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대한 애착과 혁신이 지역신문 생존비법"

1987년 민주화 이후 언론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지역 언론이 무수히 생겨났다. 1989년 통영지역주간지 <한산신문>도 이때 창간했다. 한산신문은 주민자치·참여·언론자유·정치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를 명시함은 물론, 정당과 종교 가입금지, 직장 민주주의, 독자 반론권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지침과 윤리규정을 제정했다. 그 덕분일까? 언론자유화 이후 생겨났던 수많은 언론이 허무하게 사라져 갔지만 한산신문은 여러 위기에도 24년이 지난 지금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산신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같이 해온 성병원 편집국장을 만나봤다.

나에게 멘토가 있었다면

성병원 편집국장(50)의 고향은 통영이 아니라 거제시 거제면 내간리였다. 그러면 통영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가 거제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영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통영고는 서울대에 매해 10여 명 보내던 명문이었습니다.”

통영고를 졸업하고 그는 경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저희 집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등록금도 제가 벌거나 주변에서 도와줘서 마련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정보에도 많이 어두웠습니다. 당시에는 교직이수를 하면 교사가 많이 됐는데, 저는 그걸 잘 몰랐습니다.”

성병원 한산신문 편집국장./임종금 기자

그는 전공을 살려 언론인이 되기로 했다. 그런데 언론인이 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동아일보(당시 동아일보는 지금보다 위상이 훨씬 높았고, 발행부수도 최고였다)에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상식이나 작문 시험은 그럭저럭 쳤고, 영어시험도 그럭저럭 쳤습니다. 그런데 영어2 시험이라고 있었습니다. 영작을 하는 시험인데, 정말 황당했습니다. 내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했는데, 이런 시험이 나올 줄은 몰랐던 거죠. 한 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서울지역 언론에 진출을 못했지만, 당시 지역 언론이 활성화 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지역으로 눈을 돌린다.

“경남신문에 공채시험을 치는데, 4명 뽑는데 한 학교가 다 찼습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데, 역시 쉽지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인턴쉽 과정이 있었고, 인턴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다 뽑혔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 ‘경남신문에 가려면 인턴을 해야 한다’고 조언을 해줬다면 제가 했을 텐데, 저에게는 그런 멘토가 없었습니다.”

멘토는 없었지만, 그에게는 후원자가 있었다. 바로 경상대 신경득 교수였다. 신 교수는 파스퇴르 유업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정보를 듣고는 그에게 원서비와 차비를 지원해줬다. 그리고 그는 파스퇴르 유업에 합격했다. 당시 파스퇴르 유업에서는 특이하게도 지방대 출신만 뽑았다. 그런데 그가 서울생활을 하려는 찰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파스퇴르 유업에서는 며칠 출근도 못 해보고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에 있는데, 마침 한산신문이 만들어지는데 들어가면 어떻겠냐는 추천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공채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작지만 강한 한산신문의 ‘살아남기’

한산신문까지 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한산신문에서도 만만치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신문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만 했지, 신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가 안 돼 있었습니다. 한산신문에 오니 저에게 편집 일을 시켰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로 인쇄를 글자만 했습니다. 그럼 나머지 선이나 그림들은 전부 편집기자가 손으로 그렸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미술이었습니다.”

성병원 한산신문 편집국장./임종금 기자

그는 여관방에서 그리고 신문사 한편에 공간을 빌려 숙식을 하면서 편집 일을 했다. 그렇지만 편집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자니까 취재를 해야 했습니다. 인물 취재를 주로 했었는데, 직속선배가 제가 가져간 원고를 읽지도 않고 선풍기로 다 날려버리더군요. 다시 주워 가져다 주니까 빨간펜으로 원고를 다 수정해 주는데, 그야말로 원고지가 ‘난도질’ 당했습니다. 그때 ‘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회의를 품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그가 맡은 일은 부산에 가서 인쇄를 하는 일, 신문 띠지 작업도 함께 해야 했다.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당시 돈은 많이 받으셨습니까?

“40만 원 정도 받았습니다. 박봉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정신없이 바쁘니 돈을 쓸 기회가 없어서 월급이 그대로 통장에 남아 있는 겁니다.”

박봉이고 일은 많았다. 이직을 생각해 볼 법 했다.

“제 직속선배가 서울로 가 버려서 편집을 할 사람이 저 하나 뿐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편집일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고, 편집이 없으면 신문이 발행이 안 되고, 신문사가 문 닫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발을 못 빼고 계속 그렇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편집을 맡아서 발을 못 뺀 것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학생 운동을 하다가, 풀뿌리 민주주의 해 보자고 내려온 사람들이 한산신문을 만든 주축이었습니다. 의욕도 있었고, 명분도 있었습니다. 홍순우 씨(김두관 전 도지사 정무특보)가 초대 편집국장을 했고, 굉장한 사람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일하고 나서도 밤새 우리사회에 대해 토론하고, 사무실 한편에 쪽방을 만들어서 뒤엉켜 자고, 참 열정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의 순수함과 열정과는 달리 시장성이 약했던 신문사는 하루하루 어려워져 갔다. 임금체불이 이어지고 결국 1992년 10월 27일. 127호를 끝으로 한산신문은 휴간에 들어갔다.

“휴간을 하고 나서도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사장님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일단 튼튼한 기업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한려개발이었습니다.”

한려개발이라. 어떤 회사였을까?

“재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친구인 서정기 씨가 사주였습니다. 국제신문을 만든 곳이 바로 한려개발입니다. 한려개발에서는 신문에 투자하기로 하고 신문사 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했습니다. 성균관대 교수인 김정탁 씨가 사장으로, 김정탁 씨의 동생인 김준탁 씨가 매일경제에 있다가 한산신문 편집국장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공채를 새로 했습니다. 저도 기존 직원이었지만, 공채시험을 치르고 다시 들어왔습니다.”

성병원 한산신문 편집국장./임종금 기자

그렇게 한산신문은 휴간 6개월 만에 복간했다. 한려개발은 한산신문을 크게 키우고 싶었다. 일본과 중국에 특파원을 두고, 서울에 사무실을 따로 두었다. 직원 급여도 상당해서 일간지 기자들도 부러워 할 정도였다. 보너스도 400%에 달했다. 외부 기고자에게 원고료를 직원 급여보다 많이 줄 정도였다. 그러니 전국에서 좋은 글과 스펙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입사했다. 한려개발에서는 향후 윤전기도 넣고, 일간지를 초월하는 신문으로 한산신문을 키우고 싶었다. 신문도 대판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했다. 그러나 갈등도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 특파원을 보낸 것만 보더라도 한산신문을 풀뿌리 지역 언론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따졌습니다. 왜 신문을 지역적으로 하지 않느냐고. 또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지역 실정을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서로 비전도 조금 다른 것 같았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전국에서 이름난 지역지로 만들고 싶었고, 우린 풀뿌리 지역 언론을 지향했으니.”

어쨌든 지원이 빵빵했기 때문에 탐사보도와 기획 기사의 비중이 높아졌고, 좋은 글들이 많이 실렸다. 지금도 이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기획 취재와 탐사보도로 많은 성과를 냈다.

그러던 중 IMF 외환위기가 왔다.

“큰 기업의 지원 받으니 광고를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된다는 생각도 적었고, 독자들도 ‘큰 기업에서 하니까 구독료 안 내도 되겠지’ 생각했기 때문에 적자가 계속 쌓였습니다. 그래도 한려개발이 있으니 큰 걱정을 안 했는데,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온 거죠.”

두 번째 위기였다. 모기업이 내려앉으면 계열사들도 같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신문사를 살려야 했다.

“주식을 한려개발에서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걸 우리 쪽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20쪽 짜리 기획서를 들고 발행권을 돌려달라고 서울 본사로 갔습니다. 본사에서는 분명한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김관욱 씨(나중에 한산신문 대표이사, 통영시의회 의장이 됨)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우리가 준 기획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우리는 지역신문을 제대로 살려보고 싶다,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깝지 않느냐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한산신문은 한려개발에서 직원들 손으로 넘어왔다. 이후 한산신문은 2003년 타이블로이드 32면 올 컬러로 제작했으며, 성병원 국장은 2001년부터 편집국장을 맡게 됐다.

통영은 작은 나라

기자는 예전부터 통영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통영은 유독 이슈나 논란이 많은 곳이다. LNG 발전소 건립문제, 소매물도 주민 갈등, 최근 불거진 시의원 폭행, 케이블카 논란, 시내버스 노사갈등 등 최근 1년 사이만 해도 여러 이슈들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윤이상, 박경리, 김춘수, 유치진, 전혁림 등 시대를 풍미한 문화예술인들이 쏟아진 곳이다. 인구 14만에 불과한 통영이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것일까?

“통영은 우리나라에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통영답다’, ‘통영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자존심이 세고 고집이 강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여기는 통제영이 있던 곳입니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통제영’에서 나온 지명입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통제영은 과거 독자적으로 화폐 주조권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수군 기지가 아닙니다. 하나의 작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생산할 수 없는 것은 주변지역과 교역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발달하는 겁니다. 음식 문화도 발달하고, 물류 중심지가 되고, 먹고 사는 것에서 큰 걱정을 안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업을 통해서도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사실상 하나의 작은 나라였던 통영, 덕분에 주민들의 자부심과 결속력은 상상을 초월할 때가 있다.

“통영에는 ‘국연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조직일 겁니다. 초등학교 졸업동기들 모임입니다. 그러니까 78국연회라고 하면 ‘1978년에 통영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동문이나 지역을 완전히 초월해서 통영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입니다. 통영주민의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통영 시내에서 별 근거 없이 통영을 욕하면 한 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의 자부심이 크니, 개개인의 목소리가 큰 겁니다.”

그러나 이 자부심 강한 통영도 최근 흔들리고 있다. 바로 조선경기의 쇠퇴 때문이다.

“물론 통영에는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이 옵니다. 주말에는 주변 도로가 정체될 정돕니다만 관광업은 일부분만 혜택을 봅니다. 전체가 혜택을 보기 위해서는 조선소와 같은 기반산업이 있어야 합니다. 통영에 있는 조선소가 몇 군데 문을 닫으면서 인구도 줄 형편이고, 지역경제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지역경제가 살아야 지역신문도 함께 사는데….”

한산신문의 도전과 성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한려개발에서 독립한 한산신문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한산신문은 이후 여러 시도들을 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기나긴 싸움과 노력을 벌여나갔다.

“인터넷 방송을 2003년에 했습니다. 너무 일찍 한 거죠. 우리가 만든 스튜디오에서 시장 후보 초청 토론회도 하고, 후보가 정견발표도 하게 했습니다. 지역에서 큰 이슈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걸 돈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앞서가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참다랑어 기획취재로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기자들이 모두 경력이 10년 이상씩 됩니다. 적어도 수산이나 문화 쪽에서는 전문성을 인정받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참다랑어 기획취재는 통영시 수산정책에서 정부의 수산정책까지 바꿨습니다. 2009년 지역신문 컨퍼런스에서 우수상과 인기상을 받았습니다.”

한산신문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에 제출한 자료. 모든 자료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임종금 기자

지역문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통영에 꽃 시비를 세우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꽃 한 송이에 만 원 씩 받고, 후원한 사람의 이름을 다 적어서 꽃 시비를 남망산 입구에 세웠습니다. 그걸 계기로 해서 통영에 공공예술이 활성화 됐습니다. 이 운동은 2008년 지역신문 컨퍼런스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 뿐만 아니다. 경상남도 지역신문 발전지원 조례 제정에 앞장섰으며, 2006년 이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우선지원대상사로 줄곧 선정됐다. 한산신문의 혁신적인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한산신문은 매주 2면을 모두 털어 ‘구독료 납부자’ 명단을 공개한다. 이건 어찌보면 매우 위험한 시도다. 구독자 숫자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경쟁지에 정보가 노출되는 것이다. 신문사 구독자 정보는 신문사 최고의 ‘기밀’이다. 왜 이걸 공개한 것일까?

“그만큼 우리가 당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구독료도 비쌉니다. 월 구독료 7000원인데, 지역주간지가 이렇게 비싸게 받는 곳은 거의 없을 겁니다. 어떤 구독자는 자기 이름이 신문에 나왔다고 좋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나 기고글이 나가면 거의 100% 피드백이 옵니다. 서울에서도 신문을 보고 연락을 해 주시는 분이 있고, 오탈자를 검수해서 연락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 신문사의 영향력이 유지되고, 구독료와 광고만 가지고도 우리 신문은 운영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뿐만이 아니다. 2010년 9월 박경리 선생이 타계하자, 한산신문 김영화 기자가 쓴 “내 친구 금이야, 곱디곱던 마음처럼 좋은날 갔구나”라는 기사는 고등학교 국어(하) 교과서에 전문이 실려있다.

한산신문의 도전과 성과는 다른 언론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것이었다. 거제신문, 고성신문, 양산신문 등 지역의 언론들이 그에게 와서 배워갈 정도였다.

한산신문은 (사)바른지역언론연대에서 '풀뿌리 언론상'을 수상했다.

살아남으려면 사랑하라

그러나 한산신문이 앞으로 더 성장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만만찮다.

“신문이 목요일 편집이 마무리 되고, 금요일 나옵니다. 우체국에서 배달을 하는데, 집배원들이 바빠서 다음 주 월요일에 배달이 되거나 심지어 화요일에 배달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문이 구문이 되는 겁니다. 인터넷에 빨리 뛰어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체국에 얘기를 많이 해봤는데, 현재 배달 시스템 상 어쩔 수 없는 일 같습니다. 그리고 저 포함 기자가 3명입니다. 인원을 충원하려 하는데, 워낙 저희가 철저하게 가르치니 젊은 사람들이 버텨내질 못하는 겁니다. 이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앞으로 지역신문이 어떻게 나가야 할까요?

“지역신문은 공공저널리즘을 해야 합니다. 일간지는 영역이 크니까 어렵지만, 지역 주간지는 공공저널리즘이 딱 맞습니다.”

공공저널리즘, 알듯말듯한 굉장히 막연한 말이었다. 그의 석사 논문에 따르면 공공저널리즘이란 언론이 시민과 더불어 이슈를 생산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보도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시선에서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시민들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공공저널리즘을 공부하러 미국에 연수를 갔는데, 어느 신문사에 ‘독자처럼 생각하라(Think like reder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우리 신문은 이걸 슬로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병원 편집국장 가족사진.

-지역신문이 힘든데, 한 신문사에서 24년이나 버틴 힘은 무엇입니까?

“지역신문 기자는 애착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지역과 독자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기자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기본이 된 상태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결코 나 혼자 잘 나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닙니다.”

거의 4시간 동안 인터뷰가 이어졌지만,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인터뷰를 멈춘 것은 그의 취재 일정 때문이었다. 통영지역은 온오프라인 언론사가 무려 10여 개가 넘는다. 그 치열한 곳에서 2번의 큰 위기를 겪으면서도 24년 동안 그와 한산신문은 꺾이질 않았다. 바로 통영사람이 갖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 지역 언론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이 지금의 그와 한산신문을 지켜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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