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전통 장맛으로 3대째 가업 이어가는

인근 일본만 하더라도 대를 잇는 가게(기업)들이 많다. 이른바 ‘시니세’(老鋪)라 불리는 이들 가게는 지난 2006년 당시 500년이 넘은 곳만 700개가량 성업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잃어버린 10년’의 빙하기를 거치면서 몇몇이 문을 닫았지만 시니세 대부분은 꿋꿋이 살아있다. 일본 사회를 읽는 키워드로 종종 시니세가 언급되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대를 이어 가업을 승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로 이촌향도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났고, 수도권 일극 중심 사회경제 체제는 지역 내 인력과 경제를 블랙홀처럼 수도권으로 빨아들였다. 농촌에서 또 도회지 노동자로 고생하며 아이들을 길러 낸 이들은 내 자식만큼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자녀들을 화이트칼라로 키우는데 힘을 쏟았다. 소상공인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연속되는 고된 일상을 극복하며 힘들게 일궈 온 가게지만 자녀들이 이를 물려받으려 하면 손사래 치기 일쑤였다. 누구보다 남들이 모르는 고통을 더욱 잘 알기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 50여 년 넘게 이어온 할아버지와 아버지 가업을 손수 잇겠다고 자처해 지난 세월 가게에 대한 지역민들이 보내준 꾸준한 관심과 사랑에 보답하고자 나선 젊은 일식 요리사가 있다. 위기의 순간 가업을 잇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칼을 잡았지만, 선대가 물려 준 비법 장맛을 잃지 않고, 여전히 한 길, 그 맛으로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드는 삼대초밥 전봉준(37) 사장이다.

삼대초밥의 시작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오동동 자유무역지역 정문에서 어시장 방향, 대로(大路) 끄트머리 우측 굴곡을 살짝 돌아나가면 KT 사거리 못 미쳐 오른쪽에 2층짜리 삼대초밥 건물이 보인다. 삼대초밥은 말 그대로 3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시니세다. 전봉준 사장은 지난 1997년부터 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위치에만 계속 머무른 것이 아니라 선대의 판단에 따라 가게가 분리 운영됐다가 이후 다시 하나로 되돌아오는 몇몇 과정을 겪었다.

이런 삼대초밥의 시작은 지난 1947년 1대 전선도(2001년 작고) 선생이 마산 창동 황금당 골목 일원에 처음 문을 연 작은 가게에서부터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일식집의 면모가 아니라 어묵탕과 덮밥, 초밥 등 일본 가정식을 파는 작은 점포였다. 이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돈이 밑천이 돼 현재 삼대초밥 자리로 옮겨 정식으로 일식집 문을 열 게 됐다.

전봉준 사장./박일호 기자

원래 전선도 선생이 살던 곳은 경남 의령이었다. 농촌에서 지내던 선생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개항장으로 도시 면모가 날로 커 가던 마산에 대한 동경을 품고 일거리를 찾아 마산으로 향하게 된다.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제 입 하나 덜게끔 하는 것도 효도라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농사만 지을 줄 알던 의령 촌사람에게 도시는 호락호락한 생활 터전이 되지 못했다. 살기가 막막해 구두닦이, 떡 장수, 아이스케키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이라도 안정된 일감을 찾아 들어가게 된 요정에서 선생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당시 마산은 어시장의 형성과 함께 그 주변에 작은 식당과 음식점들이 많이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개항장이었던 덕에 일본과 호주, 러시아 등 국외 열강들의 선교사나 고위 관리들도 꽤나 있었다. 덕분에 요정 같은 고급음식점도 많이 생겼는데, 아직도 마산 내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 가운데는 요정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전선도 선생은 처음엔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잡부로 요정에 발 딛었다. 한데 요정에 들어가 일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식민지 조선은 해방정국을 맞이하게 된다. 어렵게 잡은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전 선생은 전전긍긍하게 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내린 결론은 일본행이었다. 비록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지만 요정 내에서 성실하기로 소문이 났다. 한국인 사장도 선생의 성실함을 인정해 일본으로 가는 길에 함께 데리고 가기로 약속했다. 선생은 그렇게 오시카로 건너가게 됐다. 일본에서도 식당 허드렛일은 계속됐다. 이곳에서도 특유의 성실함이 빛을 발해 하루는 요리실장을 흡족하게 했다. 덕분에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주방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2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일본에서 배운 요리 실력 밑천삼아 1947년 황금당 골목 초가집 형태의 허름한 요리집을 시작하게 됐다. 이름은 ‘골목초밥’. 한국전쟁 때는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느라 마산을 떠났다. 이후 현재 위치에 일식요리전문점으로 자리 잡은 것이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다.

이대초밥의 탄생

전선도 선생의 대를 이은 아들 전원작(1944~1997) 씨는 원래 부산의 한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양정모 회장이 이끌던 국제상사 사상공장이 그의 일터였다. 그러나 전두환 군부독재가 서슬 퍼렇던 제5공화국 시절, 양정모 회장이 민정당(민주정의당)에 정치 헌금 헌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전두환 일당이 국제그룹을 산산조각 내면서 생활에 파고가 쳤다. 갑작스런 회사의 부도로 힘들어하던 전 씨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업을 물려받기로 하고 1983년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이때는 전봉준 사장이 예닐곱 살 남짓 됐을 무렵이었다. 전 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음식을 만들어오는 모습을 곧 잘 지켜봐왔고, 간장을 비롯한 각종 양념류, 그리고 일부 요리는 아버지 밑에서 한 번씩은 다 만들어 본 터라 일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배움을 끝낸 전원작 씨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마산 산호동에 이대초밥을 열어 운영했다. 아버지(전선도) 가게만큼이나 늘 손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아내와 세 자녀 생계를 꾸리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됐다.

갑작스레 날아 온 비보

‘골목초밥’과 ‘이대초밥’으로 이후 마산에서 부자(父子) 요리사로 이름을 알리며 많은 지역 사람들의 사랑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해 오던 전봉준 씨 일가. 이런 그들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은 지난 1997년의 일이다. 언제부턴가 잔기침이 심해져 병원을 오가던 전원작 씨는 단순 감기라 생각하고 별다른 의심 없이 의사가 지어준 약을 먹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병에 차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번은 입에서 피를 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길로 의사의 권유를 받아 큰 병원에서 정밀 종합진단을 받게 된다. 검사 결과는 놀랍게도 폐암 4기. 의사는 길어야 4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선고마저 내렸다. 차마 아버지에게 알릴 수 없었던 아들 전봉준 씨는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가 계신 병실을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낯빛에서 무언가를 읽었다는 듯이 천천히 누워 몸을 돌리고 말았다. 암묵적인 치료 포기 선언이었다. 당장 4개월 동안은 병간호를 한다 손 치더라도 이후 당장에 가게를 운영해 나갈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전봉준 사장의 형은 갓 생명보험사에 취직한 상태였고, 여동생은 식당을 운영하기에 나이가 너무 어렸다. 자연스럽게 물망에 오른 사람이 전봉준 사장이었다. 당시 23살이던 전 사장은 건축일을 하던 외삼촌을 동경해 건축토목학을 전공하는 중이었다. 일찍 군대를 가 제대를 3개월 앞두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제대에 부푼 꿈과 복학까지 남은 10여 개월이라는 시간적 여유 동안 나름 못해 본 공부를 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로부터 들려온 비보는 자신의 미래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었다. 집안의 기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은 삶의 희망을 다 앗아가 버린 것과 같았다. 이런 전봉준 사장을 다잡아 준 것은 아버지 전원작 씨였다. 아버지는 편찮은 몸을 이끌고 손수 아들을 위한 요리 수업에 나섰다. 새벽시장에 나가 좋은 재료를 구하는 방법부터 생선포 뜨는 방법, 어묵탕 육수를 뽑아내는 방법, 생대구탕 끓이는 법 등 처음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음식을 배워나갔다. 이렇게 낮에는 아버지 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맛을 익혔고, 밤이면 요리 학원에 나가 조리사 자격증 취득을 하고자 새벽이 될 때까지 눈을 밝혔다. 그렇게 한창 음식을 배우는데 대한 열정이 무르익어가던 아버지 전원작 씨가 끝내 눈을 감았다. 전국이 제15대 대통령 선거 열기로 떠들썩하던 1997년 12월 15일에 일이었다. 나머지 수업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전선도 선생은 3년 동안 손자와 함께 주방을 지키며 일을 충분히 익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집안 장맛 잇는 게 맛의 비결

전봉준 사장은 할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이름을 삼대초밥을 바꿨다. 삼대초밥이 음식 맛의 비결은 신선한 재료와 할아버지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법 장맛에 있다. 신선한 재료의 비결에는 인근 어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어시장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삼대초밥이 가진 매력이 크다고 봐요. 저희 집 음식을 사람들이 믿고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매개 수단이 되기 때문이죠. 재료가 떨어지거나 모자라면 당장에 달려가 금방 좋은 물건을 사들일 수 있으니 든든한 보루가 아닐 수 없죠.”

비법 장은 만드는 법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극히 드물다. 확실한 것은 초밥에 가장 어울리는 오사카 전통 방식의 간장 소스 법이라는 데 있다.

“일본에 전통 있는 일식집들은 저마다 고유의 장맛을 보유하고 있죠. 장맛에 따라 그 집 손님의 향방이 갈린다고 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써요. 저희 집은 3대째 이어져 오다 보니 이미 장맛에 길들여져 찾는 손님들도 많아요. 그만큼 일식에 있어서는 장이 중요합니다.”

삼대초밥에서는 초밥을 찍어먹는 간장, 장어구이용 간장 등 음식 재료에 들어가는 모든 장을 손수 만든다. 만드는 과정과 비법을 영업에 방해가 안 되는 선에서 살짝 물어봤다.

“일단 저희 집은 집에서 담은 간장과 시중에 시판되는 간장을 1대 1 비율로 맞춰 섞어 씁니다. 일반 사람들 입맛에 맞추려면 약간의 허용은 필요합니다. 여기에 육수, 설탕, 레몬, 간장, 다시마 등을 포함해 모두 8가지 재료가 들어갑니다. 이를 달여서 손님상에 내놓죠.”

다시 육수에 궁금증이 생겼다.

“다시마와 가다랑어포가 들어가는데, 그 이상은 알려주기 어렵죠. 하하.”

삼대초밥에서 내는 초밥용 간장에는 약간 달큼하면서도 부드러운 염기가 돈다. 부담스럽지 않다고 해야 하나. 간장을 찍었지만 찍은 것 같지 않은 맛이다. 약간 슴슴하면서도 살짝 묻어나는 단내가 입 안을 기분좋게 만든다.

“생선회와 초밥에 가장 어울리는 궁합을 찾아 내놓은 것이라 보면 됩니다. 비린내를 잡고 초밥의 끝맛을 부드럽게 만드는데 저희 집 장 만한게 없다고 봐요 저는.”

여느 일식집과 마찬가지로 숙성한 선어를 회로 낸다. 육질이 단단하고 차져 쫄깃한 감이 좋다. 회가 질겅거리지 않고 입에서 ‘사각 사각’하면서 씹히는데, 이 사이로 약한 암모니아 향이 입안에 돌면서 감칠맛을 낸다.

“탕에 쓰는 것 외에는 모두 선어 형태로 숙성해 낸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 집은 물도 고도정수처리 설비를 갖춰 나오는 깨끗한 물만 엄선해 쓰는데요. 설비하시는 분이 ‘이건 일반 식당에서 쓰지도 않는데 유난하시네!’하며 핀잔을 주더라고요. 근데 제 철칙이 깨끗하고 안전한 먹거리 제공인데 우리라고 설치 못할게 있나요. 하하.”

배움의 열정이 이끈 일본행

제 아무리 음식에 대해 박식한 어르신들 밑에서 요리를 배웠다 손 치더라도, 곧장 한계를 느낄 때가 오기 마련이다. 전봉준 사장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다행이 그런 생각을 할 찰나 너무도 좋은 기회가 왔다.

“한번은 마산대학교 학장님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어요. 원래 단골이셨는데, 하루는 저를 살짝 부르시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대뜸 ‘전 사장 일본에 가서 공부해 보지 않을래’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저도 어떤 마음에서인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거침없이 ‘네 기회만 된다면 꼭 보내주십시오’하고 말씀을 드렸어요.”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게 내재돼 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쏟아져 나온 듯했다.

“얼마 안 있어 학장님이 저를 학장실로 부르시더라고요. 마산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벳푸에 있는 대학을 다니며 호텔에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거기에 추천했다는 거예요,”

전 사장은 처음 학장의 제안을 받은 이후 곰곰이 생각을 했었다. 생각 끝에 가업을 이을 당시 너무도 경황이 없이 물려받은 데다, 차차 자리가 잡히면서 선대의 전통 속에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데 결론이 닿았다. 조건도 좋았다. 대학을 무료로 다니며 일하는 호텔에서 숙식 해결도 가능했다. 그렇게 벳푸에 보우카이(望海) 호텔에서 1년을 수학했다.

“마산대학 일본어과에서 6개월 동안 일본어 공부를 하고 딱 비행기 값만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1년 정도 있었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정말 요리의 신세계를 많이 경험했어요. 이전에 배우지 못한 다양한 요리를 배웠기 때문에 초밥, 탕 등 단품메뉴에 이어 코스 요리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키웠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전봉준 사장이 삼대초밥에서 자신 있게 내놓는 요리는 초밥과 장어덮밥, 그리고 된장으로 간을 맞춘 생대구탕이다.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코스 요리는 계절과 오시는 손님의 연령과 성향에 맞게 각기 다르게 세팅돼 나간다. 이 중에서도 추천하는 메뉴는 초밥이다.

“일식의 기본이자 우리 집만의 자랑인 전통의 장 맛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는 메뉴이기 때문이죠. 저는 손님들에게 초밥만 나오는 정식을 항상 권해드려요. 저희 집에서 가장 싸면서도 배부르고 맛있게 드실 수 있는 메뉴이니 말이죠.”

전봉준 사장./박일호 기자

예기치 못한 시련, 매미

일본 유학 이후 일이 손에 익고 장사도 한창 본 궤도에 오르고 있던 시기. 전봉준 사장은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과 맞먹는 심신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가 마산만 일대를 급습한 것. 매미는 수년 동안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건물이 파손 된 건 물론이거니와 각종 설비며 집기 등이 삽시간에 물에 둥둥 떠내려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은 폐가나 마찬가지가 됐다. 태풍이 오기 불과 2년 여 전 금융권 대출 수억 원을 내 가게 내·외부 인테리어와 리모델링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기에 상실감이 더했다. 돈도 잃고, 직원들도 떠나가고, 더욱이 마산 전체가 물난리를 겪은 통에 복구를 할 건설 인력 구하기 어려웠다. 대를 잇기 이전부터 아버지 때 쌓여 온 빚도 터지기 시작했다. 장사를 할 수 없어 번 돈이 없으니 이자를 갚기가 막막했던 탓이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 일어설 방법이 없을 거라 봤어요.”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단골로 안면을 틔어 온 지역 금융계 인사들이 딱한 사정을 알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감사하게도 싼 이자로 대출 융자를 많이 내 주셨어요. 사실 아버지 빚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상속을 포기하면 갚지 않아도 될 돈이었어요. 하지만 돈 관계는 확실해야 한다는 선대 가르침에 따라 계속 갚아나가고 있었거든요. 한 번도 밀리지 않고요. 금융계 계신 분들이 그런 점을 눈여겨 봤나봐요. 아무튼 정말 다행이었죠,”

이 시기는 정신적으로 큰 성장을 가져왔다. “이때부터 ‘내 대 만큼은 가업을 이어 가자’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책임감이 많이 들었죠.”

제사상에 올라가는 삼대초밥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던가. 삼대초밥은 물난리를 겪은 이후 더욱 급성장 했다. 현재 2층짜리 건물에 함께 일하는 직원만 10명이 넘는다. 다양한 비결이 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70년 가까운 전통을 이어가는 맛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을 테다.

“우리 집에는 3대에 걸쳐 오시는 손님들이 많아요. 어려서 아버지 손을 잡고 오신 분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걸 볼 때마다 늘 가슴 한편이 뿌듯합니다.”

전통의 역사가 남긴 가슴 뭉클한 에피소드로 있다.

전봉준 사장./박일호 기자

“1년에 딱 한 차례 그것도 늦은 밤 문을 닫기 직전에 찾아온 아주머니 손님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2~3년 지속되다보니 궁금증이 생겨 물었죠. 항상 왜 이 시간에 오시냐고.” 돌아오는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초밥이 잡수시고 싶다 하셔서 다른 일식집 초밥을 사다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사코 거부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삼대초밥 것이 아니면 안 드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삼대초밥을 사들고 가 먹여드렸더니 그제야 입을 여시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아버지 기일이면 항상 삼대초밥을 제사상에 올린답니다.”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요리사

전봉준 사장은 자신이 만드는 요리만큼이나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이어가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단체에 이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매달 일정 정도 후원금을 내기도 하고요. 조손가정이나 노부모 가정에는 반찬 봉사를 나가고 있죠. 정기 후원으로 유니세프에 해외 봉사 기금도 기부하고 있어요.”

그는 삼대초밥이 지역주민들의 성원으로 먹고 사는 만큼 봉사와 환원을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지역에 살면서 손님이 없으면 저도 없는 거잖아요. 주변에 항상 저희 가게를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 표현을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봉사활동은 이미 아버지가 이대초밥을 운영하실 때부터 계속 해오던 일이기도 하고요. 나누는 일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기분을 참 좋아지게 만드는 거 같아요. 언젠가는 이런 마음이 다시 제게로 돌아올 거라 믿고 즐겁게 하는 일이랍니다.”

전봉준 사장은 종신보험을 하나 넣고 있다. 그 수혜자는 아내도 자녀도 아닌 불우 아동을 돕는 한 단체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얼굴상이 웃는 상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 자체를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일이든, 친구든, 손님이든, 도움을 주는 불우이웃이든,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이야 말로 삼대초밥의 성공을 이끄는 큰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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