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중풍 명의로 소문나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자리한 창생한의원은 ‘중풍’을 잘 다스리기로 이름나 있다. 그리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진송근(63) 원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보였다. 그리 들려줄 만한 얘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연이은 요청에 결국 승낙했다. 진 원장은 한창 진료할 시간에 어렵사리 시간을 빼 주었다. 다행히 비 오는 날이라 평소보다 환자는 덜했다. 진 원장은 처음 대면한 나를 구면인 듯 편하게 맞아주었다.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산송장을 일으켜 세우다

진송근 원장은 책상에 있던 재떨이를 꺼내 들었다.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그래도 ‘창생한의원 개원기념 1978.04.05’라는 글은 선명히 남아 있었다. 35년 전 마산 산호동에서 한의원을 열 때 만든 기념품이다. 하지만 진 원장은 앞서 1년 전 진해에서 먼저 개원했었다.

“당시 진해에 유명한 한의사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진해 쪽에 자리가 비게 돼 개원하게 됐죠. 그 당시 창원 동읍에서 출·퇴근하느라 애 많이 먹었습니다. 버스 타고 마산 극동예식장까지 와서는 여러 명이 합승한 택시로 진해까지 가고는 했어요. 늦게까지 일하면 통행금지 걸리고 하던 시절이었으니 어려움이 많았죠.”

진송근 원장과 대화 중인 필자./박민국 기자

대학을 막 졸업한 27살 초짜 한의사였지만, 진해에서 ‘명의’로 소문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풍으로 고생하던 아주머니를 낫게 한 것이 계기였다.

“진해중앙시장에서 옷 팔던 아주머니였어요. 중풍으로 쓰러져 양방으로 치료했는데 효과를 못 보고 계속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녔나 봐요. 그러다 저한테 오셨습니다. 그리고 딱 10일 만에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기 시작했죠.”

그럼에도 진 원장은 진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창원 동읍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결국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새 장소를 물색하다 지금 자리한 마산 산호동 쪽에 터전을 마련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때였다. 생각대로 목이 좋았다. 여기다 진해서 소문 듣고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사람 발길 뜸할 틈이 없었다.

진 원장에 대한 입소문은 또 하나 더해진다.

이 대목에서 진 원장은 1978년 환자 기록을 들춰냈다. 오래된 자료지만 서랍 깊숙이 보관하고 있지는 않다. 언제든 볼 수 있게 책상 위에 두고 있다.

진송근 원장./박민국 기자


“당시 거제 지역에서 뇌염모기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제가 중풍 쪽으로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환자 가족이 저를 찾았습니다. 어린 학생이 환자였어요. 가족은 큰 기대 없이 곧 죽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죽으면 인근 공동묘지에 바로 묻겠다며 삽까지 들고 왔으니까요. 저도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우선 인근에 여인숙을 잡게 하고, 치료에 들어갔죠. 그렇게 한 달 정도 돌보니 차도가 있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거제 쪽에 소문이 퍼져 배 타고 찾는 이들이 몰려들었던 거죠.”

그러면서 진 원장은 ‘중풍 명의’로 이름을 확고히 했다. 경남 외 지역에서도 찾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궁금증은 ‘왜 하필 중풍 쪽이었을까’로 이어진다.

“대학 4학년 때였어요. 추석 전날이었는데, 할머니가 콩나물을 다듬다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어요. 그때 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내 할머니 병도 못 고치면서 무슨 한의사가 되겠느냐’고 말이죠. 그래서 중풍에 대한 서적은 모조리 사서 공부했죠. 중풍 공부는 그때 다 했다고 봐야죠.”

중학교 때 몸으로 경험한 한의학

창원 동읍이 고향인 진송근 원장은 7남매 가운데 장남이다. 신방초등학교-창덕중학교-용마고등학교(옛 마산상고)-경희대학교 한의대를 나왔다.

진 원장이 한의학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중학교 때였다.

“어린 시절 관절염을 앓았습니다. 양방 병원을 드나들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죠. 그러자 할아버지가 한의원으로 데리고 가셨어요. 스스로 놀랄 일이었어요. 보름 만에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거든요. 한의학이 제 머릿속에 각인된 계기였죠.”

하지만 학창 시절 진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법률가 쪽에도 뜻이 있었고, 상대 쪽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3 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재수를 택했다. 다시 1차로 법대를 지망했지만 떨어지고, 2차 한의대에 합격했다. 한의사가 되길 원했던 가족, 특히 누나들은 크게 환영했다.

한의학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적성에 잘 맞았다. 공부가 재미있으니 성적도 훌륭했다. 서울서 함께 방 쓰던 룸메이트가 특히 공부벌레였다. 그 덕도 좀 봤다. 그러면서 대학 내내 장학금을 탔다.

진송근 원장./박민국 기자

진 원장은 이미 대학 졸업 이전부터 사람들 몸을 돌봤다.

“군대 방위 시절 점심때가 되면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제가 한의학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죠. 절 보고 찾아왔으니 어떡해요. 면사무소 숙직실에 사람들 눕혀 놓고 몸을 돌보고 그랬죠. 한번은 면장이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며 한마디 하자, 오히려 주변에서 저를 변론해 줬어요.”

의료봉사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진 원장은 배짱에서도 웬만한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한 초등학생이 위경련으로 졸도해 업혀 왔어요. 그때 지도 교수님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고 때문에 ‘손대지 마라’고 하셨어요. 그렇다고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있나요. 제가 나서서 손을 보니까 20분 만에 깨어났어요. 결과가 좋으니 교수님도 별말씀 없으셨죠. 죽은 아이 살렸다 해서 다음날 새벽부터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서로 진료받겠다고 밀고 당기다 유리창까지 깨지고 그랬죠.”

진 원장은 개원 후 환자를 돌보면서 석·박사 학위를 땄다. 1987년부터 1998년까지는 대구에 강의를 나갔다. 구마고속도로가 편도 1차선이던 때라, 앞에 대형트럭이 있으면 속도를 내지 못해 강의 시간에 늦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다고 환자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다. 환자들이 계속 찾을 때는 진료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문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진료해달라고 아우성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배달 밥으로 겨우 저녁 끼니를 때워가며 환자를 돌봤다.

스스로를 위한 시간은 꿈도 못 꿨다. 지인들은 진 원장에게 ‘저녁에 대포도 한잔하고 그래야지, 왜 그리 사느냐’는 핀잔도 줬다. 진 원장은 ‘이것도 다 한때다. 할 수 있을 때 그냥 하는 것’이라며 응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향 어르신 위해 15년째 무료진료

어느덧 진 원장 나이도 예순을 넘겼다. 더 많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 몸도 챙겨야 할 나이다. 담배는 하지 않지만, 술은 곧잘 즐긴다. 20년 가까이하고 있는 골프는 요즘도 매주 거르지 않는다. 올해 경남한의사회 골프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젊은 시절부터 서예에 취미를 둬 지금까지 즐긴다. ‘창생한의원’이라는 이름은 진 원장 스스로 지었다. 이 이름에 대해 스스로 뿌듯함을 감추지 않는다.

“‘널리 사람을 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이름 짓고서 한학 하시는 어른께 말씀드리니 ‘젊은 사람이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칭찬해 주시더군요. 하하하.”

진송근 원장./박민국 기자

한의원 가운데는 대를 잇는 곳도 적지 않다. 진 원장은 아들만 셋이다.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진 원장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좀 묻어난다.

“권유도 해보고 했는데, 스스로들 뜻이 없으니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진 원장은 사회활동도 왕성히 하고 있다. 경남한의사회장을 역임했고, 마산학봉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보훈처와 협약을 맺어 보훈 가족을 대상으로 진료비 감면도 해주고 있다.

진 원장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강하다.

고향 동읍을 중심으로 한 <동창원신문> 발행인이기도 하다. 지인 부탁으로 맡게 됐는데, 고향 소식을 출향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

무료 진료활동에는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15년 전에 모친이 돌아가셨어요. 노인대학에 함께 다니던 친구분들이 문상 오셔서는 ‘좋은 친구를 잃어버렸다’며 탄식하시더라고요. 그때 그분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매달 한번 65세 이상 동읍 어르신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진송근 원장 가족 사진./박민국 기자

창생한의원은 한때 한방병원이기도 했다. 입원병실 30실 이상 갖춘 시설이었다는 의미다. 10여 년가량 했지만, 운영상 어려움이 있어 지금은 다시 한의원으로 되돌렸다. 요즘은 최신 의료기계를 사용하는 곳이 많다지만, 그래도 진 원장은 사람 손과 정성을 따라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긴 역사를 자랑하다 보니 오랜 기간 찾는 이도 많다.

“30년 전 마산수출자유지역에 다니던 아주머니가 지금 여든 살 넘어서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딸, 손자·손녀까지 연결돼 찾는 경우가 많죠.”

진 원장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환자와 함께하겠다는 생각이다.

“한의원을 찾은 분들과 늘 충분히 대화하려 노력합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에서 특출난 처방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환자를 대하는 정성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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