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위한 요리는 없어도, 시금치 빠진 요리는 아쉽다

"시금치 요리? 우리는 그냥 따서 쌈 싸먹기도 하고, 된장에 찍어 먹지."

남해군 설천면에서 시금치를 다듬던 아주머니의 이야기다. 의외다. 서리가 녹으면서 이슬이 맺힌 시금치를 한 잎 따서 먹어 보았다. 아삭! 아~ 그래서 그랬구나! 갓 딴 시금치는 씹히는 맛과 단맛이 일품이었다. 그 맛이 자꾸 당겨 취재하는 동안 수시로 잎을 따 먹었다. 농약 걱정은 말라며 동행한 농민도 한 잎 따더니 맛나게 씹는다. 날이 추울수록 속이 익어가는 시금치는 여름 작물에 비해 병해충 걱정이 덜하기 때문이다. 싱싱한 시금치를 익히지 않고 먹는 것. '시금치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재배지를 옮길 때마다 수시로 먹다 보니 이 사이에 시금치가 낀다. 돌아오는 길에 혀로 이 사이사이를 청소 중이지만 만만치 않다. 워낙 싱싱한 것들이라 성실하게도 숨어들었다. 그리고 맘도 무겁다. 이 사이에 잘 빠지지 않는 뭔가가 낀 것처럼 개운치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금치요리? 도대체 어디서 찾지?"

우동

그렇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시금치이긴 하다. 가정이나 식당에서 밥상의 보조출연자로 언제나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맛 기사를 쓸 만큼의 시금치 요리란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이상한 점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기억이 질감이 제법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어디였을까? 어디 소박한 백반집이었나? 아니면 뷔페? 혹은 집에서? 뇌의 여러 부분이 모여 '브레인 스토밍'을 하듯 회의를 열었다.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회의가 지루해지자 한편에서 잡담을 한다.

계란말이

"야, 니 요새 응사 봤나? 완전 재밌데이"

"응사? 그기 뭔데?"

"참나… 그것도 모르나! 마산 이야기 나오는 드라마 아이가! 시민극장, 몽고간장, 코아양과! 요새 얼마나 인기 있는데."

그 말을 흘려듣던 다른 쪽이 갑자기 일어서며 말한다.

김밥

"맞다! 응사! 마산! 창동! 거기다!"

인간의 뇌는 깊이를 알 수가 없다. 무의식의 서랍 속에 어떤 광대무변의 데이터들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시금치 요리'의 기억은 사실이었다. 그곳은 바로 창동 먹자골목이다.

기억은 이렇다. 백여 평의 공간에 대충 배치한 가게들이 있었다. 가게 간 경계랄 것도 없다. 가운데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가장자리를 빙 둘러 앉아 먹는다. 약간 어두웠다. 쌌다. 붉은 빛이 도는 당면이 큼직하게 썬 시금치들과 섞여 김이 나고 있다. 시민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내려와 잡채며 우동을 주문해 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동에도 시금치가 있었다!

설마 아직도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먹자골목을 찾았다. 창동 사거리에서 경남대 방향으로 50여 미터를 가 나오는 사거리에서부터 먹자골목이다. 그리고 기억속의 먹자골목은 골목 왼편의 건물 안 1층이다. 유년기로 돌아가는 문이 있다면 이런 문이겠다. 두근두근… 투명비닐 블라인드를 젖히며 안으로 들었다.

이런 걸 반전이라고 하겠다. 환하게 생기가 넘치는 그곳은 시간을 거꾸로 살아온 것 같았다. 점심을 약간 넘긴 시간이었지만, 손님들로 북적였고, 기분 좋은 음식 냄새와 잡담들로 따뜻했다. 먹자골목은 자리를 잡는 것이 제일 어렵다. 가게 간 경계가 없기 때문에 어디 앉아야 할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30년이 넘었다고는 하는데 당신 자신도 얼마나 했는지 기억 못할 정도로 오래 장사를 하셨다는 김경자(68) 씨의 '진주집'에 앉았다. 함께 일하는 분은 동생인 명자(54) 씨다. 10년 전부터 도왔다고 한다.

떡볶이

우동, 잡채, 김밥을 주문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즉석에서 조리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시금치다. 김밥용으로 데쳐 간한 것, 비빔밥에 내기 위해 조리한 것, 잡채나 우동에 넣기 위해 생것을 썰어 담아 놓았고, 단 째 묶여 가게 한편에 쌓아 놓은 것도 있다. 사정은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다. 시금치 요리를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시원한 보리차로 목을 축이면 우동이 먼저 나온다. 시금치, 푼 계란, 양파, 당근, 대파를 함께 끓인 멸치국물에 우동과 어묵, 떡이 들었고, 그 위에 김, 고춧가루, 깨소금이 듬뿍 얹혔다. 더운 김과 함께 시금치 향이 함께 올라온다. "여름엔 부추를 많이 쓰지만, 겨울엔 무조건 시금치지. 많이 나가면 하루에 4단도 써." 시금치를 아끼지 않고 음식에 넣는다. 면발과 시금치를 함께 먹으면 조화가 훌륭하며 국물은 말해서 무엇하랴. 조미료가 들고 안 들고는 중요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그냥 맛있다.

이어서 기억 속의 잡채가 나왔다. 끓는 물에 데친 당면을 시금치, 당근, 양파 위에 올리고 간장과 설탕, 참기름으로 간 해 볶으면 끝이다. 잡채는 눈이 더 즐겁다. 붉은 면과 푸른 시금치, 듬뿍 뿌린 깨소금의 색의 조화가 훌륭하다. 적당히 비벼서 김 나는 그것을 후루룩 먹으면 간장과 시금치의 향이 맛을 돋운다. 남해 할매들 손에서 자란 시금치가 마산 창동 할매들 손에서 완성되는 순간이다. 시금치, 연근, 어묵, 단무지, 계란이 든 여기 김밥은 이제 흔히 경험할 맛이 아니다. 편의점 생기듯 마구 들어선 무슨무슨 김밥전문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 여기 있다. 꼬들꼬들한 밥알이 윤기 나는 김에 잘도 붙어서 차지다.

잡채

김밥, 잡채, 우동은 각각 3000원. 속초나 강릉의 먹자골목에 가면 묵사발, 배추전, 메밀전 등이 관광객들의 발을 잡는다. 식재료가 귀한 지역의 구황작물이 지역의 스타가 된 것이다. 싱싱하고 건강한 시금치 등이 넘쳐나는 우리 지역의 창동 먹자골목은 오히려 풍성하기에 덜 알려진 듯하다. 분식이 당길 때 가볍게 와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

이곳에선 시금치가 주인공이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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