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년대 재첩국 판매, 낙동강 생산 끊긴 후부터 명성 높여

지리산·섬진강·한려수도·너른 들판…. 하동이 안고 있는 화려한 자산이다. 이곳 사람들은 특히 섬진강이 주는 것으로 먹고산다. 참게·은어·황어·벚굴 같은 것이다. 그래도 섬진강이 내놓는 가장 큰 선물은 뭐니뭐니해도 재첩이다.

재첩국 양동이 인 여인들

하동 사람들은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던 아낙들 모습을 여전히 떠올린다. 재첩국 파는 아낙들은 1950년대부터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날 채취한 것을 밤새 끓여서는 양동이에 담아 천을 동여맨다. 그리고 그것을 머리에 이고 하동뿐만 아니라 광양, 멀리는 차를 타고 진주까지 가서 팔았다. 돈 대신 보리·콩·생선 같은 것을 받았기에 돌아오는 길도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덕에 아이들 배를 달랠 수 있었다.

오늘날 재첩 양동이 짊어진 아낙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래도 시외버스터미널 한쪽 간이 공간을 찾으면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먼 길 오가는 이들이 간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뜨거운 국물로 아침 쓰린 속을 달랠 수 있는 곳이다. 그날 들여온 것이 다 팔리면 바로 문을 닫기에 주로 오전 장사만 한다.

물이 빠지면 섬진강은 거대한 모래땅을 드러낸다. /남석형 기자

재첩이 식당에 나온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바깥에서 채취하러 온 이들이 권유하면서 고전면 전도리 신방마을 누군가가 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섬진강보다 낙동강 재첩 이름값이 더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낙동강은 1987년에 하굿둑이 들어서면서 재첩을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면서 1990년대 이후 하동 재첩은 그 명성을 확고히 했다. 최근 들어 부산 강서구 낙동강 인근 명지지역에서는 재첩이 다시 서식한다고 한다. 부산 장례식장에서는 재첩국 내놓는 풍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재첩 채취는 보통 오전 5∼6시 시작해 물때가 맞으면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다. 한 사람이 8시간 정도 작업하면 많게는 120㎏가량 채취할 수 있다고 한다. 식당에서 하루 영업이 가능한 양이다. 식당에서는 직접 채취하기도 하지만, 모자라는 양은 가공하는 곳에서 충당한다. 현재 하동에서 재첩을 가공하는 곳은 300군데가량 된다.

채취하는 이들은 내내 구부린 자세에다가 큰 무게를 감당해야 하니 허리 성할 리 없다. 물옷을 입기는 하지만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기에 온몸이 쑤시는 것도 다반사다. 그래도 하루 30㎏ 정도 잡으면 수입이 10만 원은 훌쩍 넘는다고 한다. 잡은 만큼 돈이 되니 몸 고단한 것은 잊고 나서는 것이다. 농사는 땅이 있어야 하지만, 재첩은 다른 밑천 없이 일명 거랭이(손틀방) 하나만 있으면 된다. 대부분 부부가 함께하는데, 함께 부지런을 떨면 허름한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섬진강 함께 끼고 있는 광양

섬진강을 따라 서쪽은 광양, 동쪽은 하동이다. 섬진강을 함께 끼고 있는 광양에서도 채취한다. 그럼에도 '광양 재첩'은 귀에 낯설다. 하동은 오래전부터 대부분 농사와 재첩을 겸해서 하고 있다. 광양은 농사 쪽에 좀 더 무게를 두다 2000년대 이후부터 재첩에 본격적으로 눈 돌렸다 한다. 이전에도 광양 사람들은 재첩을 쏠쏠찮게 채취했다. 그런데 하동읍내나 화개장터 같은 곳에서 주로 팔다 보니, 모든게 '하동 재첩'으로 취급받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은 재첩이 물을 따라 이동하면서 광양 쪽에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하동은 재첩, 광양은 매실을 특화해 서로 다툴 일 없이 잘 지내는데 바깥사람들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고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구역을 놓고 다툼이 제법 있었다. 지금은 '하동·광양 내수면 피해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섬진강 자원 지키기에 함께 머리 맞대고 있다. 오늘날 섬진강 곳곳에 있는 흰 부표는 양 지역 간 구역을 나눈 것이다.

하동 사람들은 재첩 이야기를 하면서 한편으로 매실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낸다. 오늘날 '광양 매실'은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있다. 하동 사람들은 "예전에는 우리가 더 많이 내놓았는데 마케팅에서 뒤처졌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광양 홍쌍리 아줌마' 이야기를 꺼낸다. 1970년대에 나라에서 매실나무를 하동·광양에 집중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양 홍쌍리 씨가 시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농장에 매실을 키우면서 1990년대 이후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한다.

   

한때 조직폭력배까지 군침

옛 시절에는 섬진강에서 잡은 것을 낙동강으로 보내면 그곳에서 좀 더 관리해 일본에 수출했다고 한다. 큰 도로 없던 시절에는 대형트럭이 섬진강 주변으로 들어오지 못해 우선 작은 차에 실었다가 한참 나가서는 다시 옮겼다고 한다.

재첩이 지역 내 큰 소득원이 되자 한때 조직폭력배가 '관리구역에서 허락 없이 작업한다'며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있기도 했다.

30∼40년 전과 비교하면 재첩 양이 줄어들었다. 주암댐·섬진강댐이 들어서면서 하류 쪽으로 내려가는 물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물이 빠져도 발목까지는 찼지, 지금처럼 모래땅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바닷물이 더 올라와 염도가 높아진 것이다. 지금 하동포구공원에는 염분 농도를 시시각각 알려주는 전자현황판이 있다. 광양제철·여수공단이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하지만 채취에 나선 이들이 급격히 늘면서 재첩 양이 줄어든 것처럼 느끼는 부분도 있는 듯하다. 10년 전 섬진강에서 재첩 채취하던 이가 300명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1000명도 넘는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섬진강 모래를 퍼다 날라 토목공사에 사용하거나 일본에 수출까지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구 바닥이 낮아져 역시 바다 짠물이 밀려오면서 재첩 서식지도 상류로 많이 올라갔다. 한편으로 모래를 많이 펐기에 재첩 서식 공간이 확대되면서 그 수가 늘었다고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최근에는 군에서 종패를 다량으로 뿌려 서식지는 갈수록 강 상류로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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