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오른다 처음 산에 안겼던일곱살 아이 모습으로

덕유산과 지리산 가장자리가 만나 깊은 골을 이룬 함양군 서하면 운곡리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아침부터 잠깐씩 비가 뿌렸고, 비가 쉬는 틈을 비집고 매미소리가 덮치곤 했다. 18년째 여기 터를 잡고 삼을 키우는 정성용(59) 씨는 심마니다. 지금에야 심마니산삼영농법인 대표라지만, 일곱 살부터 약초꾼을 따라 덕유산, 지리산 곳곳을 다녔다.

"70~80 먹은 약초꾼과 땅꾼들이 산에 갈 때마다 하얀 쌀밥을 싸 주기에 그게 좋아서 따라다니기 시작했죠. 독사 한 마리 잡으면 20원, 비싼 독사는 400원씩 받았으니 괜찮았죠. 당시 웬만한 월급이 3000원이었으니…."

그때 이후로 제 밥그릇을 스스로 채워 살아온 그는 이제 이름난 심마니다. 3일 전에도 인근에서 산삼 다섯 뿌리를 캤다. 휴대전화로 찍은 당시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강원도 가면 심마니들이 나를 '왕초'라 부릅니다. 한 번은 함께 산에 올랐는데, 한 나절에 150여만 원어치를 캤더니 안 믿더군요. 그래서 믿게 하려고 다음날 또 캐왔더니 그제야 인정하더군요."

   

삼을 찾아 전국을 떠돌던 그는 한때 서울서 정착하기도 했다. 스무 살, 남들처럼 살아 보고자 상경한 그는 세운상가의 풍로(곤로) 공장에 취직한다.

"당시 곤로는 일본제품밖에 없었는데, 그거 조립하고 심지 갈아 끼우는 일이었죠. 근데, 월급이 고작 3000원이더군요." 산을 떠나온 기회비용 치곤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그는, 일주일 만에 어깨너머로 조립기술을 익혀 공장을 나왔다. "공장을 나와 곤로 심지 갈아 끼우는 일을 했는데, 처음엔 실수도 많았죠. 하지만 곧 손에 익어서 나중엔 하루에 6000원씩 벌기도 했죠." 그러기를 2년, 한창 수요가 늘기 시작한 선풍기도 함께 다루면서 제법 돈을 모아 전자 대리점을 차렸다. 직원도 여럿 두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석유냄새 밴 자신의 손이 낯설었을까? 제법 살 만 했지만 그는 산에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한 달 정도 민박집에 머물며 오대산엘 다녔어요. 한적한 민박이었는데, 내가 매일 이런 저런 약초들을 캐 와서 나눠 주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들더군요. 그러면서 민박도 잘 되고, 주변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을 보니, 아… 참 보람 있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망태에 괭이 하나, 믿을 것은 산과 하늘. 그리운 품을 찾아가듯 그 곳에 안기고 나면 사람들의 행복으로 보상 받는 일. 그는 더 늦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18년 전, 그가 귀향을 결심한 이유다.

"처음엔 실패도 많이 했죠. 그게 다 '크게' '많이' 하려고 욕심을 부린 탓이죠. 흙에도 여유를 줘야 하고, 낙엽도 있어야 하고 자연이 허락한 만큼 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잘나가던 일을 접고 마주한 실패를 예사로운 일인 듯 회상하는 그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마니들은 그보다 더한 생명의 위험과 자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17년 전쯤이었죠. 독사에 물려 급히 해독제를 맞았죠. 그런데 독이 어찌나 강했던지 오른쪽 눈이 심하게 부어 앞을 볼 수 없었죠. 그래도 괜찮겠거니 하고 다시 산엘 갔다가 그만…."

10m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던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그 '찰나'의 시간이 천천히 흘렀고, 마음은 잔잔해졌다. "막상 죽겠구나 생각하니, 맘이 평온해지면서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도 말이죠."

절벽 끄트머리의 소나무에 걸려 기적적으로 살아온 그는 이제 나이 들어 산에 오르는 것이 부담스럽다. "3~4분쯤 후에 깨어나 피투성이 몸으로 절벽을 기어올라 왔죠. 지금 하라면 못 할 일이죠."

정 대표와 함께 일하는 양승거 씨.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양승거(55) 씨의 표정이 진지하다. 20년 전 정 씨의 전자대리점에서 일한 인연으로 1년 전 귀농했다. 새벽 네 시 새소리에 잠 깨는 일이 요즘 행복이라 말한다.

산을 학교 삼아 다녔지만, 정 씨는 공부도 곧잘 했다. 중학교 진학을 권유하기 위해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기까지 했지만, 그는 산에 남았다. 후회는 없다지만,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리가 없다.

"양 씨에게도 그렇고,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 1년 정도 와서 일 하면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제 아들도 곧 귀농할 예정입니다."

그와 대화하는 동안 전화 수신음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삼을 찾는 사람, 감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인데, 전국 각지에서 연락이 온다. 통화 중인 그의 뒤에 2010년에 캔 150년 된 산삼이 있다.

"멧돼지가 뛰어와 나를 덮치는 꿈을 꾸고 이 삼을 캤죠. 가격이 안 맞아서 팔지 못 하겠더군요. 그래서 술에 담갔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사이 비가 멎었고, 구름들이 지리산 쪽으로 물러났다.

"비도 그쳤으니, 산양삼 보러 갑시다. 사실, 방송에서도 여러 번 왔는데, 부담스럽죠. 다른 농장도 많은데." 산에 오르는 뒷모습만 봐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는 간혹 처음 산에 오르던 일곱 살 아이로 보이기까지 한다.

"크고 두껍다고 좋은 삼이 아닙니다. 낮은 온도와 바람, 습도를 이겨 차곡차곡 단단하고 작게 여물어진 것이 좋은 삼입니다. 밭에서 약 쳐서 재배한 삼과는 비교할 수 없죠." 좋은 삼에 대해 설명하는 그는 산삼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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