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흑돼지 하면 '똥돼지'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지리산을 찾기 위해 함양에 들어온 관광객들이 오면가면 재래식 똥돼지를 보고서는 그 놀라움을 전했던 듯하다. 서울 마장동 축산물시장에 함양 마천면 사람들이 제법 진출해, 이들이 고향 똥돼지 얘기를 쏠쏠찮게 한 것도 명성에 한몫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곳 흑돼지는 모두 사료 먹인 것들이다.

흑돼지는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있고, 백돼지라 불리는 일반돼지에 비해 몸집이 작다. 고구려 시대에 중국 북부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2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긴 세월을 거치며 우리 땅에 맞게 안착하면서 '재래종'이 되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인 350년 전에는 '버크셔'라는 외국 품종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품종은 영국 버크셔 지방에서 유래했다. 이 지역에는 왕실 친위대가 있었는데, 그들이 '버크셔'를 먹어보니 맛이 아주 쫄깃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길러서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버크셔' 품종은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 토양에 맞게 개량됐고, 그것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러니 국내 흑돼지는 중국서 들어온 것,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섞여 있다 하겠다.

   

흑돼지는 인분을 먹고 자란 '똥돼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대변된다. 똥돼지가 자라는 공간은 특별나다. 2층 구조로 위쪽은 화장실, 아래는 돈사다. 인분, 볏짚, 돼지 배설물 엉킨 것이 곧 똥돼지 먹이다. 그 오래전부터 중국 북부지역에서 이용하던 방식으로 전해진다. 똥돼지는 질병 저항력이 좋아 이러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함양 어느 토박이는 어릴 적 기억을 전한다.

"어릴 적 외가에서도 똥돼지를 키웠어요. 처음에는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웠죠. 볼일 보려는데 밑에 살아 있는 물체가 어슬렁거리니 제대로 일을 볼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도 차츰 익숙해지니, 나중에는 똥돼지가 주둥이를 벌리는 순간 일을 보는 여유까지 생겼죠."

함양군 마천면 실덕마을 똥돼지. /경남도민일보 DB

함양 내 농가에서는 대부분 똥돼지 한두 마리 정도는 키웠다. 그 이유는 척박한 땅에서 찾을 수 있겠다. 험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이곳은 농사지을 만한 넉넉한 땅을 내놓지 않았다. 가축이라도 길러야 했지만 이 또한 변변치 않았으니, 돈사와 화장실을 한 공간에서 해결하는 것에 생각이 뻗은 것이다. 똥돼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똥돼지가 만들어진 셈이다. 동시에 좋은 거름까지 함께 얻을 수 있었으니 이래저래 득이 됐다.

재래식 방식으로 키우는 똥돼지는 1970년대 초반까지 함양을 비롯한 산청·남원·구례 등 지리산 주변, 그리고 충청도·강원도 산골 주변에서 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대부분 농가가 일반돼지로 모두 옮겨갔다. 흑돼지는 특성상 성장 속도도 느리고 몸집도 일반돼지에 비해 작아 생산성이 떨어졌다. 더군다나 갈수록 퇴화했다. 흑돼지 수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근친 교배가 많았다. 수놈 두어 마리 키우던 농가에서는 발정하면 어느 농가로 찾아가 교미를 시키는 식이었다. 그 새끼가 자라면 또 그 어미를 찾아 교미하는 일이 흔했다. 같은 유전자끼리 부딪치다 보니 열성이 많아 퇴화했고, 경제성은 갈수록 떨어졌다.

재래식 똥돼지를 키우던 곳. 2층식 구조로 되어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그리고 위생 문제도 한몫했다. 못 살던 시절에야 고약한 냄새도 감내했고, 우물이 얼마나 깨끗한지도 지금보다 덜 중요한 문제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위생과는 거리 먼 똥돼지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함양을 비롯한 지리산권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좀 더 오랫동안 재래식 똥돼지가 이어졌다. 깊은 산골이고, 개발도 더디게 진행되다 보니 옛것이 좀 더 오래 남았던 듯하다. 축산업이 발달한 충청도·강원도 지역은 좀 더 빨리 사라졌다 한다.

함양에서는 지금도 재래식 똥돼지 흔적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실제 그 명맥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는 이에게 의뢰를 받아 한 마리씩 키워 용돈 벌이하는 정도다. 지금 흑돼지는 대부분 사료로 키운다.

재래종은 70kg 정도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새끼도 5~8마리밖에 낳지 못한다. 일반돼지보다 생산성이 확연히 떨어진다. 하지만 그 쫄깃한 육질을 못 잊는 이들이 많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2000년대 이후 흑돼지에 다시 눈 돌렸다. 순수 버크셔 품종을 사육하거나, 종에 상관없이 우량 교배를 통해 퇴화하던 흑돼지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함양에서는 순수 버크셔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버크셔는 이마, 발 네 개, 꼬리 부위 등 모두 여섯 개의 흰점이 있어 '육백'이라 불리기도 한다.

   

지금은 일반돼지보다 10kg밖에 적지 않은 100~110kg까지 자란다. 사육기간은 일반돼지에 비해 45일가량 더 긴 180일 정도다. 사육기간이 길기에 육질이 쫄깃하다. 빨리 비대해지면 육질이 흐물흐물할 수밖에 없는데, 흑돼지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살이 붙어 아주 단단하다. 육질 차이는 유전적인 부분이 크지만, 사료도 크게 좌우한다. 출하 두 달을 앞두고서 육질을 단단히 하는 사료를 집중적으로 먹인다고 한다. 함양에 500마리 이상 하는 대형 농장에서는 저마다 사료 개발에 정성을 쏟고 있다.

일반돼지는 한번에 새끼 12~13마리를 낳는 것에 비해 흑돼지는 9~10마리 정도 낳는다. 대부분 농가의 어미돼지 비율은 10%가량 된다. 어미돼지는 1년에 두 차례 등 모두 6~7회 출산하면 도태한다. 그러면 농가에서는 또 다른 암놈을 채운다. 어미돼지는 새끼 때부터 건강한 놈을 눈여겨봐 두어 '모돈 후보'로 표시해 두었다가 60일가량 지나면 선정 여부를 결정한다. 어릴 적부터 허약한 놈들은 기간이 지나도 크게 호전되지 않고 폐렴 같은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 한다.

농가 처지에서는 사육기간이 길고 한 번에 태어나는 마릿수도 적기에 일반돼지에 비해 더 비싼 값을 매길 수밖에 없다. 함양에서 출하된 흑돼지는 읍에 있는 도축장으로 옮겨져 손을 본 후 전국 각지로 유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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