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풀꽃 앞에 무릎 꿇고 무얼 하고 있나

시인(詩人)은 목이 편치 않은 듯했다.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계속 부여잡은 모습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자유 의지에 상관없이 목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했다. 목덜미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통증을 감내할수록 뺨과 이마에 오롯이 새겨진 주름은 더 짙어진다. 불편한 통증은 일상이 된 듯, 시인의 한쪽 손에 맡긴 핸들은 흔들림이 없이 편안히 돈다.

하동읍에서 출발한 차량은 꼬불꼬불 오르막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 목적지인 지리산 성삼재에 닿았다.

통증에 시달리는 아까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힘드시면 그냥 돌아가시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으나, 시인은 단박에 손사래를 친다.

“허 기자님 덕분에 오랜 만에 여기 왔는데, 그냥 가시죠.”

김인호 시인./허귀용 기자

성삼재에 다다른 이후 시인의 표정은 사뭇 달라 보였다. 지리산의 맑은 정기라도 받은 것일까!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불편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목덜미 통증에도 아랑곳없이 여길 찾은 이유는 시인에게만 특별하다.

지리산 성삼재~노고단 산길에 핀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좀 전의 불편함은 온데간데없이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산길 옆 야생화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돋보기라도 갖다 댄 듯, 울창한 숲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생명체를 쉽게 찾아냈다.

시인은 꽃 앞에 살포시 무릎을 꿇는다. 미물에 불과한 야생화가 신성한 뭔가가 되는 듯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알 수 없는 경건함이 느껴졌다.

어느 사이엔가 통증이 가셨는지, 시인은 더는 목덜미를 잡지 않았다.

김인호 시인./허귀용 기자

꽃 한송이에 온 생을 집중하다

짬만 나면 올랐던 지리산 노고단을 제 집 드나들듯 한지도 벌써 10여 년. 이제는 편안한 안방이나 다름없다. 야생화에 흠뻑 빠져 백두산과 한라산, 설악산 등 전국의 산야를 돌아다닌 지도 그렇게 됐다. 지독한 역마살을 앓는 김인호(53) 씨는 야생화 전문 사진작가다.

전국 각지를 돌며 찍은 야생화 사진에 자신의 창작시를 담은 ‘꽃 앞에 무릎을 꿇다’라는 책을 2008년도에 내기도 했다.

“꽃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동안 그는 수행자다. 작고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 모시기 위해 종일토록 산을 헤맨다. 그리고 그는 꽃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무릎을 꿇고 그 꽃 한송이에 온 생을 집중한다. 무엇보다도 꽃의 마음과 교감이 이루어져야만 오롯이 담을 수 있기에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열어 놓을 수밖에 없다.”

야생화로 향한 그의 심한 짝사랑을 지인은 그렇게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야생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열정과 경외심의 대상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본업은 야생화 사진작가와는 거리가 멀다. 현재 한국남부발전 하동화력발전소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본업과 부업(?)에 가까운 취미가 환경을 놓고 보자면 상극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까! 야생화와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하동화력발전소로 발령 나기 전 서울 본사 근무 때였다. 답답하고 각박한 서울 생활에 지쳐갔던 그는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야생화는 마치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것처럼 그의 눈을 사로잡아 버렸다. 널리 알려진 ‘야생화클럽’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야생화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김인호 시인./허귀용 기자

“주변에서 대하는 꽃보다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야생화는 순백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죠. 경이로움에 정말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꽃이 사는 방법이라든가, 꽃의 모양, 꽃의 빛깔 이런 것들이 모두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시작된 야생화 짝사랑은 지금까지도 한결같다. 하지만 일방적인 짝사랑이 그에게 기쁨만을 준 건 아니었다. 때론 설악산 계곡으로 떨어져 생사의 갈림길로 이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을 맞기도 했다. 그런 극한 상황을 접하게 되면 움츠러드는 게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이건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야생화를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

얼마 전 그는 야생화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자리에 섰다. 하동 지리산학교 교단에 선 것이다. 지금은 바쁜 일로 잠시 내려놓았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시 교단에 서서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계속 알려나갈 생각이다.

그간 카메라로 찍은 야생화 사진과 직접 쓴 글을 곁들인 책을 다시 낼 예정이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무렵 그의 네 번째 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하동 지리산학교 수강생들과 함께 현장 실습./김인호 시인 제공

섬진강을 노래하는 시인

‘야생화 전문 사진작가’, ‘하동화력발전소 홍보 담당’.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 외에도 그는 시인(詩人)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있다. 자신의 직업만으로도 벅차게 생각하는 세상에 두 가지 일을 더 하고 있다니. 참 부지런하고 욕심도 많은 사람이다.

야생화 전문 사진작가는 서울의 답답함을 탈피하고자, 하동화력발전소는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선택했다면, 시인은 선택이 아닌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한 필연이었다. 청소년 시절 문학도를 꿈꿨던 그는 어쩔 수 없는 형편에 문학의 길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한순간도 글을 쓴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동양공전(현 서울미래대학)을 졸업한 후 한전에 기술직으로 입사하자마자 문학 길에 발을 디디며 그간 억눌러왔던 열정을 불태웠다. 오죽했으면 25살 젊은 시절 회사 내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 “결혼 후 전업으로 글을 쓰면 이를 허락한다”는 서약서까지 받았을까!

회사 내에서 글 실력을 인정받으며 순탄할 것 같았던 그의 문학의 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첫 딸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딸의 아빠가 된 것이다. 덜컥 셋 쌍둥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문학에 쏟는 열정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다. 이후 막내아들도 태어났다.

한동안 가정에 전념했던 그는 1990년 초 인천문단 현상공모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90년대 말 하동화력발전소로 오게 되면서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꽃을 피우게 된다. 기억 저편에 남아 있던 어린 시절 섬진강 추억과 연결된 지금의 섬진강 모습은 시인이 된 그에게 문학적 열정을 배출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어렸을 때 큰 누나가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 쪽에 있었는데, 그쪽에 있을 때 자주 다니면서 섬진강의 풍경이나 이미지에 많이 빠져 있었죠. 하동화력발전소에 근무할 때 순천에서 다녔는데,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에 더 매료된 것 같습니다. 특히 섬진강은 다른 강보다 꾸미지 않으면서도 넉넉한 어머니의 모습이랄까. 아무튼 저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노동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해화 씨의 권유로 만든 다음카페 ‘섬진강 편지’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의 첫 시집 ‘땅끝에서 온 편지’에 이어 나온 두 번째 시집 ‘섬진강 편지’는 그를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게 했다.

하지만 섬진강과 만난 지 3년 만에 이별을 고하게 된다. 사보 편집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서울 본사에서 들어온 것이다. 기술직으로 입사한 그에게 사무직을 맡아 달라고 한 건 그가 유일했기에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아쉬웠다.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품속처럼 늘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던 섬진강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회사 업무를 제쳐놓고라도 서울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계속 모른 척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무렵 쓴 ‘섬진강 편지-섬진강을 떠나며’를 보면 섬진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

낯선 발걸음 거두어 주던 사람들/ 마주칠 때면 눈빛 반짝여 주던 강물/ 흐르는 땀방울 적셔 주던 바람/ 철철이 피어 마음 뉘어 주던 꽃무리/ 낯선 도시 떠돌다 낀 때 씻어내 준/ 순천, 하동, 구례, 광양 사람들/ 데미샘에서 갈사포구까지 오백 리 물길/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사철바람/ 산수국, 꽃무릇, 금낭화, 물봉선 꽃무리와/ 더불어 석삼년, 천백 날 있어/ 나 이제 어느 거리 떠돌더라도/ 마음에 난 물길 여울목/ 징검다리 건너 앞산에 올라/ 흰물봉선 만날 수 있겠네/ 저물면서도/ 저물면서도/ 아/ 환희 빛나는/ 그 강 노을빛으로 살아갈 수 있겠네.

복수초./김인호 시인 제공

마침내 섬진강에 뿌리를 내리다

서울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답답함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화에 빠져 마음을 달래보기도 했으나, 허전함을 채우기에 부족했다.

그의 머리에서 가슴속으로 아로새겨진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경은 늘 그리움이 대상이었다. 그리움이 쌓이고 쌓이면 마음의 병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법. 시간이 허락하면 무작정 섬진강으로 발길을 돌리며 잠시나마 허전함을 달랬다. 서울과 섬진강을 오가는 철새 같은 생활이 반복됐다.

9년 만이었다. 섬진강으로 되돌아온 건. 하동화력발전소 근무를 자청했다. 자식들이 스스로 자립할 정도로 컸다고 판단했기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오랜 서울 생활에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준 것이다.

금강초롱./김인호 시인 제공

섬진강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스스로 다짐으로 모든 걸 정리하고 하동으로 내려왔다. 얼마 전에는 그를 따라 아내도 하동에 정착했다. 예전부터 해 왔던 유치원 교사로 벌써 취직을 했단다. 지금은 급한 대로 회사 사원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는 조만간 아내와 남은 일생을 보낼 보금자리를 하동 섬진강 인근에 마련할 예정이다.

섬진강에 푹 빠져 밤새 섬진강 맑은 물길을 시어로 퍼올리던 시인은 마침내 섬진강변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풀꽃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두메양귀비(백두산)./김인호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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