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나 위인전에 실릴 만큼 주류는 아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건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을 조명해봄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지금은 기억에서 가물가물하지만, 90년대 초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새 시대가 배우고 따라야 할 인물’ 1호로 꼽힌 사람이 있다. 에도시대 일본 요네자와번 영주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이다.

일본 작가 ‘도몬 후유지(童門冬二)’가 쓴 소설 <불씨>덕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는 ‘국가 구조조정자’ 혹은 ‘검약(儉約)으로 무장한 개혁가’, ‘질박(質朴)으로 불리는 에도시대 일본정신 심볼’로 칭송된다.

한 해 200만 섬에 이르던 생산력이 불과 15만 섬으로 줄어든 요네자와번을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통해 회생시키는 한편 그 과정에서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한 그는 이웃나라 YS는 물론 미국 대통령들까지 추종자로 거느리고 있다.

YS 정부가 당시 우에스기 요잔을 들고 나온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발한 발상이었다. 소설 <불씨>를 참모진들에게 돌리며 일독을 지시하는 한편 이를 언론에 널리 알린 것은 문민정부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것이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사실 우에스기 요잔이 거둔 성취는 훌륭하지만, 요네자와번 규모는 우리로 치면 잘나가는 1개 군(郡) 정도 규모에 불과하다. ‘국가 구조조정자’라는 타이틀은 그래서 좀 과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미화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남긴 족적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무사도 쟁기를 잡아야 한다’며 농업부문 투입인력을 확충한 점, 옻나무 닥나무 뽕나무 등 특수작물을 300만 그루나 심어 경제회생을 도모한 점, 수리시설을 확충해 농업 인프라를 확대한 점 등은 당시 요네자와번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생존법이었다.

물론 비전과 추진력만으로 일이 완성되지는 않는 법.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에게 수시로 암살공격을 받는 것은 물론 감금과 협박을 당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기득권에 굴하지 않고 그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는 매끼 국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로 모범을 보인 ‘헌신하는’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열일곱에 영주가 된 그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서른다섯에 은퇴한다. 요즘 우리 시각으로 보자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가 일찍 은퇴한 것은 우에스기가(家) 적자인 처남에게 영주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양자로 입적된 자기 처지를 잘 살핀 결과다.

요잔은 이 대목에서도 빛을 발한다. 기쁨에 찬 얼굴로 상속을 기다리는 후임 영주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영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일 것이다.” 항상 옆에서 가르침을 달라는 말에도 “내가 다스리는 것과 그대가 다스리는 것은 달라야 한다. 그래야, 그대가 갈 길이 보인다”고 답한다.

그가 남긴 말로 생애를 압축해보자. “무슨 일이든 하면 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람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실패에 맞닥뜨리는 현대인들에겐 오만한 말로 비칠 수도 있으나, 그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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