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유한숙 어르신 음독 사망, 유족·대책위 "정부·한전 사죄를"

정부와 한국전력이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밀어붙이면서 벌써 두 사람의 목숨이 희생됐다.

밀양 송전탑 경과지 마을인 상동면 고정마을에 사는 유한숙(74) 씨가 지난 6일 오전 3시 50분 부산대병원에서 숨졌다. 고인은 지난 2일 밤 자택에서 송전탑 때문에 독극물을 마시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해 밀양 송전탑 공사에 항의하며 분신 사망한 산외면 보라마을 이치우(74) 씨에 이은 유한숙 씨의 죽음에 대해 이미 '예견된 사태'이자 '사회적 타살'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밀양 송전탑 문제로 고민하다 세상을 떠난 고 유한숙 어르신의 빈소가 밀양시 내이동 영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6일 빈소에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한전, 명분잃은 공사강행 = 지난 10월 공사재개에 앞서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현장에 움막을 짓고, 무덤을 파놓을 정도로 저항이 격렬했다. 그러나 정부와 한국전력은 송전탑 공사를 강행했다. 더구나 지난 10월 1일부터는 경찰 3000여 명 등 대규모 공권력을 투입해 공사를 밀어붙였다.

지난 6일 상동역 앞에서 농성 중이던 금호마을 최봉규(66) 씨는 고인의 죽음에 대해 "이런 결과가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합의나 주민 대화도 없이 공권력을 투입해서 너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고, 일부 보상합의한 것을 전체인 양 매도하고 있다"며 "이런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송전탑 공사 때문에 모든 생활이 엉망"이라고 안타까워했다.

7일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와 유족들이 고 유한숙 어르신의 장례일정과 향후 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반대위 어르신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박일호 기자

정부와 한전이 내세운 핵발전소 신고리 3·4호기 가동은 불량부품 교체로 미뤄져 공사를 서둘러야 할 명분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의 사회적 공론화 요구를 묵살해왔다. 주민들은 두 달여 동안 농성을 하면서 경찰과 대치·충돌과정에서 병원에 실려가고 붙잡혀가기도 했다. 급기야 경과지 마을 주민이 음독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밀양희망버스를 타고 전국에서 2000여 명이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1박 2일 동안 밀양을 다녀갔을 때도 밀양 송전탑 문제가 전국적인 문제가 된 만큼 정부가 공사를 중단하고 대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정부는 묵묵부답, 새누리당은 공사강행 의지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보라마을 김응록(71) 씨는 "장관이나 국무총리가 밀양에 올 때 공권력 투입 구실로만 삼았다. 옛날에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안했는데 밀양 와서는 주민과 만나 실정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라 궤변만 늘어놓고 가버렸다. 한마디로 '왔노라. 봤노라. 갔노라'였다"고 성토했다.

8일 밀양시청 앞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로 고민하다 세상을 떠나신 고 유한숙 어르신의 분향소를 설치하려 시청 내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날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던 한 주민이 호흡곤란증세를 보이며 자리에 누워 있다. 이 주민은 경찰의 도움을 원하지 않았고 곧 안정을 되찾았다. /박일호 기자

유가족과 밀양 765㎸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는 "고인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한전과 정부에 있다. 밀양 송전탑 경과지 주민들은 노선 선정의 잘못과 사업 타당성 부재, 주민 재산과 건강상 피해를 고려해 재검토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해왔지만 일방적으로 사업을 강행해왔다"며 고인에 사죄, 공사중단과 대안 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유가족과 대책위는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다. 지난해 1월 16일 보라마을 이치우 씨가 분신사망으로 밀양 송전탑 문제가 전국적으로 알려졌으며, 그해 3월 7일 공사가 중단될 때까지 장례가 미뤄지기도 했었다.

◇"국가폭력이 죽음 원인" = 정치권에서도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다.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은 "유한숙 할아버지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정했다. 민주당 장하나 의원도 "죽음이 뻔히 예견된 공사를 끝내 강행한 박근혜 정부의 국민대통합 약속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통합진보당은 "국민 안전과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놓아야 할 정부와 집권여당이 거꾸로 안타까운 희생을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의당 김제남 의원은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됐다. 이미 소통과 타협없는 공사 강행으로 벌어질 만일의 사고에 대한 모든 책임은 명백히 박근혜 정부에게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며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가 8일 밀양시청 앞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로 고민하다 세상을 떠나신 고 유한숙 어르신의 분향소를 설치하려 시청 내로 진입을 시도하자 이를 막아서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다. /박일호 기자

밀양 송전탑 공사로 주민 2명이 희생됨에 따라 밀양 사태 파장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밀양 송전탑 문제는 근본원인인 핵발전소 확대중심, 공급위주 에너지정책의 재검토요구로 확대됐다. 전국 2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밀양송전탑 전국대책회의'는 "국가가 죽였다"며 9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고 유한숙님 추모문화제'를 열 계획이다.

천주교·불교·천도교·기독교 등 종교계도 밀양 사태가 국가의 폭력에 따른 것이라고 여러 차례 우려를 표명해왔다. 특히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8일 대림 제2주일에 맞춰 낸 입장을 통해 "유한숙 어르신의 죽음을 비롯한 밀양 송전탑 사태는 지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일방적인 국책사업 강행이 엄청난 폭력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에너지공급정책의 전면적 재검토가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며 공사중단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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