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의 가장 큰 죄가 뭔지 아십니까?"

“농사를 포기하느냐, 전 재산을 날리느냐 갈림길이었습니다. 뭘 선택할 여지도 없었죠.”

밀양시 단장면 사연리 동화전마을 양윤기(64) 이장이 5월 말 한전의 송전탑 공사를 저지하던 당시 주민 심정을 대변한 말이었다. 지난 6월 10일 밀양 단장면 그의 미나리꽝에서 만난 양 이장은 그간 미뤄온 농사일로 무척 바빴다.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3호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북경남변전소까지 옮기는 765㎸ 송전선로 공사. 지난달 20일부터 29일까지 10일간 이곳 주민들은 사선을 헤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전과 밀양 주민들은 국회 중재로 지난 5월 29일 전문가협의체를 구성하고 40일간 공사 중단에 합의했다. 2011년, 2012년 이미 두 차례 공사 강행과 저지 투쟁을 반복했지만 주민들은 이번이 가장 힘들었고, 분위기도 험악했다고 했다.

밀양 765㎸ 송전탑 공사가 진행되는 4개 면(산외면·단장면·상동면·부북면) 중 공사 저지와 강행이 가장 격렬했던 곳은 단연 단장면 바드리마을 인근 4개 송전탑 공사 현장이었다. 이곳에는 83·84·88·89번 4개 송전탑 공사가 진행됐다. 인근 단장면 사연리 동화전 마을, 연경리 용회마을 주민 50여 명은 매일 산중 바드리마을로 올라갔다. 절반가량이 70∼80대 고령자였다.

89번송전탑 공사 현장 모습.

이 기간에 두 차례 찾아간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는 70대 이상 어르신들이 온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은 모습은 흔하디 흔했다. 마치 일상 속 습관인 양.

양윤기 이장은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매일 새벽 2시 일어나서 도시락 챙겨서 새벽 3시에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오후 6시 30분이나 7시에 내려왔죠. 한전 측 직원이 저녁에도 철수를 하지 않아 이틀 정도는 오후 9시에 내려오기도 했죠. 사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농사꾼에게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는데, 농사일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한 일주일 지나서는 70대 이상 어르신들이 그냥 ‘픽픽’ 쓰러지시는 겁니다. 진짜 이 꼴을 한전 간부나 도시 사람들이 봤어야 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남 말하기 좋은 ‘님비(NIMBY)’ 이런 말은 못할 겁니다.”

단장면 동화전·용회마을 주민 50여 명 중 공사 저지 도중 병원으로 옮겨진 이는 7명이었다. 지난 9일 한의사들이 마을로 와서 무료 건강진단을 했는데, 무릎과 관절이 아프다는 이들로 야단이었단다.

89번송전탑 공사 현장 모습.

송전탑 공사건으로 이장도 교체되고

단장면 사연리 동화전마을은 동화전 본동, 세천, 성지곡, 밭말리, 말뱅이(말방) 등 다시 다섯 개 마을로 나뉜다. 이중 밭말리와 말뱅이 마을 주민은 지난달 공사 저지에 함께 하지 않았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밀양 지역 어느 곳이든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한전이 제시하는 보상 수용과 공사 저지로 주민이 나뉘어 마을공동체는 사실상 해체돼 갔다. 해체를 넘어 양자간 극심한 불화로 이어졌다. 동화전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 이장은 지난해 8월 말부터 이곳 이장을 맡았다.

양 이장에 따르면 한전 측 보상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송전탑 설치 구간을 옮기든지 지중화하라는 측은 앞선 이장에게 한전 송전탑 공사에 관여하지 말고 “당신은 동네 일만 봐라”고 했단다. 대신 한전 측과 교섭, 공사 저지를 맡은 이를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따로 뒀다고 했다. 원래 4개면 주민대책위원회는 동네별 이장들이 대책위원장을 맡아 했는데, 이들 대다수가 협상을 중심으로 얘기를 계속 꺼냈단다. 동화전마을도 같은 양상이었다고 했다.

양윤기 밀양 단장면 동화전마을 이장./박일호 기자

양 이장은 “지난해 6월 초부터 9월 24일 공사 때 저지에 나섰다지만 초기에는 그냥 올라가서 그늘에 쉬는 게 다였죠. 당시 대책위원을 맡았던 단장면 이장들이 '장비를 건드리거나 헬기 밑에 가면 벌금 3000만 원, 공사장 내 출입 시 벌금 500만 원을 내야 한다'며 주민이 공사 저지를 소극적으로 하도록 유도한 측면이 있습니다”고 했다.

지난해 1월 말 산외면 보라마을 이치우 씨가 분신할 당시 분위기도 언급했다. 그때도 공사 저지에 나섰는데, 대책위를 맡은 이장들은 하루 주민 200명씩을 동원했다. 양 이장은 “매일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공사 저지에 동원되니 사람들이 지치는 거죠. 그때 조를 짜서 합리적으로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손쉬웠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협상을 유도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그래도 (이장을) 믿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은근히 한전 편을 들며 협상을 유도하더군요. 밀양시 4개 면 대책위 모두 이런 내홍을 겪고 뒤늦게 이장을 교체하거나 대책위원을 바꿨죠”라고 했다.

동화전 마을에서도 주민 투표 얘기가 나왔고, 지난해 8월 말 결국 이장을 교체했다.

밀양지역 시민단체가 주축이던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와 4개 면 주민대책위가 조직을 합친 이유도 이런 주민 갈등에서 비롯됐다.

8년 전 빚 얻어 들어온 땅, 그런데…

양 이장은 동화전마을 토박이는 아니라고 했다. 고향은 밀양시내로, 정확하게는 가곡동에 본가가 있다고 했다. 밀양시내 한 고교를 나와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다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는 시내에서 부동산 일을 했단다. 약 8년 전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이곳에 미나리 농사를 하고자 왔다. 이곳 정착을 위해 7억 원 정도 투자했다.

마을 앞산 꼭대기와 중턱 사이에 있는 바드리마을 인근 송전탑 공사장과 그의 논과 미나리꽝 거리는 385m 정도라고 했다.

벼농사는 겨우 양식을 할 정도만 짓고, 주수입원은 3500평 규모인 미나리 재배라고 했다. 연 1억 5000만 원 정도 매출에 순수익이 1억 원 정도 된다고 했다. 물론 여기에는 매장 운영비가 제외돼 있다.

그는 “765㎸ 철탑이 들어오면 이 수입원이 다 막힙니다. 그래서 생사를 걸고 하는 거죠.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송전탑 공사장 300m 이내에 있는 주민들에게 단위농협은 담보대출을 해주지 않아 투자비용이 큰 시설 농가나 생계비가 없는 어르신들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농사 짓고 있는 양윤기 밀양 단장면 동화전마을 이장./박일호 기자

송전탑 문제로 이미 철탑 주변 1㎞ 이내 땅값은 반 토막이 나고, 300m 이내는 기존 시세의 75%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한전은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른 보상금 이외 ‘120억 원 +@’를 제시한다고 했다. ‘120억 원 +@’는 직접 보상이 아닌 간접 보상형태라고 했다. 조용하게 얘기하던 그도 이 부분에서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밀양 송전선로 경과지 주변에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가구 수만 1600가구에 이릅니다. 현재 땅값 떨어지는 것만 봐도 미래가 뻔한데, 가구당 피해 금액을 3억 원만 잡아도 3600억 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120억 원, 그것도 간접 보상하겠답니다. 한전이 굳이 지금 설계대로 송전탑과 송전선로를 만들겠다면 1600가구 땅을 다 사라고 해요.”

깻잎 농사 망치고 1년 생활비 날릴 뻔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와 경남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5월 20일부터 29일까지 10일간 공사 저지에 나섰던 주민은 단장면 고례리 바드리마을 인근 사연리 동화전·용회마을 등 2개 마을 70여 명, 산외면 희곡리 보라·괴곡마을 등 2개 마을 60여 명, 상동면 도곡리 도곡마을, 고답리 고답마을, 고정리 고정·모정마을, 옥산리 여수·옥산마을, 금산리 금호마을 등 7개 마을 310여 명, 부북면 위양리 지시골·본동·새마마을, 대항리 평밭마을 등 4개 마을 50명 등 470여 명이었다.

이 4개 면은 국내 깻잎 주산지인 밀양 내에서도 깻잎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지역이다. 밀양시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밀양지역 노지(야외) 깻잎 재배 농가는 403개 농가로, 재배 면적은 16.3ha에 연간 521t을 생산했다. 시설(비닐하우스) 재배 깻잎은 633개 농가가 149.3㏊에 6151t을 생산했다. 생산량으로 보면 시설 깻잎은 4개 면에서 3237t이 생산돼 전체의 52.6%를 차지했다. 더욱이 노지 깻잎은 이 4개 면에서 511t을 생산해 전체 생산량의 98%를 차지할 정도였다.

노지 깻잎은 공사 저지 전후로 약 3주간 일 년 중 가장 일손이 필요한 때였다. 이때 잎 솎아주기 등을 하지 않으면 대가 굵어져 상품 가치를 완전히 잃는다는 게 깻잎 재배 농민들의 설명이었다. 공사 재개와 저지 상태가 일주일만 더 됐어도 올해 노지 깻잎 농사는 물 건너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양윤기 밀양 단장면 동화전마을 이장./박일호 기자

양 이장은 “당시 대추 농가에서도 일손이 한참 들어갈 때였죠. 그런데 70∼80대 어르신들은 대추 농사는 힘이 들어 못하니까 주로 노지 깻잎을 재배하는데, 이게 그래도 연간 700만 원에서 1000만 원 정도 남습니다. 일주일만 더 됐어도 어르신들 깻잎 농사는 완전히 망칠 뻔했지요”라고 했다. 공사 저지에 나선 4개 면 주민들 중 160명가량은 적어도 200평 이상 노지 깻잎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일주일이 더 됐다면 일 년 농사를 망쳐 가구당 재배면적 최소치인 200평만 잡아도 11억 2000만 원의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수도권․도시 사람들, 말 좀 들어보이소”

양 이장은 고향이 밀양시내인 만큼 밀양 도심지역 주민 정서를 비교적 잘 안다고 했다. 그는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지만 ‘너희도 전기 쓰지 않느냐’며 지역이기주의로 내몰거나 괜히 밀양 시끄럽게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만약 밀양 시내지역이 경과지에 포함됐다면 이 지역 주민은 우리보다 더했으면 더했을 텐데, 자기 일이 아니라고 이런 식입니다. 다른 도시 지역 주민도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전투(그는 싸움, 투쟁도 아닌 전투라고 표현했다)에서 이기려면 전기 소비가 밀집된 도시민들이 이곳에 와서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네 집 뒷산에, 혹은 앞산에 이 초고압 선로가 지나가고, 건강에 대한 두려움은 둘째치고 당신네 집값이 반 토막 난다면 그냥 있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52개의 거대한 철탑이 밀양 4개 면을 관통하는 한전 765㎸ 송전선로 사업. 한전 측의 말 바꾸기도 있었지만 신고리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옮기고자 이 사업이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도권 주민 2500만 명 전기 소비량은 국내 전체 소비량의 43%, 하지만 수도권 내 전력생산시설은 20%에 불과하다. 이 23% 차이만큼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끌어와야 한다. 한전은 되도록 싼 공사비로 송전탑건설비고 수송 단가를 낮추고자 고압으로 전기를 옮기려 한다. 그렇게 하려면 밀양처럼 비수도권 지역민과 갈등은 불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양 이장은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수도권 주민들이 밀양 사태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입니까. 밀양 인근 부산 기장부터 경주까지 원자력발전소가 즐비합니다. 인근 부산·경남·울산, 경북 일부 지역민은 원전 안전성 때문에 늘 불안해합니다. 여기에다가 이제는 이 지역에서 만든 전력을 서울에다가 공급하겠다고 저런 초고압 송전선로를 만들려다가 사달이 난 게 밀양 사태입니다.

우리도 원전 추가 건설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정말 정부가 그렇게 안전하다고 자부한다면 신규 원전을 수도권 지역에 지으면 됩니다. 아마 수도권에서는 난리가 날 겁니다. 원전 반대하는 이들도 급속히 늘 거고요. 밀양 사태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몇 배는 늘겠죠. 물론 우리도 핵발전소 반대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수도권 주민이 다른 지역민 피눈물 속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산다는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 자체를 모르니 차라리 원전을 수도권에 짓는 게 ‘탈핵 탈핵’ 외치는 것보다 훨씬 일이 빨리 진행된다는 겁니다. 직접 겪어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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