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을 더 다양하고 더 새로운 문화특구로 발전…"

그녀에게 질문을 하면 막힘이 없었다. 물고기가 한 번에 미끼를 덥석 물듯, 그녀 또한 질문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는 아주 세밀하고 또박또박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듣다보면, 이야기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일 처리도 완벽하게 했다. 인터뷰 전, 사전질문지를 이메일로 보냈는데 질문에 대한 답만 보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과거 인터뷰했던 자료까지 보내왔다. 이런 인터뷰이는 처음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녀를 만났다.

하효선(57) 씨는 ACC프로젝트 아트디렉터(Art director) 겸 창동레지던스 대표다. 그녀의 남편은 ACC프로젝트 대표며 경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다. 하 씨는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278번지 3층에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공모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원 사업에 선정됐기 때문.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작업실이 없는 예술가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예술가는 그곳에서 머물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기간은 최소 3개월부터 최대 1년 정도. 하 씨가 운영하는 ‘창동레지던스’는 올해 화가 일리아드 사브치(이란)와 릉이유와(홍콩), 성악가 임마누엘 귀게와 이자벨 귀게(프랑스), 무용‧연극인 샤흘로뜨 아비아스(프랑스), 화가 최지환, 무용가 박은혜, 영화감독 허성용 등 총 8명이 참여했다.

하효선 ACC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겸 창동레지던스 대표 ./김구연 기자

-ACC프로젝트 연혁을 보니까 다양한 활동을 많이 했던데요. 올해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그리고 왜 작업실을 창동으로 정했는지.

“창동 측에서 먼저 제의를 해왔습니다. 우선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선 ‘장소’가 중요한데요. 예술인이 거주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 즉 아틀리에가 여럿 필요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부분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도심이 아닌 교외에서 많이 이뤄집니다. 차별화를 두고 싶었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도심형 레지던스’입니다.”

-인상 깊었던 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먼저 예술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글쎄요. 개성이 강하고 감성적인 사람?

“워낙 성격들이 강해서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죠. 저희 창동레지던스는 국적과 분야가 다양해 걱정을 했는데, 나름 잘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은 지역문화계에선 아직까지 고전적인 레지던스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웃음)”

하효선 ACC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겸 창동레지던스 대표 ./김구연 기자

-창동레지던스를 계속 운영할 건가요?

“사실, 고민 중입니다. 제한된 지원금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습니다. 경제적 타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시도했던 거라…. 여건만 되면 유럽과 미주, 아시아 등과 연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아, 며칠 전 전화통화 했을 때, 내년 프랑스 낭트에 간다고 했잖아요.

“네. 프랑스 낭트에서 내년 1월 23·24일 BIS(Biennales Internationles Du Spectacle)가 열립니다. 아트마켓(예술시장)이라 생각하면 되요. 한국에선 유일하게 ACC프로젝트가 부스를 마련해 참여합니다. 현지인들에게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작품성이 탄탄한 (우리나라)작품을 소개하려고요. 무용가 김매자 창무예술원 이사장 등 몇몇을 섭외하고 있습니다.”

-경남 지역에 연고를 두고 활동하고 있지만, 활동 범위는 국제적이네요.

“네. ACC프로젝트는 지역에 있지만, 지역에서만 활동하지는 않아요.”

-ACC프로젝트란 단체는 언제 만들어졌고, 어떤 활동을 하나요?

“ACC(Art & Cinema Communication)프로젝트는 영화와 예술로 소통을 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전시와 공연, 출판, 영화 기획(제작, 배급) 등을 비롯해 문화예술정책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ACC프로젝트 전신은 1999년 창립된 ACC 프랑스 그로노블 한국문화협회입니다.”

-그게 뭔가요?

“1989년 2월 저는 남편인 서 교수와 아들, 딸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어요. 약 20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항상 마음속엔 ‘공허함’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 교수와 함께 유학생, 입양인, 국제결혼인 등을 아우르는 협회를 발족하게 됐습니다. 한인회는 아니었고, 현지인에게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려보자는 취지였습니다.”

하효선 ACC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겸 창동레지던스 대표 ./김구연 기자

-그랬군요.

“설, 추석 등 명절이 오면 가까운 친구, 이웃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점차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공공장소를 임대해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했죠.”

-ACC프로젝트 홈페이지를 보니까 ‘2002년 2월 제1회 한국설날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2006년 한불수교 120주년까지 매해 총 5회의 페스티벌을 조직했다’고 언급돼 있던데…. 자세히 설명해주시죠.

“그동안 조순자 가곡전수관 관장과 중요무형문화재 대금 명인 원장현, 국악인 이춘희, 중요무형문화재 구례향제줄풍류의 거문고 명인 김정애 등 한국 예술가 약 100여명을 초청했습니다. 또한 약 90편의 한국영화를 상영했고, 음식시연회와 한복패션쇼, 한국도서전시 등도 했습니다. 뭐 나름대로 순수 예술과 실용 예술을 아우르는 한국 문화를 보여주려고 프로그램을 짰었죠.”

-프랑스인의 반응이 궁금한데요?

“뜨거웠죠. 민간단체가 조직한 페스티벌로 유럽에서 유일무이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설날 페스티벌은 유네스코가 제창한 ‘문화적 다양성’의 해법을 유감없이 보여준 중요한 사례였습니다. 비록 한국문화행사였지만 프랑스 문화부와 이제르도(道), 그르노블에서 지원한 행사여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사회에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한류를 일으키는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죠. 한국설날 페스티벌이 프랑스에 끼친 공헌을 인정받아 프랑스 문화예술최고전문가 그룹에서 하는 연수를 받았고, 이 분야 국가 자격증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효선 ACC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겸 창동레지던스 대표 ./김구연 기자

-근데, 프랑스 유학은 왜 떠나셨나요?

“저는 부마민주항쟁(1979)과 5·18 광주민주화 항쟁(1980), 6월 민주항쟁(1987)을 피부로 겪었습니다. 유학을 선택한 건 한 마디로, 사실 암울했던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어요.”

-많이 힘들었나보군요.

“그때 삶은 집현전, 서점, 출판사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죠. 제본일이 서툰 사람들이 물량을 맞춰내느라 밤샘을 밥 먹듯 하고 임신한 몸으로 스테이플러를 하도 눌러서 전치태반으로 아이를 잃을 뻔도 했죠.”

-집현전은 뭔가요?

“저는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기 76학번입니다. 학교 다닐 때 극예술연구회와 마산연극회, 로타랙트(봉사동아리), 사회과학 토론회 등에 흠뻑 빠져있었죠. 당시 여러 사회운동 그룹이 있었는데, 집현전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대학 다닐 때,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금서목록을 작성해 학생들의 지적활동을 탄압했습니다. 집현전은 양서조합으로 회원들이 개인적으로 구입한 책들을 서로 모아서 읽고 빌려가고 또 토론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어떤 사람들이 모였나요?

“서익진 교수를 비롯해 주대환, 박진해, 이봉조, 김종철 등 서울 지역 학교 출신들과 경남 지역 학교 학생들이 주로 모였죠. 당시 사회분위기 때문에 집현전 사람들은 노출되기를 꺼려했어요. 저는 마산에 살다보니 그곳 지킴이 역할을 했고, 주로 책 목록 작성과 책 구입을 맡았습니다. 특히 집현전 회비가 모이는 대로 부산 등지를 돌며 양서를 구입했어요.”

하효선 ACC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겸 창동레지던스 대표 ./김구연 기자

-부마민주항쟁 때, 집현전은 괜찮았나요? 혹시 들키거나….

“당시 회원들이 책을 대여해 갈 때 쓴 일지가 있었는데, 부마민주항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숨긴 것이 바로 그 일지였어요. 다행히 서둘러 정리를 해 직접적으로 집현전이 피해본 건 없었습니다. 만약 그 리스트가 발견되었다면 가장 위험한, 불온한 집단으로 타격을 받았겠죠.”

-서익진 교수와는 집현전에서 만났군요.

“젊은 남녀가 이상과 신념을 나누다 눈이 맞은 거죠.(웃음)”

-결혼은 언제했죠?

“1982년에요.”

-그때 삶은 어땠나요?

“그 당시 어려웠던 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한국 역사가 겪은 어려움이었습니다. 서 교수는 긴급조치 9호로 수감생활을 1년 반 정도 한 상태였고 이어서 군에 다시 끌려갔고 그리고 갓 제대하고 난 후여서 처지가 참 난감했었죠.”

-그랬군요.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서점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리고 출판사를 하게 됐죠. 출판사로 시작하긴 했지만 결국 인쇄소로 전락했고…. 빼지도 박지도 못하면서 6년을 했습니다.”

-그랬군요. 아참, 프로필을 보니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청운출판사 대표 무크지 ‘마산문화’ 2호와 3호를 발행했던데요. 청운출판사가 앞에서 말한 그곳이군요.

“네. 맞아요. ‘마산문화’는 총 4권이 발간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중 2권을 청운출판사에서 발행했습니다.”

-마산문화는 어떤 내용이었죠?

“마산문화의 발행 목적은 지역 역사와 인물을 제대로 알고 도시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해 지역의 특수성과 가치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청운출판사는 지역사회운동단체들의 유인물을 제작하는 곳이라 보면 되요.(웃음) 그때 당시 이 지역은 노조가 활발했고 특히 창원과 마산은 한국경제 시스템을 보다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출판사에는 필진과 고객보다 형사들이 더 들락날락 했죠.”

-이후 출판사를 접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거군요. 근데 왜 프랑스 그르노블이었나요?

“처음에는 프랑스 남부 몽쁠리에(Montpellie)에서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이후 여러 군데 입학 원서를 냈고, 최종적으로 파리 10대학에 속하는 그르노블 대학교를 선택하게 됐죠. 그곳에는 그르노블 조절학파의 대가 꼽히는 베르니스 교수가 있었고, 그 교수 밑에서 서 교수는 공부를 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학교도, 직장도, 결혼도, 서울에서 하려고 하잖아요.

“그르노블에서 활동할 때 많은 사람들이 왜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하지 않느냐고 많이 물었어요. 왜 지방에 있냐고…. 저는 제가 있는 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그곳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하효선 씨는 어떤 공부를 했나요?

“앞서 말한 대로 제 전공은 정치외교였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떠나자마자 천안문 사건(1989)이 터졌고 같은 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국제적 변화를 맞으면서 관심이 점점 인문학 쪽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그래서 국제정치, 역사와 미술사, 사회학, 영화학 그리고 인류학 등을 공부했죠.”

-마산 토박이로 알고 있는데요. 창동에 계속 있으실 거죠?

“그렇죠. 마산 오동동에서 태어난 걸요. 저희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 창동은 서울 명동은 저리 가라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인위적인 예술촌을 형성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만…어떻습니까? 그건 시대 변화에 따른 도시의 변천과 흥망인걸요. 더 다양한, 더 심도 있고 짙은, 더 새로운, 더 넓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시켜 가야합니다. 예를 들면 문화특구 같은 거죠.”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프랑스와 우리나라 문화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었다. “저쪽(프랑스)은 새로운 것, 모르는 것, 다른 것을 호기심으로 보고 이곳(우리나라)은 틀렸다고 말한다”면서 “틀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름’이라는 것, 사람들에게 또 이것을 어떻게 이해, 소통시켜 나가야 할지가 제 과제인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이후 행보에 더욱 기대를 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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