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철시(撤市) 이끌어낸 반란군 두목

중국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운동(1851~1864)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은 한 때 중국 인민에게 헌신한 걸출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태평천국 말기를 장식한 가장 탁월한 군사지도자로서 서양에까지 그 이름을 날렸다.

그가 진압군에게 잡혀 처형당하자 태평천국 수도였던 남경(南京) 상인들은 그를 애도하며 3일간 철시(撤市)했다. 중국 역사상 누가 이런 대접을 받았을까? 아무도 없다. 서민들이 반란군 두목을 애도하며 자발적으로 시장 문을 사흘 동안 닫은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농민반란으로 일컬어지는 태평천국 운동은 처음엔 기세가 불 같았다. 압제와 수탈에 시달리던 기층 민중을 위한다는 기치가 사람들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적 한계, 지도층 내분, 전략 미숙 등으로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동력을 잃어버렸다. 실패한 반란이 다 그렇듯 수백 년간 다져진 강고한 지배체제를 애매한 이념으로 뒤엎을 순 없었다.

이수성.

이수성은 태평천국 운동이 내리막길로 치닫는 와중에도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계속 거뒀다. 이 덕분에 태평천국 운동은 그 수명을 몇 년간 더 연장했다. 그리고 이런 승리를 통해 지배하게 된 지방(현 절강성 항주 일대)에서 놀랄만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수성군에 종군한 영국인 린들리(Lindeley)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살 터전을 마련해주고 조세를 감면해준 충왕에게 많은 서민들이 진심으로 감복하며 그 은혜를 칭송했다”고 전한다.

그는 가난한 농민출신이었지만 걸출한 군사전략, 용기를 가슴에 담은 침착한 태도, 유연하고 섬세한 용모로 외국인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몇몇 사가(史家)들은 그를 ‘인의(仁義)를 품은 인물, 부하를 진정으로 존중한 사람’으로 표현한다.

나이 마흔하나에 잡혀 죽을 때까지 그는 태평천국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천왕(失王) 홍수전(洲秀全)을 맹목적으로 떠받든 봉건시대 인물형이었다는 점, 정부군을 상대로 한 대규모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데 큰 책임이 있다는 점, 백성 구휼 효과도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후대 사가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는다. 반란군 두목을 자처했지만 그 또한 ‘새 왕조’ 건설에 부역한 구시대 인물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게다가 이수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막판에 사로잡힌 후 ‘공술(供述)’에서 생명을 구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자신이 헌신했던 태평천국 운동을 폄하한 것을 두고 집중적인 조소를 보낸다. 원래 알려진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수성을 옹호하는 사가 나이강(羅爾綱)은 “전장에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웠으며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며 그가 삶을 구걸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옹호한다. 사실 공술은 사형을 앞두고 쓴 것인데다, 의도적인 개작설이 있어 태평천국 운동을 설명하는 훌륭한 사료임에도 아직도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이수성이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 공술 탓에 이런저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발적인 ‘3일 철시’를 이끌어낼 만큼 민중들로부터 사랑받았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념형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가 마음에 담고 싶었던 사람은 ‘충의(忠義)와 자애(慈愛)’로 표상되는 관우가 아니었던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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