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많은 세상 탈 만들며 탈 없는 세상으로…

탈은 ‘한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이며, 탈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극이나 춤을 펼치는 탈놀음은 우리의 민족정신과 시대상이 녹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경남 진주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명맥이 끊길 뻔한 탈놀음 ‘진주오광대’를 지켜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 진주오광대 전수교육조교이자 공방 ‘광대탈방’을 운영하는 탈 제작자 황병권 씨를 만나 탈과 함께해온 삶을 소개하려 한다. ‘탈 많은 세상, 탈 없이 살아보세!’ 라는 광대탈방의 인상적인 표어처럼 그는 인터뷰 내내 정중하고 ‘탈 없는’ 사람이었다.

진주 진양호 공원 내에 위치한 진주오광대 전수교육관은 맑은 공기에 초록 경치가 더해져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황병권 씨는 20대부터 40대인 지금까지 탈을 만들어 왔으며 시작부터 지금까지 늘 진주오광대와 함께였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진주오광대 복원에 참여하고, 탈 만드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짐작 할 수 없었다.

‘진주오광대탈’을 만나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인 진주오광대는 진주 지역에서 전승해오던 탈놀음이다. 1930년대까지 전승되었던 진주오광대는 우리의 민중의식이 담긴 문화라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명맥이 유지되지 못했는데, 계속된 전승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98년 복원공연에 성공하였다.

/사진 박일호 기자

황병권 씨는 96년도 대학교 4학년 때 탈을 처음 만들었다고 했다.

한창 젊고 에너지 넘쳤던 그 때, 탈과 진주오광대는 한 축제를 통해 그의 삶에 들어왔다.

황병권 씨는 ‘진주탈춤한마당’에는 선배들 꼬임에 빠져 참여하게 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총학생회 일을 하고 있을 때 선배들 부탁으로… 96년 제1회 진주탈춤한마당 탈 제작으로 합류했어요. 개막식 날, 열림굿이라고 하죠. 열림굿에 ‘조선천지탈 행렬’이라 해서 탈을 50개 정도? 쓰는 탈이 아니라 대형 스티로폼으로 만든 그런 탈을 만들었어요. 그때 처음 작업을 하고, 다음 해에는 그걸 수리하면서… 97년에 진주오광대 복원모임이 만들어졌고 탈 제작을 제가 맡게 되었어요.”

96년도 진주탈춤한마당에서 그는 탈을 처음 만났고, 97년에 제2회 진주탈춤한마당 학술심포지엄에서 진주오광대 복원가능성이 학술적으로 논의되어 제1회에 참여했던 참여자들이 자연스럽게 복원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복원모임을 꾸리게 되었어요. 공연을 하려면 의상, 소품, 탈, 연희할 사람 다양하게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탈을 만들게 되었어요. 아니 흉내를 냈어요. …저희가 진주오광대 탈 사진은 몇 컷을 가지고 있었어요. 1930년대 것. 당시에 연희대본은 4종류가 남아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해오던 탈 17점이 있었고, 연희를 하셨던 생존자가 한 분 계셨어요. 그 자료들과 증언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했어요.”

황병권 씨 에게 탈 만드는 법을 어떻게 배웠냐고 묻자 ‘배운 적이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게 인제 도제교육? 그럴 선생도 없었고 저 같은 경우는 부산 동래에 탈 만드시는 이 석금 선생님이 계세요. 창작탈에 관해서는 전국에서 손꼽히세요. 맨날 술 사들고 가서 둘이 얘기하고 작품 쳐다보고 그게 다였어요. 술이 이만큼 되도록 마시고는 메모를 하고….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해보는 거에요.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안 되면 한 두어 가지 물어보고…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해요.’라고 기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안 가르쳐 주실 분은 아닌데 그걸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이제 출발이고 이분은 벌써 한 20년 해오신 분인데 기법이라는 건 길어야 1년이면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지만 그 20년의 세월을 그냥 그렇게 숟가락 들고 퍼올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렇게는 하지 않았어요. 물론 나중에 저도 누군가 ‘해보고 싶다’라고 하는 분이 있어도 다는 안 퍼줄 것 같아요. 스스로 터득해 가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전통탈과 창작탈?

탈종류를 굳이 나누려면 수많은 분류 기준을 만들 수 있다. 제작시기, 용도, 재료 등… 하지만 ‘탈초짜’의 관점에서 탈을 크게 전통탈과 창작탈 두 종류로 구분한 후 둘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사진 박일호 기자

“그게 애매한 게 학자들 관점인데 그렇게 분리를 하는 거죠. 전통탈은 옛날부터 전해져오던 방법, 모양 등으로 만들어왔던 것이고, 창작탈 같은 경우는… 예를 들면 요즘 창작 마당극 작품들을 만들잖아요. 거기 맞는 탈을 따로 제작하는 거죠. 대부분 제가 하는 작업은 민족극 단체가 하는 공연이 많아요. ‘민극협’이라고 해서 그 쪽 단체들 작업을 제가 많이 했죠. 배역에 맞게 생각하고 만들죠. 근데 엄연히 말하면 전통탈도 창작탈이죠. 정월보름에 공연을 하고 만든 탈을 다 태웠어요. 그러다보니 또 만들어야 되니까 또 창작이죠. 똑같은 건 안 나오니까요.”

황병권 씨는 전통탈의 모습과 조형방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계승․유지만이 보존회의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문화재란 이름으로 낙인찍힌 이후부터는 손을 못 대잖아요. 근데 전 바꿔버려요. 지금 저희 탈도 두․세번 바꿨어요. 저희 탈 재질이 평면 종이하고 바가지에요. 평면이 너무 재미가 없는 거에요. 입체로 바꿔버렸어요. 재질은 같은 데 형태가 바뀌어버렸죠. 왜 그랬냐하면 저희 진주오광대가 60년 만에 복원인데, 1934년에 공연을 하고 공연을 쉬었어요. 중간 중간 영남예술제때 간단히 한․두 번 했었고… 1934년 공연도 20여년 만에 부활공연이었어요. 1914년이 마지막 공연. 그러다보니 이 탈도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1934년에 공연하고 난 탈을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만약에 문화재란 이름의 틀 속에 안 집어넣고 흘러왔다면 아마 탈들이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탈의 가치 재조명되어야

탈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좋다. 따로 감상하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알아두면 좋을 듯했다.

/사진 박일호 기자

“보통 창작 작품의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다 담을 수가 없는데… 그 캐릭터 자체를 뭉퉁거려서 가장 대표되는 성격 하나만 탈에 집어넣죠. 가장 사람성격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부위가 눈과 입. 거기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또 이게 입체잖아요. 그림같은 건 정면에서 많이 보는데 탈은 평면이 아니라 보는 위치에 따라 표정이 많이 바뀌어요. 그래서 다양한 각도, 다양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게 좋아요.”

독특한 조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탈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황병권 씨의 탈은 공연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전, 기획전 등 전시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탈을 그 자체보다는 극이나 탈춤에 사용되는 모습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탈 제작자가 체감하기에 탈의 작품 또는 공예품으로서의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지금 탈은 소도구화 되어 있는 느낌이에요. 지금에서야 그런 얘기들이 좀 나오는데… 탈춤이 왜 탈춤일까요? 탈 안 쓰면 탈춤 아니잖아요. 탈이 오히려 이름엔 부각되어있는데 사람들 인식은 춤이 더 부각되어 있어요. 춤도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탈놀이에서 그 개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나싶어요. 그래야 탈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정리될 듯합니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거기서 공예상품화 쪽으로 일을 좀… 공예진흥원하고 하셨던 분이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공예’라고 코드명을 매겨놓고 거기에 대한 내역들을 정리를 하셨더라고요. 근데 탈이 없는 거 에요. 그래서 물어봤죠. 어떤 근거로 이렇게 정리가 되었냐고.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것’들 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왜 탈은 없냐고 하니 자기네들도 대답을 못하는 거 에요.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요. 탈이 목공예인지, 뭔지 개념도 안 잡히고, 그래서 우선 그것부터 정리가 돼야 되지 않나 싶어요.”

목소리에 은근히 섭섭함이 배어나왔다.

“…그렇다보니까 무형문화재에서도 탈제작으로 예능보유를 하신 분이 딱 한분 계셨어요. 천재동 선생님이라고 부산에 동래탈 제작하셨던 분인데 돌아가셨어요. 우리 민족정신을 표현하는 그런 문화인데 그 분 이후로 없어요. 한번은 제가 전문위원한테 물어봤어요. 탈은 왜 안 되냐. 그러니까 학자들 입장이 ‘소품’이라고… 탈춤에서 탈이 그렇게 소품이면 왜 탈춤이라 그러냐. ‘춤탈’이라 그러지 그냥 그러고 만적도 있어요. 아마 그 부분이 제일 숙제일 것 같아요. 저도 요즘 들어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예전 민속학자들이 정리한 것들이 고정화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바꿔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전국에 작업하는 사람 중에 제가 제일 어린데… 손꼽을 정도지요. 안 계세요. 특히 창작은 안하죠. 거의 없어요.”

탈을 해보겠다는 사람이 아직 없어 공방 ‘광대탈방’도 혼자 꾸리고 있다고 말하는 황병권 씨지만 탈 제작자로서 바라는 것은 크지 않은 듯 했다. 당연히 이미 되었어야 하는, 탈의 자리를 제대로 잡아주는 것.

아직도 작업할 때 새로워

황병권 씨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통탈을 제작․증여하고, 탈 전시회를 열어 대중들에게 탈을 선보이고, 극에 사용되는 창작탈도 만든다. 개인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안나빠지기만 하면 돼요. 그냥 열심히 해가는 거죠. 늘 작업할 때마다 새로워요. 똑같은 스케치를 해도 마무리 해놓고 보면 달라요. 따로 계획잡고 있는 건 없어요. (웃음) 하던 대로 손에 힘 빠질 때까지 해야죠.”

/사진 박일호 기자

인터뷰 중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딸이 깨어나 인터뷰 장소로 데리고 왔다. 10년 여 만에 얻은 아이라고 말하며 안아올리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계획이 필요할리 없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박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없는 길을 택한 이들이 있기에 우리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황병권 씨는 탈 제작자가 된 이유를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가 되어서 놓지 못하게 되었다’ 정도로 겸손하게 말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탈을 놓지 못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덤덤하게 탈과 함께 해온 시간을 얘기하는 황병권 씨에게서 의지와 끈기가 느껴졌다. 그에게 탈을 만드는 일은 분명 천직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