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850m 골짜기. 소나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드리운다. 아침 7시 창원에서 출발해 똬리 튼 뱀 같은 산길을 지나 도착한 이곳은 함양군 서하면 운곡리. 심마니산삼영농법인 정성용(59) 대표가 운영하는 산양삼 농장이다.

'지독한 산행'을 염려했던 것과 달리 정 대표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다. 하지만 그 거리가 무색할 만큼 분위기는 딴판이다. 'CCTV 감시 중' 팻말을 내건 철문을 지나자 이내 '신세계'가 펼쳐졌다.

족히 30년은 자랐을 듯한 낙엽송 수천 그루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풀잎마다 맺힌 빗방울이 한데 어울린다. 한여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늘진 숲은 시원한 바람을 몰고온다. 물기를 머금은 땅은 푹신했지만 물이 잔뜩 고인 곳은 없다. 그만큼 배수 조건이 좋다. 살짝 낀 안개는 운치를 더한다. 어쩌면 비가 내린 게 행운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산양삼을 수확·재배하고자 지은 집이 눈에 들어온다. 일꾼들이 주로 생활하는 이 집 마루에는 산양삼, 더덕 등으로 담근 술들이 전시돼 있다. 그 진귀한 모양에 눈이 팔린 사이 정 대표가 슬쩍 다가왔다. '접대·시식용'이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그의 손엔 어느새 목장갑과 두발괭이가 쥐여 있다.

   

땅에 난 모든 풀이 산양삼으로 보인다. 행여나 밟을까, 잰걸음으로 묵묵히 따르는 사이 정 대표는 '이건 5년산, 저건 7년 산'이라며 보는 대로 척척 알려준다. 지면 위로 고개 내민 푸른 잎 사이사이 밴 노란빛이 남다른 고귀함을 자랑한다. 아마 저 아래에 '진짜 귀한 몸'이 있으리라.

얼마 안 가 자리를 잡은 그가 두발괭이를 산양삼 뿌리 아래로 깊숙이 쑤셔넣는다. 뿌리가 다치지 않게 살포시 뜨더니 줄기를 잡고 흙을 털어내기 시작한다. 뭉친 흙은 손으로 떼어내고, 봄바람에 치마가 나풀거리듯 한들한들 흔든다. 투박해 보이던 손은 한없이 섬세하다. 곧 제 모양을 잘 갖춘 산양삼 한 뿌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이 작업을 모두 마치는 데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직접 저기 큰놈 한 번 캐보세요."

얼떨결에 두발괭이를 들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손이 가질 않는다. 쭈그리고 앉아 어설픈 괭이질도 해보지만 '목표'와는 한 뼘 이상 떨어져 있다.

"좀 더 옆으로. 이 밑에 푹 넣었다 올리면 됩니다."

마음이야 당장에라도 '심봤다'를 외치고 싶으나 생각 따로 손 따로임을 어찌하리오. 그래도 '잘하고 있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두발괭이를 옆으로 옮겨 본다. 그제야 슬며시 보이는 뇌두. 배운 대로 산양삼 줄기를 잡고 흔들어 본다. 하지만 봄처녀처럼 여린 뿌리는 말뚝이 박힌 것처럼 묵직하다.

'두둑.' 절대 잔뿌리는 아닐 터. 그저 '잡풀'이 산양삼을 시샘하는 소리라 여긴다. 다시 살짝살짝, 괭이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갓난아기 다루듯 조심 또 조심.

"오늘 내도록 못 캐겠는데요?"

선배의 짓궂은 농담에 대표님께 도움을 요청해 본다.

"거의 다 캤네요. 이제 여기서 이렇게…."

그의 손이 닿은 지 3초 만에 산양삼 한 뿌리가 나온다. '신의 손길'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게다가 마무리는 기자 몫으로 남겨준다. 살포시 들어 흙을 털어내자 고귀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 정도면 거의 최상급입니다. 잘했습니다."

괜히 어깨를 으쓱한다. 졸인 마음이 아깝지 않다. 잔뿌리 하나하나 감상하기에 바쁘다. 생긴 게 참 곱다. 문득 그 모습이 '여자 마음' 같다고 여겨진다. 보일 듯 말듯, 마음을 줄듯 말 듯한 것이 얄밉지만 사랑스럽다.

현장 100℃. 사랑에 빠진 마음을 닮고 심마니들 정성이 더해진 온도. 함양 산양삼은 38.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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