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아니라 기술 씨름으로 천하를 잡는다

요즘 모래판에서 가장 핫한 스타는 단연 정경진(27·창원시청) 선수이다.

정경진은 지난주 열린 추석장사씨름대회에서 통산 4번째 백두장사 타이틀과 함께 올 시즌 3개 대회(보은장사, 청양단오, 추석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하며 씨름판 최강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민속씨름 중량급에서 3개 대회 연속 우승 기록이 나온 것은 지난 1983년 이만기(인제대 교수) 장사의 5개 대회 이후 꼬박 20년 만이다.

스타 부재에 속을 끓이던 씨름계도 정경진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세련된 외모에 기술까지 다양한 정경진은 이태현, 최홍만, 황규현 이후 대가 끊긴 씨름 스타의 계보를 이을 대표 주자로 손꼽힌다.

백두장사 가운을 입고 당당히 금의환향한 정경진을 마산 서원곡 씨름장에서 만났다.

백두급으로 전향, 생애 최고의 선택

이승삼 감독의 안내로 만난 정경진은 1m 88㎝의 키에 체중 140㎏에 가까운 거구지만 ‘유연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하게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는 “처음부터 최중량급에서 뛴 게 아니라 한라급(110㎏급 이하)에서 점차 체중을 불려 여기까지 찌게 됐다”며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 체중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지금은 몸무게에 상관없이 운동에만 전념해 성적이 잘 나오는 것 같다”고 웃었다.

   

인제대 시절까지 한라급에서 뛰었던 정경진은 2009년 창원시청 입단 뒤 이승삼 감독의 권유로 백두급으로 체급을 변경했다.

살이 찌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정경진은 항의했으나 이 감독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이 감독은 “3년 안에 꼭 백두장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믿음대로 정경진은 실업팀 입단 3년 차였던 지난 2011 단오대회에서 생애 처음 백두장사에 올랐다.

이슬기, 윤정수 등 백두급 강자에 가려 이렇다 할 빛을 보지 못했던 정경진은 입단 3년 만에 꽃가마를 타며 무명의 설움을 깔끔히 털어냈다. 생애 처음으로 백두장사 타이틀을 획득한 그는 승승장구하며 백두급을 넘어 대한민국 씨름판을 호령하고 있다.

정경진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게 씨름 기류가 강한 백두급에서 다재다능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정경진은 타고난 유연성에다, 경량급부터 씨름을 시작한 덕분에 밭다리, 빗장걸이, 돌림배지기 등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정경진은 “유연하다는 말을 자주 듣긴 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며 “다만 체중이 많이 나가다 보니 근력과 균형성에 관한 훈련을 많이 하는데 이게 기술을 구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아닌 처남과 합숙하는 백두장사

이번 추석 대회를 앞두고 대진표를 받아든 정경진은 한동안 머리가 아팠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어려워하는 스타일의 선수들이 대거 몰렸기 때문이다. 특히 4강에서 맞붙었던 이슬기(현대삼호중공업)는 인제대 한 해 선배로 매우 잘 알아 힘들었다고 했다.

“슬기 형과는 워낙 많이 붙어봐서 그런지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잘 안 생기더라고요. 게다가 형이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혹시나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싶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정경진은 두 번의 연장전 끝에 이슬기에 승리해 결승에 진출했고, 그 기세를 몰아 손명호(의성군청)까지 3-2로 잠재우고 체급 정상에 등극했다.

정경진은 “이번 대회는 무척 어려웠다. 손을 꼽아보니 예선부터 20판 이상을 치렀더라. 그 덕에 이번 대회 기간에 3㎏이나 몸무게가 빠졌다”고 넋두리를 했다.

‘정경진’ 하면 으레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미모의 아내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정경진은 지난 5월 동갑내기인 이주현(27)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씨는 정경진이 출전하는 대회마다 항상 응원을 와 카메라에 그 모습이 자주 잡힌다.

“처음에는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으로 응원을 왔는데 그게 카메라에 잡혔나 봐요. 주위에서 드레스 코드에 신경을 쓰라고 했는지 추석장사 때는 더운 날씨에도 긴 소매 옷을 입고 왔더라고요. 좀 신경을 쓰는구나 싶었죠.”

   

아내를 맺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팀 후배 이대현(한라급)이다. 이대현과 고교 선후배 사이인 정경진은 동생 이대현을 응원하려고 창원을 찾은 지금의 아내와 친해져 결혼까지 골인했다.

아내가 아닌 처남과 함께 합숙생활을 하는 정경진은 “어릴 적부터 아는 동생이라 처남이라는 소리가 잘 안 나온다. 대현이도 저를 매형보다는 형이라고 부를 때가 잦다”고 했다.

용돈은 자주 주느냐는 질문에 ‘아니요. 저는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지만, 처남은 월급을 관리하잖아요. 저보다 훨씬 씀씀이가 나은 걸요’고 손사래를 쳤다.

뭐가 그리 급해 27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지도 궁금했다.

“제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아니예요. 2년 정도 사귀었는데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일사천리로 결혼식을 치렀죠. 지금도 주말부부로 지내는데 제가 운동을 은퇴할 때까지는 숙소 생활을 해야 해 신혼이 길어질 것 같네요.”

정경진의 대답이었다.

목표는 11월 천하장사대회

그의 올 시즌 목표는 오는 11월 열리는 천하장사대회를 석권하는 것이다.

지금의 기세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씨름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정경진도 생애 첫 천하장사 타이틀에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장사 타이틀은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천하장사라며 더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 하늘이 점지해주지 않을까 싶어요. 불교 신자인 아버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시니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주시겠죠.”

자신에게 거는 씨름계의 기대를 아는지 씨름이 이전의 명성을 되찾는 데 뭐든 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이전에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무조건 거절했어요. 제가 낯을 좀 가리거든요. 그런데 최근 KBS <우리 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만약 씨름을 하게 되면 꼭 출연하고 싶어요.”

정경진은 또 “이전에 대학씨름부 대항 단체 시합이 있었는데 그때 마빡이 춤도 추고, 말 가면도 쓰고 참 재미있게 대회를 치른 기억이 있다”며 “씨름판이 보수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그런 시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씨름판에서 기합조차 넣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의 정경진이지만 씨름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말가면’을 쓰는 것까지 감수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정한 씨름인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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