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의 생태이야기 (14)

국명 : 먹그림나비
학명 : Dichorragia nesimachus (Boisduval)

창원 정병산 용추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이상한 나비를 보았다. 2008년 5월이었다. 나비는 보통 흰색이거나 황색인 경우가 많은데 멀리서 보니 아주 까만색의 나비였다. 살금살금 다가가보니 까만색에 흰색 무늬가 그림처럼 들어있고, 햇빛에 반사되니 푸른빛도 살짝 도는 게 오묘한 느낌이 났다. 화려한 색깔이 아름답다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이 나비를 한참 들여다보니 볼수록 고귀한 품격이 있어 보인다.

사진도 흑백사진이 주는 아름다움이 따로 있듯이 흑백으로만 무늬를 이룬 나비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이름을 찾아보니 먹그림나비였다. 흐르는 물에 먹물을 떨어뜨렸을 때의 모습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물에 먹물을 떨어뜨려 나오는 모습이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멋지긴 하겠지만 어쨌든 먹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는 같고, 더 나아가 동양적인 수묵화의 기품을 표현하고자 한 거 같다. 먹그림나비와의 첫 만남은 흥분 그 자체였다. 이 나비를 본 뒤로 컬러가 흑백보다 아름답다는 편견을 버리기 시작했다.

먹그림나비 성충 날개 앞면./안수정

그리고 그 뒤로 몇 해 동안 보지 못하다가 2011년 7월에 다시 용추계곡에서 먹그림나비를 만났다. 보통 나비들은 날개를 접고 앉는 습성이 있는데 이전에는 먹그림나비가 날개를 폈을 때만 만나서 날개 앞면만 담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날개 뒷면을 담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눈앞에 있는 먹그림나비가 고맙게도 날개를 접어 뒷면을 보여준다. 어머나! 검은색과 흰색, 푸른색 등이 어우러진 날개 앞면도 예술이지만 온전히 흑백으로만 무늬를 이룬 뒷면도 예술이다. 게다가 파란 겹눈과 주홍색 주둥이(흡즙관)의 포인트까지.

먹그림나비 성충 날개 뒷면./안수정

먹그림나비 자료를 보다가 애벌레가 독특하게 생겼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어려웠다. 먹그림나비의 기주는 합다리나무와 나도밤나무인데 용추계곡 주변에 있는 합다리나무는 키가 커서 설령 나뭇잎에 애벌레가 있다고 해도 관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 7월 정병산의 다른 등산길로 올라가다가 드디어 먹그림나비 유충을 만나게 되는 경사가 있었다. 하지만 쉽게 발견한 건 아니고 산검양옻나무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가려 했는데(개인적으로 옻을 타는지라 옻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는 되도록 만지지 않는다) 안면이 있는 애벌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뭇잎과 비슷한 색깔을 띠고 있어 다시 봐도 내가 어떻게 이 애벌레를 발견했는지 나의 능력에 내가 놀랄 지경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에 난 뿔은 서양 광대들의 모자에 달린 것과 비슷하고 눈도 없는 녀석이 얼굴에 줄무늬를 이용해 얼굴처럼 그린 것도 신기하다.

먹그림나비 유충 얼굴./안수정

나중에 알고보니 산검양옻나무라 생각했던 나무는 합다리나무였다. 지금까지 키가 큰 합다리나무만 보다가 키가 작은 어린 나무를 보니 헷갈렸던 것이었다. 어쨌거나 먹그림나비의 애벌레를 보았다는 것에 흥분하여 나도 모르게 그늘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다 한참 후 정신이 들었다. 마치 먹그림나비가 그려놓은 산수진경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먹그림나비 유충./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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