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정치 더 사랑받을 수 있다"

소녀는 전남 광양 바닷가에서 6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바닷가 촌살림이라는 게 뻔했다. 농사 좀 짓거나 갯벌에서 조개 캐서 겨우 끼니 걱정을 더는 정도였다. 어쨌든 6남매를 키우기에는 한없이 척박했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소녀는 집에서 더는 자신에게 해 줄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넷째만 받아들일 운명이 아니었기에 원망도 없었다. 다만 공부 욕심까지 접을 수 없었다. 경남 마산을 가면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게 그 무렵이었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았고, 어릴 적부터 유난히 다부진 딸을 어른들도 말릴 수 없었다. 그리고 33년 뒤, 전남 광양 바닷가 출신 소녀는 진보 정당 비례대표 경남도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남도의회 건물 벽은 상당히 두껍다. 덕분에 제법 더운 바깥 날씨에도 건물 안쪽 그늘진 곳에는 은근히 냉기가 돈다. 그래도 볕이 드는 사무실은 덥다. 이종엽(50) 의원은 “오늘은 모처럼 에어컨이 나온다”며 웃었다. 사무실 안에 들어서면 벽에 가득 쌓아올린 자료가 눈에 띈다. 주로 경남도에 요청한 행정 자료다.

이종엽 의원은 지역에서 드물게 학연·지연·혈연에 빚이 별로 없는 정치인이다. 일단 전남 광양 출신이니 지연·혈연은 내세울 게 없다. 약력에는 ‘대입 검정고시’로 돼 있으니 내세울 학연도 마땅찮다. 그렇다고 경남지역에 영향력이 막대한 거대 정당을 등에 업고 정치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는 민주노동당 시의원이었고 통합진보당 도의원이다. 그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공부가 하고 싶어서 온 마산

“중학교 졸업하고 더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때 고향 친구 언니가 마산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일하면서 야간에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결심했지요. 당연히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좀 셌나 봐요. 그때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수출자유지역으로 간 게 1980년이다. 첫 직장은 신발을 생산하는 대성공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직원들은 으레 일을 마치면 학교로 향했고 회사도 일부러 막지 않았다. 하지만 하필 광양 소녀가 진학을 하려고 할 때 회사 방침이 보내주지 않는 쪽으로 바뀌었다. 공부하고 싶어서 직장을 간 것이지 일이 먼저는 아니었기에 미련 없이 회사를 옮겼다. 역시 신발 생산업체인 신흥화학이었다.

“저는 초등학교를 9살 때 들어갔어요. 세월만 보내서는 안 되겠다 싶어 회사에 학교는 알아서 선택할 테니 학교 갈 시간만 보장해달라고 요구했지요.”

종엽 말고도 학교 다니는 학생이 많았기에 회사에서도 요구를 받아들였다. 종엽은 비인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고졸 검정고시까지 통과한다. 하지만 일보다 공부가 먼저였던 종엽과 달리 회사는 직원 공부보다 생산이 먼저였다. 당시는 수출자유지역이 한참 활기를 띠고 있을 때였다. 주문이 밀리면 ‘배움의 기회’는 한가한 욕심 정도로 취급됐다. 공장에서는 생산 시간을 늘리는 만큼 공부 시간을 줄였다. 그래서 종엽은 1983년 한국중천전화산업㈜으로 다시 직장을 옮긴다.

“일을 하면서 공부도 계속할 수 있었고…. 일은 확실히 신발 공장보다 편했네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종엽은 직장만 옮긴 게 아니었다. 한국중천전화산업은 학생 이종엽이 노동자 이종엽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선진 작업환경이 준 충격

이종엽 의원은 한국중천전화산업 노동조합 1·2대 위원장을 지냈다. 노동조합은 1987년에 결성하는데 입사하고 4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저 공부만 할 수 있으면 충분했던 그에게 노동조합 결성을 이끌게 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1986년인가. 일본에 연수를 가게 돼요. 회사에서 신제품 생산라인을 까는데 그 작업을 배우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일본 업체 노동자를 보니까 상대적으로 우리 노동 강도가 너무 센 거예요.”

똑같은 공정도 한국에서는 서서 하는 작업을 일본에서는 앉아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작업환경 차이가 너무 뚜렷했다. 그리고 한결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우도 달랐다. 아니, 대우가 달랐기에 그런 작업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연수를 통해 남은 것은 선진 기술보다 선진 노동환경에 대한 인상이었다.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그래도 일본 업체 현장은 그냥 ‘선진국이라서 다르구나’ 정도로 넘길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작업환경에 대한 동경이 바로 노동조합 조직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면 당시 그 수많은 업체들이 직원을 일본에 연수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83년부터 양덕성당에 다니면서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그곳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시작하지요. 이때 학습을 통해 의식적으로 노동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제 운동의 출발점인 셈이지요.”

1987년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노동자 이종엽은 한국중천전화산업 노동조합 초대 위원장이 된다. 처음에는 현장 동료조차 함께 나서지 못했다. 그나마 일본 연수를 통해 작업환경 차이를 경험했던 게 작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래도 노조를 만들어 신고하기 전까지 숨어 다니며 회의를 열고 준비했다. 그나마 당시 수출자유지역에 노동조합이 계속 만들어지는 분위기라는 게 작은 힘이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조합 활동하는 사람만큼 따뜻한 사람이 있을까. 자기 생각을 하지 않고 현장 동료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고 보면 이종엽 의원은 현장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조직하고 활동한 순도(?) 높은 노동자다. 같은 ‘운동권’으로 묶이기는 해도 사회적 고민을 연장하는 선에서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엘리트와는 결이 다르다. 의정활동이 사회적 담론을 앞에서 이끌기보다 공적인 과제를 함께 공유하고자 애쓰는 쪽에 쏠리는 이유도 이 같은 시작점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다른 선택이 없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현장에서 현장으로…. 다를 게 없었고 일상 활동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지요. 노동 문제를 삶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과 과제로 봤던 분들과 기본적으로 시각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느닷없이 시작한 정치

이종엽 의원은 1989년 마창노련 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바로 수배된다. 그리고 1990년 구속된다. 3자 개입, 업무 방해, 폭력행위…. 다른 사업장 노동자와 연대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꼬리표였다.

“수배됐다가 잡혔는데 처음에는 영장이 기각됐어요. 그런데 풀어주지 않고 있다가 다시 증언을 받아 구속하더라고요.”

1992년 7월에 풀려났고 이듬해 2월 결혼했다. 이종엽 의원은 이흥석 전 민주노총 경남본부장과 부부다.

“처음 알게 된 것은 1986년 정도였지요. 가톨릭여성회관에서 당시 노동 관련 강좌나 모임 등을 통해 만났는데요. 어느 날 한 번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는데 활동하면서 미운정이 든 것 같아요. 데이트요? 우리는 서로 교대로 구속돼서 교제다운 교제도 못 했어요.”

이흥석 씨가 마창노련 의장을 맡으면서 살림은 고스란히 이종엽 의원 몫이 됐다. 생활용품 가게도 했고 세탁소 일도 했다. 화장품 영업사원을 하다가 나중에는 보험설계사까지 하게 된다. 2000년 당시 이흥석 씨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권영길 후보 당선을 위해 한참 뛸 때였다. 매일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편에게 이 의원은 한마디 했다.

“이번에 권영길 당선 안 된다.”

“와 안 되노?”

“당신조차 나에게 당원 가입을 권유하지 못하는데 어디서 지지를 부탁할 건데?”

이 의원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남편은 뭐로 한 대 세게 얻어맞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 의원은 그때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창원 을지구당 부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2002년 지방선거를 맞게 된다.

“민주노동당이 그때 여성할당제를 주장했어요. 여성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가 높았던 시기였지요. 그런 상황에 지역에서 여성 후보를 내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에게 출마 권유가 들어온 거예요.”

정치? 한 번도 생각해 본 길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종엽 의원은 노동운동가, 정당 지구당 부위원장도 아닌 그저 한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였다. 초등학생 애들을 한 달 벌어 한 달 먹이는 그때 선거라니….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오죽하면 저보고 하라고 하겠는가 싶었지요. 결국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학연·지연·혈연도 없었다. 돈도 없고 애들은 어렸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고 막상 뛰어들었을 때는 전망조차 밝지 않았다. 괴로운 날이 한동안 이어졌다.

“주민들이 당신이 뭘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때마다 가진 것 없고 돈으로는 할 게 없지만 우리 주민 얘기 들어서 주민 뜻대로 얘기 풀어 나가는 데는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당시 이종엽 후보에게 롤모델은 부천에서 시의원을 지낸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었다. 학교급식, 담배 자판기 없애기 등 생활정치를 앞세운 의정활동이 한참 주목받을 때였다. 그렇더라도 주민 얘기 잘 들어서 풀겠다는 게 이종엽 후보만 내세울 수 있는 약속은 아니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없었던 후보 이종엽에게도 세 가지 정도 저력이 있었다.

먼저 아파트 통장 활동이었다. 임대아파트 살면서 통장 활동을 했는데 이때 나름대로 자치기구 역할을 했다. 당시 임대아파트에는 자치 기구를 구성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통장을 하면서 아파트 관리비 결정을 비롯해 소소한, 그렇다고 작다고 할 수 없는 성과를 주민들과 공유하며 성취하기 시작한다. 작은 변화라도 결과물이 나오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회의 결과를 붙이고 공유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아파트에 응용한 셈이다.

“막상 선거에 나오니까 주민들 사이에 저 사람은 똑똑하고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났더라고요. 선거 운동할 때 큰 힘이 된 소문이었지요.”

화장품 판매, 보험설계사 활동으로 몸에 밴 영업 역시 큰 도움이 됐다. 영업은 그 자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서로 거래하고 인정받고 믿음을 주고받으며 나중에 터울 없이 얘기할 수 있었던 관계는 역시 선거에 큰 힘이 됐다. 게다가 이 같은 영업활동은 정치 감각과 닿는 부분도 있었다.

“영업을 하면 관계에 대한 감각이 생겨요. 이 말을 저 사람이 좋아하는구나, 저 사람이 나를 믿지 않는구나, 이런 말이 필요하구나, 해서는 안 되구나 같은 판단을 정확하게 할 수 있지요. 영업 자체가 매우 정치적인 활동이에요.”

그리고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긴 세원을 건너뛰어 서슴없이 지원에 나섰다. 지역 안에서 꾸준히 벌였던 활동은 결국 선거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했다. 이종엽 후보는 2002년 제4대 창원시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2006년 창원시의원에도 당선되며 활동 기간에 시의회 부의장까지 역임한다.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시의원, 도의원으로서

“제 의정활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를 수 있어요. 그래도 창원시의회 때 성과라면 철거지역 주민들을 위한 임대아파트 건설을 꼽을 수 있겠네요. 어렵게 사는 분들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종엽 의원은 봉곡동·도계동에 임대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상임위원회 활동, 시정 질문 등을 통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북면에 지을 예정이었던 임대아파트를 이 의원은 끝까지 도심으로 끌어들였다. 어려운 사람일수록 도심에서 사회적 혜택을 더 많이 누려야 한다는 게 소신이었다.

“또 한 가지 성과를 꼽자면 창원 하천을 자연형 하천으로 복구하자는 제안을 주도한 게 있네요. 환경단체와 창원시 사이에서 수없이 간담회를 주도했습니다. 지금 보면 자연형보다 행정 과시형으로 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의원이 됐다고 해서 노동자 정체성이 사라질 이유는 없었다. 이 의원은 당시 노동자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창원시와 창원시의회에 다양하게 자극을 준다.

“2005년 시정질문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합니다. 박완수 시장에게 대놓고 ‘시장께서는 2년 이하 징역과 1000만 원 이하 벌금을 물 수 있다’고 했지요. 당시 시에서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결국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대한 제안을 통해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었지요.”

물론 한계도 있었다. 일단 의회에서 소수 정당 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 자료 하나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조례안 하나 발의하는 것도 어려웠다. 여당 의원 입맛을 맞추지 못하면 의안을 내놓지도 못했다. 일단 발의가 돼야 제정이 되든 말든 쟁점화가 되는데 발의 단계까지 가기가 어려웠다. 결국 공무원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집행부 발의안을 내는 방식을 택하면서 아쉬움을 겨우 달래곤 했다.

그런 점에서 2010년부터 시작한 도의회 활동은 훨씬 수월한 면이 있다. 일단 여당 눈치를 보지 않아도 발의할 수 있는 의석수가 확보됐기 때문이다.

“확실히 정책적 제안은 도의회가 시의회보다 나은 면이 있어요. 반면 풀뿌리 주민자치를 생각한다면 기초단위 의회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진보 정치 더 사랑받아야 한다

이종엽 의원은 여당 의원 사이에서 ‘말이 잘 통하는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논란이 생길 때 상대 말에서 부족한 부분을 따지기보다 충분한 자료를 풀어냄으로써 설득하는 방식이 대체로 공감을 얻는다.

“의회가 혼자 할 수 없어요. 이건 기초의회에서 단련된 부분이에요. 일을 풀다 보면 사람과 관계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싸울 때는 싸워도 또 인간적으로 접근할 부분은 접근해야지요.”

다수 여당 의원이 앞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결연한 진보 정치인만 생각한다면 조금 느슨해 보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진보 정치에 대한 이종엽 의원 진단은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진보 정치 전반이 안타까워요. 주민들이 보기에 진보 정당도 다를 게 없는 정당이 되는 거예요. 현재 분열된 모습을 보면 너무 답답합니다.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작은 차이는 인정하고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내년 선거가 다 죽자는 선거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힘을 모으는 길이 모색돼야 합니다.”

이종엽 의원은 누구보다 일선 정치인 책임이 가장 크다고 했다. 정파를 초월해 노동, 주민, 정치가 하나 되는 모습, 이런 모습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늦었지만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 의원은 진보 정치는 지금보다 훨씬 사랑받을 수 있고 더 사랑받아야 한다는 소망을 주문처럼 이야기했다.

이종엽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내년 지방선거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계속 대답만 하던 이종엽 의원이 처음으로 물었다. 진보정당 처지에서 가장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조용히 동의하며 잠시 속 시원한 돌파구를 고민하는 듯한 그에게 내년 선거 계획을 물었다.

“내년에는 지역 선거에 나가야지요. 창원 2선거구는 강성훈 의원, 4선거구는 석영철 의원, 5선거구는 여영국 의원이 있으니까 6선거구로요.”

제6선거구, 창원시 의창구 가음정·성주동은 이종엽 의원을 창원시의회로 보낸 지지기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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