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부문 대상 수상

최근 경남 미술계에 좋은 소식이 생겼다. 한국화가 김경현(49)의 ‘그 어느 날의 대화’가 제3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부문 대상을 받았다. 경남에서는 통영 출신 화가 김형근(83)이 197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이후 두 번째다. 제3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부문에는 총 826점이 응모 됐다. 이 중 수상작은 대상 1점, 최우수상 2점, 우수상 8점, 평론가상 4점 등 총 262점이다. 경쟁률이 높았다.

전화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자 화가는 “영광이고 쑥스럽다. 이 나이대에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주위에서 많은 도움과 힘을 주었다. 그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 창원시 의창구 신월동에서 마산회원구 내서읍으로 작업실을 이사했다며 한 번 놀러 오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축하인사도 전하고 인터뷰도 하고 겸사겸사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축하합니다.

“아이고. 뭐. 쑥스럽습니다.”

한국화가 김경현./김구연 기자

-어느 정도 기대는 했나요?

“(손사래를 치며) 먹으로 작품을 하니까 현대사조에 뒤떨어진다고 할까 봐 내심 걱정했습니다.”

-올해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개인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열렸던 날이 특별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날이 각각 돌아가신 어머님 생신일과 2주년 기일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크더군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한국화가 김경현./김구연 기자

-효자였나요?

“제가 결혼을 안 했는데, 그게 어머니의 가슴에 큰 못을 박았죠.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줄곧 ‘네가 결혼을 안 해서 내 가슴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불효자죠! 뭐.”

-눈물이 많은 것 보니, 어렸을 때도 감수성이 풍부했을 것 같습니다.

“내성적이고 정말 부끄럼 많은 아이였죠. 키도 작고 감수성도 풍부했고… 숫기도 별로 없었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누나 4명과 함께 살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요?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랬군요. 어렸을 때 그림을 곧잘 그리셨습니까?

“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소규모 미술대회에 나가서도 상을 종종 탔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유일한 아들이니,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셨을 것 같은데….

“반대했죠. (그림을) 하고는 싶은데, 반대를 너무 하니까. 한 날은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산중앙고등학교 2학년 때, 이때까지 그렸던 그림을 태우고 일요일 날 누나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아까, 창녕 출신이라고 했잖아요. 학교는 창원에서 나왔나 봐요.

“네. 유학을 왔죠. 누나 집에 있었습니다.”

-가출한 뒤에는 어디서 지냈습니까?

“짐을 싸서 화실로 왔죠. 어머니가 반대한 이유는 ‘그림을 그려서’가 아니라 자식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서였습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것도 힘든데…. 그래서 돈을 벌기로 했죠.”

-어떻게요?

한국화가 김경현./김구연 기자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만들어서 1장에 250원에 팔았죠. 성지여고, 마산여고 학생들에게. 정말 많이 만들었습니다. 하룻밤에 백 장정도 만들어서 팔았는데, 몇 달 여치 학원비를 마련했습니다. 분필을 바늘로 조각해 비너스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팔았습니다. 또 저의 가정형편을 들은 학원 선생님께서 밤 10시 이후 그림을 배우러 온 회사원에게 데생 강의를 할 기회를 주었죠. 그때 제가 데생을 잘했어요. 자만심이 강했죠.(웃음)”

-창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를 졸업하셨습니다. 대학생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변했죠. 좀 더 활동적인 학생으로. 억눌려 있던 뭔가가 ‘팍’ 터졌던 것 같아요. 학보사에 들어가 만평을 그렸고 극예술회 활동으로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그림도 밤늦게까지 그렸어요. 1학년 때 당시 최고점의 실기점수를 받았는데, 각 파트 교수님이 저를 서로 데려가려고 했어요.(웃음)”

-제가 듣기로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하려고 했다던데. 한국화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그건 어떻게 아셨나요?(웃음) 제가 조용조용하고 꼼꼼하게 작업한 것을 본 윤여환 교수님께서 한국화로 전향하게 하였습니다. 윤 교수님은 현재 충남대에 계세요. 논개(제79호), 유관순(제78호) 등 국가표준영정도 다수 제작해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죠.”

-후회는 없나요?

“네.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김경현 화가 하면 으레 ‘닭과 병아리’를 떠올리는데요. 소재로 닭과 병아리를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1980년 중반부터 그려왔습니다.(웃음) 제가 그리는 것은 주위에서 봤던 것이에요. 소도 그리고, 닭도 그리고, 토끼도 그리고. 다 시골집에서 키웠던 것입니다. 특히 닭과 병아리를 집중적으로 그렸던 이유는 개인적으로 새벽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좋더라고요.”

한국화가 김경현./김구연 기자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지의 상실감과 어머니의 중압감, 기대감이 어렸을 때는 힘들었어요. 뭔가에 갇혀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지 않았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고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때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어두운 세상이 환해지고 더욱 밝은 세계, 더 나은 미래가 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철망 속에 갇힌 닭을 보면 마치 제 자신을 보는 것 같았고…. 그래서 애정을 가지고 그렸던 것 같습니다.”

-많은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쳐 벼슬을 한다는 뜻이 있는 공명도(功名圖)를 즐겨 그리는 이유도 같나요?

“네. 좋더라고요. 공명도란 '꼬기요~'라고 우는 수탉 그림입니다. 수탉은 생긴 것도 늠름하고 다섯 가지 훌륭한 오덕(五德)과 결부시켜 사나이의 기상을 표상합니다. 오덕은 문(文), 무(武), 용(勇), 인(仁), 신(信)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 닭과 병아리를 소재로 그린 ‘그 어느 날의 대화’가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으로 입상을 했는데요. 최근에 대상을 받은 작품도 제목이 똑같습니다.

“네. 하지만 느낌은 다릅니다. 최근 상을 받은 작품은 수묵의 담백한 색조와 발묵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그리고 필선의 기운을 중요시합니다. 닭장 속의 어울림을 통해서 가족의 화합과 행복의 가치를 표현했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가족의 중요함을 알겠더라고요. 화목함도. 그래서…그렸습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니 못해준 것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한국화가 김경현./김구연 기자

-작가님은 화선지보다는 광목천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요?

“광목천은 이불 같은 따뜻함이 느껴져요. 광목천을 쓴지 20년이 넘었는데, 보풀보풀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감성이 좋고, 촉감이 좋습니다.”

-광목천을 사서 따로 밑 작업을 합니까?

“풀기를 뽑아야 합니다. 수돗물에 씻고 헹구고 말리기는 여러 번 해야죠. 풀기가 있으면 거칠고 뻣뻣해요. 풀기를 뽑으면서 제 마음도 다 잡고. 그런 준비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2009년부터는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주로 그렸습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면 해 질 녘에 돌아오곤 했는데, 소나무를 보면서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소나무를 보면 ‘어머니’ 그리고 ‘기다림’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그때 당시 작품을 보면 여백이 많았고, 잔잔한 감동과 선방(禪房)에 들어온 것처럼 몸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그다음 해(2010년)는 작품에 자유와 역동감, 깊이가 느껴지도록 알록달록한 ‘색’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최근 열렸던 개인전에서 봤던 작품을 보니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던데요.

“화법은 일필을 벗어던지고 먹을 계속 겹쳐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선보였습니다. 구도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버리고 1인칭으로 바꿨죠. 직접 제가 화면 안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아~. 그래서 그림을 보면 소나무 윗부분은 거의 잘렸군요.

“네. 소나무 숲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조명하기보다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한국화가 김경현./김구연 기자

-예전에 작가님과 대화 중 그림 작업을 ‘운동’이라고 표현하던 게 인상적이었는데….

“(웃음)아 그거요. 먹 선을 사용해 그림을 그릴 때 ‘운동’한다고 표현하죠. 운동처럼 춤추듯이. 붓으로 긋는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저한테 그림을 배우는 학생이든, 취미생이든 처음에는 무조건 운동의 역학, 태극권의 기운을 배웁니다.”

-그게 뭐죠?

“호흡을 조절하고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릴 때 손이 아프다, 손목이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못된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림을 운동하듯 그리면 훨씬 기운이 좋고, 힘차고, 자연스럽게 붓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화의 기본이 되는 먹 가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먹을 거칠게 갈기보다는 여유롭게, 아집에 사로잡혀있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세와 마음으로 먹을 간다. 먹을 안으로 점점 좁혀서 갈기보다는 바깥으로 점점 크게 돌리는 것이다. 그는 붓을 잡기 전,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기대를 낮춘다. 그래야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고,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생각을 버리고 기본에 충실하게 그리는 법, 그것이 그만의 비결이다.

-인터뷰 내내 욕심을 부리기보다 ‘기본에 충실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기본에 충실히 하려고 합니다. 한국화에서는 글씨나 그림에서 먹물이 번져 퍼지게 하는 것 즉, 발묵법(潑墨法)과 짙은 먹색의 농묵(濃墨), 중간 먹색의 중묵(中墨), 가장 흐린 먹색의 담묵(淡墨)을 말하는 삼묵법(三墨法), 그리고 손으로 붓을 잡고 쓰는 힘인 운필력이 기본입니다. 이 세 가지 기본에 충실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든 기본이 힘든 것 같아요.

“그렇죠. (웃음) 기본을 쌓기가 어렵죠. 강의할 때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발묵법, 삼묵법, 운필력’인데 요즘 사람들은 빨리 배우고 넘어서려 합니다.”

-이사한 작업실이 제법 큰데, 취미생들이 많나 봐요.

“뭐 어느 정도는 됩니다. (웃음)”

-작업실을 옮기신 이유가 뭡니까?

“말하기 부끄러운데…. 제가 집이 없습니다. 작업실 주인이 나가라고 하니까 옮긴 것뿐이에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작가님의 작품이 꽤 잘 팔린다고 들었습니다.

“(손사래 치며) 그래도 힘들어요. 제가 돈을 불리거나 사회생활을 잘한다든가. 그런 걸 못해요. 그림밖에 몰라요. 그림 그리는 것, 가르치는 것 이것만 자신 있습니다.”

-시나 도에서 하는 미술대전 작품 수상자를 보면 그 스승이 누구인지 단번에 안다고 하던데…. 일종의 도제식 교육인 셈이죠.

“그런 경우가 많죠. 근데 저는 가르칠 때 ‘이렇게 그려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이렇게 그리는 건 어때?’라고 던져줄 뿐이죠.”

-올해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진주 정수예술촌 입주 작가잖아요. 작업은 이곳과 진주를 오가며 했나요?

“작업은 대부분 정수예술촌에서 했어요. 낮에는 취미생도 있고 해서 집중할 수 없어요. 주로 밤에 하죠.”

-제3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부문 대상 작인 ‘그 어느 날의 대화’도 정수예술촌에서 작업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네. 이 작품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제작한 수묵화작품이죠. 제가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어요.”

-창원대 강의를 나가시던데, 앞으로도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실 건가요?

“네. 누군가를 가르칠 때 제 모습을 보면 아주 즐거워하고 있어요. 항상 그래 왔듯이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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