랙터 여행 꿈을 접으리라고 믿었던 듯하다.

강기태 씨./정성인 기자

그는 곧바로 A4용지로 38매에 이르는 여행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70~80년대 청년들과 비교하면 요즘 청년들은 젊음, 꿈, 열정, 패기, 이상, 도전정신이 부족한 것 같다. 트랙터 여행을 통해 그 모습이 살아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취지로 1장짜리 편지를 써서는 국내 4개 농기계 회사 회장부터 실무자까지, 대학의 농업이나 농기계 관련 교수 메일 주소를 찾아서 전부 보냈다. 격려 전화도 오고 메일도 오고 그랬는데 어느 날 동양트랙터 이사가 전화를 해서는 발표 자료를 만들어서 본사로 오라고 하더라는 것. “아버지 흰색 와이셔츠 빌려 입고 청바지 입고” 가서는 여행 계획을 브리핑했다.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브리핑 이후 어려운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대학 4학년 때부터 4년여를 준비해온 계획이었다. 결국, 트랙터 1대와 유류비 300만 원 지원을 받아내 2008년 9월 18일부터 2009년 3월 18일까지 6개월간 방방곡곡 4500㎞를 트랙터로 여행했다.

주변에서 다들 안된다, 어려울 거다고 얘기할 때 그가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르게 생각하기’의 힘이었다고.

“다르게 생각했어요. 가능할 방법이 뭔가도 좋지만 반대로 실패할 경우, 못할 방법을 찾아봤습니다. 안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할 이유가 뭔가라는 거죠. 그랬더니 못할 이유가 단 한 개도 없더란 말입니다. 못할 이유가 있으면 못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없으니 역으로 가능한 것이었죠.”

거꾸로 생각하는 게 체화돼 있을까? 아니란다.

“비판적 사고 이런 건 잘 못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왜 안되지?’ ‘why not?’을 많이 생각합니다.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들이대는 게 철칙이죠. 하하.”

안된다는 생각,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많이 생각하지만, 결론이 나오면 행동한다는 게 보통 사람들하고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의 농민을 만나다

“우리나라나 터키나 중국이나 농민은 다 똑같아요. 다들 순박하고, 인정이 넘치죠. 중국에 갔을 때 ‘한국에서 6만 평 농사짓는다’고 말했더니 웃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무척 반겨줬습니다. 농민 한 명이 60만~70만 평 농사짓는 그들 눈에 6만 평은 우습게 보이긴 했겠더라고요. 하하.”

트랙터 여행중인 강기태 씨./

국내 여행 후 스폰서 문제로 외국 트랙터 여행은 2년간 지연됐다.

지난해 터키로 떠나면서 꿈꿨던 트랙터와 도보로 실크로드를 횡단하겠다는 계획은 현재로서는 무산됐다. 중앙아시아쪽 사정으로 여행을 이어 하지는 못하지만 시작과 끝인 터키와 중국을 다녀왔다.

지난해 6~9월에 터키를 트랙터로 횡단했다. 무려 1만㎞를 시속 30㎞/h 트랙터를 타고 달렸다. 지난 5~8월에는 중국을 종단했다. 하얼빈~러시아 국경~내몽골~서안~계림에 이르는 8304㎞ 여정이었다.

강 씨가 트랙터로 여행한 기간은 1년, 거리로는 2만 2000여㎞에 이른다. 그동안 만난 농민은 부지기수다.

트랙터 여행중인 강기태 씨./

“내 여행 스타일이 미리 어디를 가겠다고 정해두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다가 간판 보고, 이정표 보고 ‘아 저기 재밌겠다’ 싶으면 그리로 가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터키 사람들도 잘 모르는 터키 시골 마을을 많이 가봤습니다. 지리산으로 치자면 골짜기에 집 한 채 있는 그런 마을에도 가보고 그랬지요.”

이러다보니 농업에 대한 생각도 많다. 원래가 능변이었는데 화제가 이즈음에 이르자 솔톤(sol-tone)에서 라톤 내지는 시톤으로 높아진다.

“한중FTA에 대해 말이 많죠. 하지만 한국 관료들은 중국 농업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중국 농업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관료들이 중국 농업 연수 가면 뭐 하는지 아세요? 하루정도 중국 농촌 죽 둘러보고, 중국 농업 당국이 섭외해 준 농민과 잠시 대화하는 게 전붑니다. 그러

   

고는 중국 당국이 마련한 만찬에 참여해 먹고 마시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중국 농업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8000여㎞ 중국 농촌을 여행하면서 정말 뛰어난 쌀 맛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우리는 10만 평 이상 쌀 농사하는 사람이 드물죠. 하지만 중국에서는 수십만 평이 기본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비료 뿌리면 기계로 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손으로 다 뿌린단 말입니다. 한 사람이 손으로 하루 만 평씩 비료를 뿌려요. 새벽 3시부터 저녁 8시까지 그 땡볕에 모자도 안 쓰고 비료 뿌려가며 쌀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렇게 나온 쌀 맛은 우리나라 쌀보다 훨씬 좋은 것도 많아요.”

석 달 동안 중국 농민들을 만나고, 직접 농사 일도 거들고 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중국 농산물은 값싸고 질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헤이룽장성 위쪽으로 가면 쌀이 정말 맛있어요. 그걸 어떻게 수입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향으로 해서 우리가 잘살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해야 하는데 중국 농업을 모르니 만날 탁상공론이나 하는 거죠.”

우리나라 농업에 희망이 없다는 그는 “규모 차이가 엄청나고, 그 차이는 식량 자급률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터키나 중국이나 식량 자급률이 99~100%입니다. 앞으로 식량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위협받을 일이 없다는 거죠. 우리는 15%도 안 됩니다. 자체 생산으로는 100명 중의 15명만 먹는다는 거죠. 결국,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식량위기가 오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가 터키에서 놀란 것은 농토가 없는 아랍에미리트는 터키에 있는 농장을 지속적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농장을 사고, 터키 농부를 고용해 식량을 생산해 본국으로 가져간다는 것.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률을 높이려는 정책이나 해외 농장 개발 같은 데 누구도 관심이 없는 듯해 걱정입니다.”

도시 노동자들에게 싼값으로 식량을 공급하고자 수입을 하고, 가격이 내려가니 농민은 농사를 포기하고, 생산량이 줄어드니 더 많이 수입하는 악순환 속에 국내 농업 기반 자체가 몰락했다는 진단이다.

더구나 고령화까지 진행되면서 10년 후, 20년 후 과연 우리나라에 농업이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울릉도 여행중인 강기태 씨./

“아버지 이제 60인데, 10년 후면 70입니다. 지금 70인 분들은 그때는 80세가 되죠. 80세에 어떻게 농사를 짓습니까. 농사로 돈이 안 되니 젊은이가 없습니다.”

농업정책 공부하고 싶어

농사·농촌 걱정이 큰 것 같아 부친을 이어받아 농사지을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봤다.

“저는 잡초와 작물을 구분하는 눈이 없어요. 하지만 누가 잡초를 잘 뽑는지, 누구에게 팀을 잘 관리해 효율적으로 잡초를 제거하도록 리더십이 있는지는 잘 알거든요. 그래서 직접 농사짓기보다는 농사를 잘 짓게 해주고 싶습니다.”

20대를 여행자로 살겠다는 결심은 지켜냈다. 이제 30대로 접어든 

   

그가 꿈꾸는 목표는 무엇일까?

내년 5~7월에는 트랙터로 하는 해외여행 3탄으로 브라질을 간다. 월드컵이 열리는데다 남미에서는 브라질이 가장 큰 농업국이기에 그리한단다. 그 전후로도 할 일이 많다.

현재 진행 중인데 SBS <출발 모닝와이드>에서 트랙터 타고 전국 일주를 다시 하고 있다. 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농민들의 편지를 모아서 농식품부 장관에게 전달하는 프로젝트다. 한국 농촌을 속살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벼농사만 보고 자란 내가 언제 산수유를 수확해보고 총각무를 뽑아 보겠습니까. 지난주에는 산수유 마을에 갔다 왔는데 그게 한약으로 분류돼 있대요. 한약으로 돼 있으면 다양한 상품을 못 만드는 거죠. 지금 투쟁 중이라는데 이런 측면을 가서 배우는 거죠.”

평일에는 강연을 많이 한다. 청년 대상인데 자신의 도전 스토리나 10대·20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방향성 등에 대해 강연한다. 내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하동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출연 예정이다.

브라질 여행 후에는 하동에 이름하여 ‘열정학교’를 만들 생각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교육하고 여행입니다. 특히 교육이야말로 농촌을

   

 살릴 지렛대라고 생각하는데요, 지리적이나 문화적 문제로 배우지 못하는 시골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생각입니다. 간단한 신문 사설 읽기부터 독서토론까지 소소한 것부터 좀 만들어낼 생각입니다. 주말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동을 벗어나 승마나 번지점프를 하러 간다든지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게끔 하고요.”

열정학교 주관으로 다달이 한차례 ‘열린 군민강연회’도 열 생각이다.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됐고 그의 인맥을 동원해 사회 저명인사를 초빙해 강좌를 열겠다는 것.

“공짜로 하면 안 돼요. 문화적인 것에 지불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정당하게 지불하고 문화적 혜택을 받는 것을 일상화하고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책도 3권을 낼 생각이다. 그것도 내년 중에. 이미 국내 트랙터 여행기 <180일간의 트랙터 다이어리>를 낸 그는 내년에는 젊은이들 여행 길라잡이가 될 수 있게끔 ‘여행 기술’이라는 책과 SBS와 진행 중인 프로그램이 끝난 후 청년들이 ‘아 농업이 이런 거구나’하고 느낄 수 있는 책, 터키와 중국·브라질 트랙터 여행 후기 이렇게 3권을 내겠단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공부하고 싶단다.

“브라질 여행 다녀오면 2년간 유학을 준비할 것입니다. 농업 정책을 공부하려고요. UN 식량기구 같은 데서 일하고 싶기도 하고요. 향후 5년간 목푭니다.”

교육, 특히 농촌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데 지난 2월 18일에는 하동에서 전북 완주까지 리어카에 텐트와 취사도구를 싣고 도보여행을 했다. 무려 180㎞에 이른다. 그곳에 있는 운주초등학교가 폐교될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는 폐교를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3월 4일 개학날에 맞춰 도착해서는 선물도 나눠주고 인맥을 동원해 작은 음악회도 열어줬다. 그뿐 아니다. 그렇게 걷는 동안 1㎞에 100원씩 기부를 받았다. 그렇게 기부자 1000명을 모아 모두 180만 원을 마련했다.

네팔 여행중에

“네팔에 조카들이 있어요. 한국인 선교사가 부모 없는 아이 6명을 거둬 사는데요, 지난 1월 네팔 여행 갔다가 만났죠. 가장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네팔을 여행해보고 싶다기에 약속을 했습니다.”
네팔 여행하는데 180만 원정도 소요돼서 그 여행 경비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게 운주초등학교 작은 음악회를 마치고는 곧바로 네팔로 가서 약속을 지켰다. 아이들과 함께 배낭을 꾸려 네팔 동부 배낭여행을 하고 왔다.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포기 대신 죽기살기로’라는 <개그콘서트> 코너 ‘용감한 녀석들’ 가사야말로 강 씨를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수사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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