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 2개 들고 마산으로…소녀에서 엄마로

전남 나주시 동강면 운산리 광산 김 씨의 집성촌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나의 어머니 김은경 씨. 어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십리를 걸어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그녀가 달랑 보따리 2개만 들고 마산으로 오게 된 건 무슨 사연일까? 마산에서의 삶은 소녀가 여자로, 다시 엄마로서 성장하는 시간이었다고.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창원시에 위치한 뉴코아 아울렛 4층 키즈굿마켓에 가면 늘 웃는 얼굴로 옷을 팔고 있는 나의 어머니 김은경(47) 씨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고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같이 찾는다. 집에서도 늘 밝고 씩씩한 얼굴인데 직장에서도 변함없다. 오히려 더 많은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즐거움인 듯하다. 주부로 있다가 판매직원으로 다시 사회생활을 한 지 벌써 5년이 되는 그녀. 항상 적극적이고 당찬 나의 어머니 김은경 씨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전남 나주 귀암댁 넷째 딸 은경이

-6남매 중 넷째라면 다른 형제들에 치여 서러웠을 것 같은데요?

김은경 씨./사진 이윤아

“특별한 서러움은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형제들 중에서 많이 받았고 힘들게 살았다는 기억도 별로 없구요. 고등학교 시절에 기억을 되돌아보니 우리 집이 못 살았구나 힘들었구나 라고 생각했지 당시에는 힘든 거는 몰랐습니다. 집성촌에서 대접 받으면서 살았기에 딱히 중간으로 태어나서의 서러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으셨다고 하는데 제일 존경했던, 좋아했던 인물은 누구였나요?

“관창과 사다함이 너무 멋있었어요. 사다함을 먼저 읽었는데 용맹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다음 관창인데 관창이 나보다 몇 살 많았지만 그 나이에 계백한테 맞서 싸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리고 퀴리부인을 읽었는데 대단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여자 같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 사진을 보니깐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 같았는데 실제로는 어떤 아이였는가요?

“친구들이 느끼는 저는 사납고 고집이 센 아이였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자존심이 세다, 잘난 척을 많이 한다…이런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선생님들에게 평판은 어땠는지?

“지각이나 결석 같은 것이 없었기에 늘 성실하고 야무지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중학교 때 우산 없이 10리를 걸어 학교에 가는데 교감선생님께서 ‘은경이 오늘도 비 맞고 학교 가냐’며 교문까지 우산을 씌어 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특별활동도 많이 하고 주장도 강하고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니깐 이쁘게 봐주신거죠.”

-기억에 남는 특별활동은 무엇인가요?

“걸스카우트인데요. 걸스카우트를 하면서 봉사활동도 했지만 단복이 제일 마음에 들었죠. 원피스인데 허리에 띠를 질끈 묶는 옷인데 소풍 갈 때도 입고 갈 정도로 좋아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옷이 예뻐서 걸스카우트를 한 것 같아요. 친구들이 안하는 것을 하고 싶었던 것도 포함되어 있고요.”

“마산은 내게 희망의 도시였다”

-나주에서 마산으로까지 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때 당시 꿈이 생겼어요. 초등학교 때는 아무 꿈이 없었는데 중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광주에 있는 인문계에 진학해서 대학교를 가면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 원서를 쓸려고 하니깐 어머니께서 고등학교는 못 보내준다고 하시더라구요. 선생님께서는 광주에 있는 인문계를 추천해주셨지만 제가 형편이 안될 것 같다며 다른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그때 추천 받은 곳이 마산에 있는 한일전산이었죠.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 하더라구요. 그리고 마침 동네에 고모뻘 되는 사람이 마산에 있어 결정하기가 쉬웠죠.”

-꿈이 꺾이는 순간이었네요.

“그렇죠. 지금도 진학원서를 쓰는 11월이 되면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지 가을을 많이 타죠. 그때 마산에 오기로 결심했던 순간이었고 좌절감에 많이 슬펐죠. 다른 사람들은 11월에 단풍이 이뻐서 좋다고 하는데 저는 항상 그때가 되면 마음이 허해요.”

-마산 처음 도착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밤차를 타고 내려서 별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몇 번째 굴뚝을 보고 찾아오면 된다는 말만 기억하고 잘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지 느낌이나 기분은 전혀 생각도 못했죠. 그냥 떠나올 때 내 희망의 도시다라고 생각하고 왔죠.”

김은경 씨 고교시절./사진제공 이윤아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었는데 외롭지는 않았는지?

“외로운 거는 없었어요. 기숙사에 애들도 많았고 현실을 인정하기 바빠서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죠. 보따리 2개 들고 와서 먼저 입사를 하고 학교에 입학했는데, 저 멀리 섬에서 온 애 등 저보다도 더 멀리서 온 사람들도 많았기에 동질감도 느끼면서 같이 생활했죠.”

-일하랴, 공부하랴 힘들지는 않았는지?

“두려웠죠. 우리 공장이 무서운 공장이라고 하더라구요. 일하다가 손도 짤리고 팔도 짤리고 안전사고가 많이 발생해서 주의도 많이 했지만 무서워서 많이도 울었죠. 거기에다 제가 전라도 말을 쓰니깐 전라도말이 존칭어를 쓴다고 해도 거의 반말투로 들리니깐 그거에 대해서 지적을 많이 받았죠. 공장 언니들한테 싸가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다른 선배가 경상도 말에 대해서 또 가르쳐주고 해서 적응하면서 살았죠.”

-소위 말하는 영호남간의 지역감정을 느꼈겠네요?

“그런 거는 아니고요. 지역감정보다는 그 나이 때는 밖에 나가면 마산여고, 마산고, 이런 인문계 애들이랑 우리랑 나누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더 크게 느껴졌지요.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죠. 공순이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요. 지역감정보다는 일반고와 우리가 다른 것에 대해서 느꼈지요.”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는지?

“제가 노란 베개를 베고 자는데 자다가 일어나보면 코피가 쏟아져있고 이런 일이 태반이었죠. 그리고 밤10시에 출근하면 아침 8시에 퇴근을 하는데 밤새 내내 일을 하는 거죠. 그렇게 하고 씻고 오전수업을 가면 너무 졸려서 수업도 못 듣고 자는 게 태반이었고 그리고 새벽 2시쯤 되면 너무 피곤해서 화장실에서 졸고 있으면 언니들이 찾으러 오곤 했죠. 밤에 잠을 못 자는 게 제일 힘들었죠. 주야간이 바뀌는 3교대로 돌아가면서 하루에 4시간씩 공부하고 했죠.”

-공부가 하고 싶어서 마산으로 온 것인데 정작 하기 힘들었겠군요?

“그렇죠. 중학교 때 나름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진학하고 보니깐 공부한 것도 아니였다 라는 생각도 들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나름 중학교 때는 전교에서 상위권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전교생 수의 거의 반 정도 되니깐 내가 너무너무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일해서 집에 돈을 부쳐 줘야한다는 생각이 더 컸죠.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죠.”

20살, 군대 간 남편 기다리며 시집살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던 데요?

“속이 없어서 결혼을 한 것 같아요. 결혼은 속이 없을 때 하든지 아니면 준비가 다 되어있을 때 하라고 하잖아요. 그때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는데 졸업하고 공장에 일하고 있는데 학교에 있을 때 나보다도 못했던 애가 관리자로 들어왔어요. 자존심이 상해서 홧김에 사표를 쓰고 나왔지요. 원래는 동생도 있고 해서 더 다니려고 했는데 그렇게 됐죠. 사표내고 직장을 다시 구하려는데 안 구해지더라구요. 에라이 모르겠다, 시집이나 가자하고 간 것 같아요. 엄마도 반대를 많이 하셨는데.”

-남편은 어떻게 만났나요?

김은경 씨와 남편 ./사진제공 이윤아

“고등학교 때 선도 부장을 하게 되었는데 반에 친구 한명이 연애만 하러 다니고 학교는 오지 않으니깐 그 친구를 찾아오라 하더군요. 매일 같이 그 친구를 잡으러 다녔죠. 그러다보니깐 그 친구가 귀찮아서 남학생을 소개 시켜줬는데 이 남학생도 우리 반 친구의 남자친구를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 되었죠. 처음 몇 번 만나다가 말았는데 나중에 졸업 할쯤에 다시 만나게 되었죠.”

-30년 가까이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데 불편했던 점도 많았겠어요?

“불편했죠. 그렇지만 제가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죠. 남편이 군대 가서 없을 때도 저는 시부모 모시고 살았지요.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새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본데가 있니, 없니를 말하는데 부모 얼굴에 똥칠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죠.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했었구요. 그렇게 살았죠.”

-시동생들도 챙겨야 했다지요?

“시부모님이 북마산에서 생선 장사를 했는데 집에 있으면서 당연히 중고등학생인 시동생들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을 했죠. 남자들이라서 그런지 밥해주면 잘 먹기도 했고 잘 해주는 만큼 시동생들도 저한테 잘 했죠. 그때가 임신해 있을 때였네요. 대학가고 군대 가고 장가가고 애 낳고 하는 거를 쭉 다 지켜봤죠.”

40대, 공부 접고 직업 전선에 서다

-결혼하고 한참 후에서야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셨는데.

“그렇죠. 애들도 초등학교 6학년, 고1정도 되니깐 어느정도 다 키웠다는 생각도 했고 더 늦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2002년에 방송통신대를 입학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17년 정도 지나서야 입학을 했네요. 원래 창원대 평생교육원에 있는 박물대를 다니면서 사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요. 방통대에는 사학과가 없어서 국문학과를 선택했죠. 책을 좋아하기도 해서 국문과를 갔는데 책 좋아하는 거랑은 또 다른 차원이더군요.”

-상담사 경력도 가지고 계시던데 어떤 계기로 상담활동을 하셨나요?

“상담은 자식으로 인해서 시작하게 되었죠. 아들이 중학교 때 반장을 했는데 그때 반장 엄마들 모임인 어머니회 활동을 하면서 우연치 않게 상담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나의 열등의식,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끄집어내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죠. 이것을 시작으로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죠. 금붕어그리기로 심리 상담하면 재미있어하고 저를 금붕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좋아했죠. ”

-상담 활동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남편 사업이 좀 힘들 때였는데 딸 급식비가 밀렸어요. 그 문제로 학교를 갔다 온 적이 있는데 딸이 저한테 ‘엄마 급식을 먹고 나면 배가 아프다. 도시락을 싸줘’라고 말해요. 순간 너무 미안했죠. 그때는 아는 사람 옷가게에서 알바하고 상담도 하러 다니고 저는 저 나름 무언가를 하고 다녔는데 딸은 속으로 병들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죠. 딸은 ‘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대학생이 된 딸도 친구들이랑 논 시간이 별로 없을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걸 하려면 알바를 해서 돈을 벌게 했거든요.”

김은경 씨와 딸 이윤아./사진제공 이윤아

-옷을 팔면서 상담 공부한 게 활용이 되던가요?

“많이 도움이 되었죠. 저희 집에 그나마 블랙컨슈머, 소위 말하는 ‘진상’이 없는 이유가 그래요. 고객이 말하면 ‘아, 그러셨구나.’, ‘그렇지요?’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면 고객들이 ‘맞지요’하면서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지요. 결국 그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제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호응 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구요. 그렇게 하면 그 고객이 지나가다가도 아는 척을 해주고 자기 주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또 옷을 사가고 그렇게들 하죠.”

‘진상 고객’들에 대해 자신만의 대처법이 따로 있습니까?

“고객들은 대접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인데요. 그 사람들에게 판매자가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서 경청하면서 설명을 해주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 줘야 해요. 뭐 저라도 그 사람들 비위 맞추는 게 좋은 것은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행동해주면 그 사람도 어느 순간 저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죠.”

-매일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 어떻게 해소 하시는 편인가요?

“친구들끼리 수다 떨고 음주가무를 하는 것인데 이제는 좀 멀리 바람 쐬러 가는 걸로 바꾸려고요.”

-좀 있으면 50대인데 어떤 50대를 맞이하는 것이 목표인지요.

“건강한 오십을 맞이 하자인데요. 그래서 다이어트를 시작했구요. 자식들이 더 크면 결혼도 할 것이고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서 떠날 것인데 내가 건강한 오십대를 맞이해서 손자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잔디 있는 마당 집에서 책방이랑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방 등을 만들어서 늙고 싶어요.”

이제 인터뷰를 끝내겠다 하니 “국문과도 나온 사람이 너무 두서없이 말한 것 같다”고 걱정을 한다. 아까 대답할 때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오직 하루하루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자는 나의 어머니 김은경 씨. 고객이 찾아오자 “어서 오세요? 찬찬히 둘러보세요”라고 얼른 인사 건네며 두말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녀가 누구보다는 ‘건강한 오십’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고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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