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웃음·박수소리를 되찾아드립니다

신정열(60) 단장은 말수가 적었다. 천막생활 할 때의 얘기를 하면서도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로 짧게 얘기할 뿐이었다. 옆에 있던 단원은 “술 마시모 말씀도 잘하시멘서…”라며 답답해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묵묵히 이겨내고 비로소 나누는 행복에 정착한 신 단장은 마음 맞는 이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시름을 떨치는 평범하고 따뜻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해오름예술단의 소박하지만 소중한 공간. 사무실을 빼곡히 채운 공연 장비와 벽에 붙은 사진에서 해오름예술단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40여 년 전 고향을 떠나 요행 없이 노력한 만큼의 행복을 꿈꿨던 순박한 청년은 남들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지금의 평범한 생활에 안착했다.

신정열(60) 단장은 올해 3월과 6월, 두 번의 암 수술을 이겨냈다. 그는 큰 수술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듯 세상이 달라 보이거나 아름답게 느껴진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다고 했다. 병이 왔으니 이겨냈을 뿐이고 예전보다 힘은 좀 달린다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그리고는 이내 침착하게 기억을 거슬러 옛날 얘기를 시작한다.

   

5만 원이 모자라 포기한 꿈

진주가 고향인 신 단장은 스무 살이 되기 전 어린 나이에 독립을 했다. 유년시절이 어땠냐고 묻자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는 듯 잠시 기억을 더듬다 이내 말을 거둔다. 아니면 행복한 추억이 없는 걸까. 학교에 큰 미련이 없었던 신 단장은 고등학교 중퇴를 하고 일자리를 찾아 훌쩍 부산으로 향한다. 큰 기대 하지 않고 찾아갔지만 낯선 도시는 덜컥 신 단장에게 달콤한 기회를 안긴다.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는 것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지인을 통해 우연히 작곡가를 만나 데뷔곡 ‘고향친구’를 받게 된다. 생각하지도 못한, 가수로 활동하는 화려한 삶이 열리는 듯했다.

“부산에는 일자리를 찾고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생각으로 갔어요. 예전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어요. 어머니가 전통무용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그런 끼를 닮았는지(웃음). 우연히 지인 소개로 곡을 받았고 정식으로 가수를 할 기회가 생겼어요. 곡을 받아서 열심히 연습하고 서울 가서 활동하고 노래할 생각에 너무 들떠 있고 했는데 당시 돈으로 5만 원인가 모자라서 앨범을 못 냈어요. 그때 레코드 녹음을 하려면 서울에서 LP 500장을 하는 게 기본이었어요. 너무 안타깝게 그 돈이 모자라서 녹음은 못 했지만 가수 등록은 했고… 내 노래를 가지고 나이트클럽이나 다른 작은 무대에서 활동은 좀 하다가 결국은 접게 됐죠. 상심이 컸어요.”

‘사우디 산업전사’? 남은 건 없었다

   

부풀었던 마음을 애써 다잡은 신 단장은 음악과 전혀 거리가 먼 길을 가게 된 듯했다. 번듯한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직을 한 것이다. 6년 동안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며 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했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인생에 다시 제동이 걸린 것은 파업에 동참하면서이다. 자세히 풀지 못하는 얘기지만,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신 단장은 해고당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고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좋아하던 노래도 접고 타지에서 겨우 찾은 안정이었다. 하지만 신 단장은 금세 훌훌 털고 일어났다. 슬퍼할 시간에 얼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마침 그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 붐이 한창일 때. 돈을 많이 벌겠다는, 단순하지만 가장 간절했던 꿈을 가지고 신 단장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간다. 제도 기술이 있었던 덕에 기술직으로 일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일은 할 만했다고 한다. 더운 날씨도 참을 만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한국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었지만 늘 그랬듯이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내며 지내던 중 일이 벌어졌다.

“현장에서 우리 직원들이 감독을 하고 태국 사람들이 위험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배 해체작업인데 볼트를 빼내면서 떨어지는 배를 피해야 해요. 높이가 한 100m 되는데 그걸 안 피하면 큰일이 나죠. 그때 내가 감독을 해야 하는 데 화장실이 급했어요. 일을 같이하던 동료가 자기가 잠시 맡아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잠시 볼일을 보러 갔는데… 그때 사고가 났어요. 그 동료가 떨어지는 거를 못 피하고 죽었어요. 죄책감에 엄청 시달렸죠. 내가 죽어야 했던 건데. 나 대신 죽은 거다. 이런 생각만 하고, 많이 울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온 신 단장은 겨우 자신을 추스르고 그동안 번 돈으로 잘 살아볼 참이었지만 삶은 또 그렇게 쉽게 흘러가주지 않았다. 그때의 절망감이 떠오르는지 신 단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돈으로 10억 원은 족히 되었을 텐데… 전 부인이…(조심스럽게) 그동안 번 돈을 다 탕진했더라고요. 춤춘다고…. 그렇게 헤어지고 방탕한 생활을 3~4년 했어요. 타국살이 서러움, 그리운 거 다 참고, 힘든 일 치르고 나서 잘 살아보겠다고 이 악물고 돌아왔는데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 의욕이 없었죠. 그때는.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정신이 들어서 여기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창원에 왔어요.”

이제 잘 살아볼 만도 했지만

30대 중반이 거의 다 되어 창원으로 온 신 단장은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묻자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아이를 낳았을 때라 말했다. 온전히 절망감을 벗어버리지 못했던 신 단장에게 아내는 따뜻한 봄 같았을 것이다. 신 단장은 기운을 냈다. 이제 잘 살아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가족을 향한 애정과 책임감이 밑천이자 원동력이었다. 신 단장은 통 크게 용기를 내었다. 현장에서 쌓은 기술을 믿고 건설 회사를 차린 것이다. 그의 이상이 음악이라면 그의 무기는 그동안 현장에서 익힌 건설일이었다. 회사를 운영하는 건 지금까지의 인생만큼 녹록치 않았다. 사업실패는 결국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집이 없어 밖에다 천막을 쳐 생활했다. 아프고 시렸던 기억이다. 신 단장은 흥이 필요했던 건지 음악이 당겼다.

   

“2년 동안 전자 오르간 출장 밴드를 했어요. 업소 같은 데서 밤무대 활동도 하고, 아주 열심히 했는데…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건설일을 시작했죠.”

무모하다 싶었지만 결국 그는 건설업으로 일어선다. 힘들게 얻은 성공이었다. 돈도 꽤 많이 벌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벌이는 좋았어요. 근데 마음이 안 편했어요. 또 노래가 하고 싶고(웃음)… 그러다가 저랑 안 맞는 일이었는지 큰 사고를 당했어요. 다리를 만드는 공사였어요. 현장에서 감독하는데 그게 무너진 거죠. 큰 사고였어요. 수술 받고 식물인간으로 몇 달을 누워 지냈어요. 우스갯소리로 사람들한테 번개가 제일 겁난다고 하는데 지금도 목이랑 허리에 쇠가 박혀 있거든요.”

사고 후 신 단장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야 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나 했던 그는 또 갑작스러운 시련에 휘청거린다. 이때의 일은 그가 지금의 신 단장을 있게 하긴 했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찔했던 사고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신 단장은 무언가를 깨우친 듯 많은 것을 내려놓는다. 회사 대표라는 자리도, 꽤 좋았던 수입도… 이상을 택한 건지 현실에 타협한 건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신 단장은 지금 택한 길이 딱 맞춘 듯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병원 위문공연 보고 해오름예술단 설립

해오름예술단은 2008년 만들어진 비영리 민간단체이며 해오름봉사예술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처럼 주로 공연 봉사활동을 하며 국악, 전통춤, 대중가요, 악기, 마술 등을 하는 전문예술인 단원과 뜻을 함께하는 일반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체의 목적을 알리고 꾸준히 활동하는 과정에서 모두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사고 후 아무리 인생에서 중요한 기준을 다시 세웠다 해도 어떻게 비영리예술단체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됐을까.

워낙 큰 사고였던 탓에 몸을 추스른 후에도 신 단장은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야 했다. 여느 날처럼 병원을 찾았던 신 단장은 다른 단체에서 하는 위문공연을 보게 된다.

   

“병원에 갔는데 그날 마침 위문공연 봉사를 하더라고요. 너무 열심히 좋은 마음으로 하시는데 장비도 안 갖춰져 있고… 노래방 기계에다가 노래하니까 흥도 덜 나고 좀 초라해 보여서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물론 봉사하는 거 자체가 좋은 거고 의미 있지만 이왕이면 장비도 갖추고 체계적으로 준비해 좀 더 사람들이 흥겹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내가 할 일이 저거다 싶었어요. 그 길로 장비를 구입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건설 일을 할 때와 비교해 벌이는 어떠냐고 물었다. 딱 잘라 벌이는 거의 없다고 했다. 무료 공연 활동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예술단을 운영하느냐고 물으니 지자체에서 지원금을 받긴 하지만 단원들의 차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적자를 막는 데에 힘이 부친다고 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이벤트업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벤트업으로 낸 수입으로 예술단을 잘 꾸리고 고생하는 단원들에게 더 잘 해주는 게 신 단장의 바람이다. 이번 암 수술 후에 몸에 피로가 빨리 찾아와 무거운 음향장비를 옮기는 일도 더욱 버겁고 크게 다가오지만 요즘 행복하다고 신 단장은 웃으며 말한다.

   

노인들 활짝 웃을 때 가장 보람차

해오름봉사예술단의 주 고객(?)은 노인들이다. 낙이 없어 웃음을 잃은 노인들이 공연을 보고 활짝 웃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노인 분들 상대로 많이 해요. ‘실버가요제’라는 걸 꾸준히 열고 있는데 많이 좋아하세요. 어르신들이 마음 놓고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거의 없잖아요. 요양시설이나 양로원에 찾아가서 공연봉사도 하고… 어르신들이 박수치고 웃으시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일부러 다른 단체에서 잘 안 가는 먼 곳에 많이 가려고 노력해요. 노인시설이 아니라도. 얼마 전에는 아파트단지에서 주민들 모아서 영화 상영을 했어요. 주민들 화합하는 목적이라서 그냥 도와드렸어요.”

   

옆에 있던 단원이 얘기하길 신 단장은 공연을 할 때 잘 나서지 않는다 했다. 어엿하게 가수 등록도 되어 있고 고달팠던 생활을 하면서도 끝내 음악을 놓지 못했던 사람이 노래를 안 하고 싶을 리는 없지 않을 텐데… 신 단장은 쑥스러운 듯 웃기만 했다.

갑자기 찾아온 병을 이겨내느라 지쳐 아직 노래 한 곡 부를 기운이 없는 거라면, 언젠가는 편안한 목소리로 부르는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며 인생의 고개를 넘어왔을 이의 노래에는 분명 삶의 모든 맛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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