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멸시의 세월 견뎌내고 고향찾은 재일교포 2세들

일제 강점기 건너간 재일동포들은 인생사나 가족사에 굴곡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강제노역 등 일제에게 끌려간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 남북 대립이 심해지면서 겪게 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또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국적을 바꿔 일본으로 귀화만 하면 겪어도 되지 않을 어려움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재일동포 2세들이 4월 21일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이 있는 마산으로 왔다. 이상재(62·일본 교토시) 씨 일행이다. 남자 셋 여자 넷 모두 일곱 사람이었다.

앞서 이 씨는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사회적 기업인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에 자기들 고향 탐방을 기획하고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딴에는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이들과 의논해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고향을 중심으로 일정을 꾸리고 일행을 맞았다. 탐방 지역은 고향 마을(임곡리·봉곡리·곡안리)과 둘레 역사유적지였다.

   

굴곡진 역사만큼 복잡한 재일동포 국적

2007년 현재 일본의 외국인 등록 현황을 따르면 재일동포는 59만3489명으로 재일외국인 가운데 재일 중국인에 이어 두 번째인 27.6%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국적으로 있다가 귀화한 사람(생존자 기준, 전체 귀화 인원은 재일본 대한민단 통계를 따르면 1952년부터 2011년까지 33만2206명)이 17만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만큼 전체를 합하면 70만 명 규모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대한제국 신민은 모두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국적이 바뀌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이들의 국적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이태 뒤인 대일본제국 헌법 부칙에 따라 이들의 국적은 조선적으로 바뀌었다. 경술국치 이전 상태로 일본이 제멋대로 돌린 셈으로, 쉽게 말하자면 남쪽 대한민국도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너희는 조선 사람’이라고 이른 셈이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뒤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꿀 수 있게 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은 일본이 아직 수교를 하지 않은 상태라 무국적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재일동포 국적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으로 나뉜다. 말하자면 조선적 재일동포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았을 뿐이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은 아니다.

재일동포 본적을 보면 경남이 가장 많다 재일본 대한민단 2005년 통계를 보면 전체 59만8687명 가운데 경남 출신이 17만2343명으로 비중이 28.8%에 이른다. 아무래도 일본과 가깝다는 사정이 크게 작용했겠다.

   

해방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재일동포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썼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200만 명 가운데 140만 명이 대부분 남쪽 그리고 소수는 북쪽을 골라 갔지만 생계·정치 문제 등으로 그대로 남은 사람도 많았다. 또 1948년 제주도 4·3사태와 여순사건, 1950년 한국전쟁 등으로 목숨 부지조차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밀입국한 사람이 많았다. 1954년 제정된 경범죄처벌법 적용 대상에 밀항이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그와 같은 밀출·입국이 잦았음을 일러준다. 지금이라면 무겁게 처벌을 받겠지만….

여자형제 넷과 그 남편들인 고향 방문 일행

모두들 조금씩 우리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상재 씨가 가장 잘했다. 이씨는 “한국말을 잘 할 줄 몰랐는데 어른이 된 다음 일부러 배워서 지금처럼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일행을 소개했다. 여자 네 명-이영자(64)·영순(62)·수자(59)·지자(56) 씨는 모두 형제였고 남자 셋-김보광(69)·전삼조(66)·이상재 씨는 남편들이었다. 남편들 가운데 넷째 동서는 일이 있어 동행하지 못했다는데, 이 씨는 자기가 동서인 남자들 가운데 셋째라 했다.(다섯째 부부와 여섯째도 있는데, 이번 걸음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날 부산에서 묵고 21일 마산으로 왔는데 일제 강점기 이른바 적산 가옥이 남아 있는 두월동의 함흥집에서 냉면을 점심으로 먹었다. 2000년 7월 불타기 전에는 함흥집도 적산 가옥이었으며 바로 위에 있는 집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 적산가옥이라 일러줬다. 일대를 신마산이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던 곳으로 위쪽 제일여고에는 지금도 신사 자리가 있으며 길가 벚나무도 당시 심었다는 설명을 듣기도 했다.

   

“아내 어머니 고향이 진전면 봉곡리이고 아버지 고향도 가까운 임곡리입니다. 아버지 이시한(李時漢)은 1920년 생이고 어머니 이두수(李杜洙)는 1926년 생입니다. 또 호적에는 혼인 신고를 한 날짜가 해방 전인 1943년 3월 29일로 돼 있는데 일본에서 했는지 고향에서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첫 일정으로 진해현 관아를 둘러보고 돌아나오는 길에 이상재 씨가 말했다. “장인·장모 고향집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해요. 가까운 비슷한 데라도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좋지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째 동서였는데, 일행 가운데 한 명이 점심 먹는 식당에서부터 막걸리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서 진동현 관아에서 내릴 때는 막걸리를 들고 있지 않았는데 임곡리 장인 고향에서 내릴 때는 막걸리를 다시 들고 있었다. 막걸리를 좋아해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차례로 둘러본 고향 마을 임곡·봉곡·곡안리

일행은 안내를 따라 아버지 이시한의 호적에 나와 있는 고향집 출생지인 임곡리 492번지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찾아 들었다. 대문 기둥은 남아 있었지만 문짝은 있지 않았다. 안쪽은 고랑을 타고 마늘을 심어놓았을 뿐 빈터였다. 대문 들머리 한켠에는 오래 된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감나무 밑동 굵기를 보니 꽤 오래된 나무 같다. 이 나무는 아버지 모습을 지켜봤을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더니 일행 가운데 한 명이 까맣게 반들거리는 조약돌이 든 비닐봉지를 하나 끄집어냈다. 감나무 바로 아래 흙을 파더니 돌아가면서 봉지에서 조약돌을 몇 개씩 끄집어내어 조그만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가져온 막걸리를 조그만 잔에 부어서 그 위에다 뿌리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들고 온 까닭을 그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조약돌을 집어넣고 막걸리를 뿌린 위로 흙을 다시 집어넣어 다지는 여자형제들은 다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 뒤로 집이 한 채 더 있었다. 야트막하게 산을 배경으로 삼아 대숲이 뒤를 받치고 있고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뒤에 있는 집은 멀리서 봐도 옛날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살았음직한 집 모양이다.” 때마침 그 집에서 사람이 나오기에 ‘일본에서 부모 고향집을 찾아왔다’고 사정을 얘기하고는 잠깐 들어가 봐도 되겠느냐 물었더니 사람이 안 사는 집인데 자기도 관리 차원에서 잠깐 들렀다 가는 길이라며 마음껏 둘러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자형제와 남편들은 애잔한 눈길로 각진 기둥이나 대청마루를 쓰다듬고 우물 자리도 둘러보고 방문도 열어보고 했다. “일본 아버지 집에도 이렇게 대숲이 있고 산이 있고 들판이 보였다. 아버지가 고향집을 많이 떠올렸나 보다.” 그러고는 집을 뒤로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어머니 고향집이 있었던 봉곡리 도산마을로 향했다. 마을회관에 들러서 70년 가량 전에 옆동네 임곡리로 시집 간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한 할머니가 기억해 냈다. 택호가 ‘대바구댁’이라고 했다. ‘대바구’는 도산마을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하지만 호적에 적힌 출생지(봉곡리 188번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지번이 분할되는 바람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텅 비어 있는, 분할되기 전 지번을 통째로 눈에 담고는 마을 당산나무가 있는 데로 돌아나왔다. 일행은 나지막하지만 가파른 언덕배기를 힘들여 올라 당산나무 앞에다가 좀 전처럼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비닐에서 꺼낸 조약돌을 몇 개씩 집어넣고는 막걸리를 부었다. 몇몇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냥 조약돌이 아니라 일본의 아버지 어머니 무덤에 깔려 있던 돌이었다. 부모 두 분은 생전에 고향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고향을 찾는 마지막 여정은 곡안리였다. 이상재 씨 아버지 고향이 여기였다. “결혼할 때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아내 고향이 바로 제 고향 옆이었어요.” 여지껏 남아 있는 마을숲을 둘러보고 옛날 돌담길을 거닌 다음 산기슭에 붙어 있는 성주 이 씨 재실로 올라갔다. “아버지 무덤이 저쪽 위에 있기는 한데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안 돼요. 오늘은 여자들을 위한 날이야.”

   

“한국 국적으로 살려면 차별·멸시 각오해야”

곡안리에는 슬프고 아픈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11일 새벽 곡안 마을 사람 150명 가량이 피란와 있던 여기 재실을 향해 미군이 기관총으로 사격해 86명이 숨지도록 만든 이른바 미군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이상재 씨는 자기 친척도 해코지를 입었다 했다. 이 씨는 이태 전에 이 학살 사건을 처음 알게 됐다. 최초 보도는 1999년 9월 경남도민일보가 했다.

이 씨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일행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총탄 자국이 뚜렷한 우물 콘크리트 둘레를 보여주니 모두들 소리를 지를 정도로 깜짝 놀랐다. 뒤에 나올 때 여자형제 가운데 한 명은 오면서 꺾었던 자운영 꽃 한 송이를 우물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 씨는 경남도민일보의 보도를 두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했다. 80년대는 몰라도, 90년대 후반에는 가능한 일이었다며 용기가 꼭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나 이 씨는 손사래를 쳤다. 예상되는 피해를 무릅쓰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일본 사회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한국 사람임을 숨기지 않고 살면서 깨친 이치라는 얘기였다.

이 씨와 일행은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다만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고만 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렇다고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민족의식이 뚜렷해 재일동포 2세 자식들을 한국인으로 키우셨다고 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요즘 보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경화 바람이 이미 거세져 있는 일본에서 한국인은 죽여도 되고 강간해도 되는, 냄새나는 열등한 인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귀화를 한다. 귀화를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래서 재일동포 2세는 대부분 귀화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같은 2세인데도 이 씨와 일행은 귀화를 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넷째 내외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귀화를 했다고 했다. 이 씨 등은 특히 한글에 대한 자랑과 자부가 대단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뛰어났다. 허투루 들은 내용이 아니고 책을 읽거나 해서 깊이 공부해야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었다.

한국 정권 안보에 악용되면서도 국적 못 버리는 까닭

재일동포에 대한 핍박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도 주어졌다. 정권 안보 차원에서 걸핏하면 터져나왔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이 그것이었다. 일본에서는 특별한 제약 없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북한에 다녀왔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때로는 그런 건더기도 없이 남한에 유학 와 있는 젊은 재일동포 2세 청년들을 붙잡아다 고문하고 징역을 살렸다.

1971년 터진 서승·서준식 재일동포 형제 유학생 간첩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 해 전 북한에 갔다왔다는 이유만으로 붙잡아 수사했으나 증거가 모자라 갖은 고문을 했고 그 잔인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형 서승이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를 안고 뒹굴었다. 서승은 지금도 얼굴에 흉터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고도 형제는 감방살이를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국적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 안보를 위해 악용하는 정부가 행여 밉지는 않았을까?

“민주주의 거꾸로 하고 독재하고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심심하면 터지는 것 일본에 있으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정권은 그렇지만 민족은 사랑합니다. 민족애, 민족의식 이런 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내 뿌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는 지키고 살아야 하잖아요?”

고향 역사도 되새기면서

이상재 씨 일행의 이번 고향 나들이가 대단해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 데 모여 비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들꽃과 같은 느낌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집안 한 가족이 한꺼번에 통째로 이렇게 ‘뿌리’를 찾아오기는 누가 뭐라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이들은 고향만이 아니라 지역 역사유적까지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갔다.

임곡리 들머리 있는, 김구 선생이 환국 후에 가장 먼저 찾은 묘소였던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 무덤과 죽헌 선생을 비롯해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일제 강점기 신식 교육과 민족운동의 근거지였던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景行齋)를 들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592년과 1594년 두 차례 승리를 거둔 당항포해전의 현장인 진전면 속개 마을을 지나 고성군 동해면에 들어가,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침한 일본 함대 주력이 숨어 있던 고성군 동해면 진해만 앞바다에도 머물렀다.

일본 함대는 1905년 5월 27일 새벽 발틱함대가 중국 상하이를 거쳐 쓰시마해협으로 들어가자 여기서 나아가 포격함으로써 승리했다. 당시 일본 해군 제독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 平八郞)였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으며 또한 발틱함대를 격침한 작전과 전술은 이순신 장군의 것이었다고 한다.

감나무 아래에다 아버지 산소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묻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에 둘째 전삼조·이영순씨 부부(니이가타시 거주), 뒷줄 왼쪽부터 셋째 이상재·이수자씨 부부(교토시 거주), 첫째 김보광·이영자씨 부부(이치노미야시 거주), 넷째 이지자씨(츠루가시 거주). /김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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