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때까지는 진료해야죠”

몸이 아프면 신경도 예민해 질 수밖에 없다. 한의원·병원을 찾았을 때 불친절함을 접하면 마음조차 다친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자리한 서울한의원은 그런 면에서 마음 놓일 만하다. 이곳 장이수(65) 원장이 찾는 이들을 대하는 신념은 이렇다.

“환자들이 편하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 편한 대로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간호사들은 문 열고 들어서는 이들을 밝은 미소로 대한다. 한의원 실내는 집처럼 아늑하다. 장 원장 신념이 뚝뚝 묻어난다.

어릴 적부터 ‘한의사가 곧 내 길’

장이수 원장은 어릴 적 진로 고민을 크게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아버지 모두 한의사였다. 약 제조하고, 침놓는 모습을 늘 곁에서 봤다.

장이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그것이 자연스레 몸에 스며들었다. 스스로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물론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한의학 하시는 어른들 밑에 있다 보니 어릴 때부터 한약·침 같은 것을 접했죠. 저 역시 호기심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어릴 적부터 한의사가 당연히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상대 쪽으로 진학해 경영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했었죠. 하지만 그리 깊이 있게 고민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누구 하나 강요할 이유 없이 그냥 제 숙명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의령이 고향인 그는 마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공부도 곧잘 했던 그는 경희대학교 한의과에 무난히 입학했다. 대학 때도 별달리 한눈팔지 않고 한의학 공부에만 매진했다. 6년 과정을 끝낸 1973년 2월, 곧바로 개원을 준비했다. 25살 나이였다. 좀 더 공부하거나 경험 쌓으려는 다른 이들과 달리 일찍 서두른 것이다. 물론 준비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 다니면서도 선친 한의원에서 실무 경험을 틈틈이 쌓았죠. 방학 때는 늘 그렇게 보냈으니까요. 그리고 지도 교수님 수련을 통해서도 이미 환자들을 대하고 그랬죠. 그런 시간을 통해 나를 믿고 찾는 환자들을 빨리 대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이왕 할 거 남들보다는 조금 빨리 시작한 셈이죠.”

이름은 ‘서울한의원’으로 이미 결정해 놓았다. 당시 스승이 ‘서울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아래서 가르침 받던 제자들은 개원 때 모두 그 이름을 자연스레 사용했다. 장 원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금은 주위, 집안 어른 도움을 통해 마련했다. 장소는 사람들 많은 곳을 고집했다. 환자를 많이 대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당시 경남 내에서 가장 번화한 마산 창동을 낙점했다. 지금 코아양과 바로 아래다. 1973년 5월 10일, 43㎡(13평)짜리 작은 한의원을 개원했다.

“당시는 한의원이 많지 않았어요. 마산에 세개, 창원에 하나 있었죠. 한의원보다는 한약방이 많았죠. 거기서 한의원 역할을 대신하던 시절입니다. 제가 개업하면서 타이틀을 하나 얻었습니다. 경남 한의학 박사 1호 개원입니다. 그렇게 시작함과 동시에 이내 자리를 잡았어요. 젊은 사람이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하자 신뢰를 많이 한 듯합니다. 진맥 잘 본다며 칭찬도 많이 해 주셨고요. 제 한의원이 자리 잡으면서 인근 한약방은 하나둘 없어지고, 대신 다른 한의원들이 들어섰죠.”

개원을 위해 도움 받은 돈은 금세 다 갚았다. 살던 집도 전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젊은 사람이 진맥 잘 본다는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지역에 이름 좀 알려진 이들도 자주 찾았다.

서울한의원 외부 전경/사진 박민국 기자

“당시 우리 지역에서는 한일합섬이 아주 큰 기업이었죠. 그곳 회장님이 우리 한의원에 한번 오시고는 계속 찾으셨죠. 나중에는 회사에서 한의원으로 벤츠 차량이 오기도 했어요. 그걸 타고 왕진도 자주 다녔죠.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은행 쪽 사람들이 저를 계속 찾아와요. 한일합섬 돈 관리를 하려고 은행들끼리 경쟁이 붙은 거죠. 저한테 찾아와 잘 부탁한다는 말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또 그분들이 우리 한의원 단골도 되고 그랬죠.”

면적을 넓혀가며 그렇게 30년 넘게 처음 시작했던 곳을 지키다, 주차 공간 부족으로 9년 전 지금 자리로 옮겼다. 화려함보다는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건물 외벽에는 ‘개원 40주년’을 알리는 펼침막이 내걸려 있다.

작은아들·며느리 함께해 든든

할아버지·아버지, 그리고 장 원장까지…. 3대째 한의사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 끊어지지 않는다. 큰아들은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역시 한의사인 작은아들은 2년 전부터 서울한의원에서 함께하고 있다.

작은아들 장경근(38) 한의사는 애초 다른 길을 가려 했다. 대학은 인문학 쪽을 택하고 졸업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야 할 길 역시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뒤늦게 다시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 전통의학을 배우러 외국에도 나가고, 서울에서 원장 생활을 하다 2년 전 아버지 곁으로 왔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장 한의사가 말문을 열었다.

장이수 원장과 장경근 한의사/사진 박민국 기자

“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이 길로 오게 됐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아직 배울 게 많지요. 아버님 곁에 있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아버님은 증조할아버지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계십니다. 요즘은 침법 가운데 약물주입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아버님은 옛 방식 그대로 침과 뜸을 놓는 걸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세한 곳에서는 시설이나 사람 쓰는 비용 때문에 한약 제조도 외주로 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의원에는 34년 함께 하시는 약제사님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찾는 분들도 좀 더 믿음을 얻는 것 같습니다.”

작은아들 말에 장 원장은 별다른 대꾸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다. 하지만 흐뭇한 눈빛은 감추지 못한다. ‘아들이 옆에 있어 아버지 역시 든든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장 원장에게는 더 반가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부산에서 한의사로 있는 작은 며느리까지 곧 함께할 예정이다.

애초 내과·부인과 전문한의원에서 출발해 이젠 비만클리닉 등 다양한 진료를 하고 있다. 이는 곧 ‘가족이 함께 찾는 한의원’이라는 목표와 연결된다.

“개원한 지 40년 되다 보니 오랫동안 찾는 분들이 많죠. 어느 집안에서는 3대째 우리 한의원을 찾기도 해요. 가족이 함께 찾는 경우도 많아요. 어르신들이 자식들, 그리고 손자·손녀 손잡고 함께들 오십니다. 요즘은 특화된 한의원이 많은데, 저희는 여성 비만·미용까지 다양하게 하니까요. 가족이 함께 찾는 한의원이라는 목표대로 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지요.”

“100살 때까지는 진료해야죠”

장 원장은 바깥 활동도 분주히 하고 있다. 대학 강의는 물론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남도 한의사회장을 세 번에 걸쳐 역임했다. 또한 경남 한의사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했다.

“한의사로 살면서 좀 내세울 수 있는 건 경남 한의사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한 겁니다. 20년 전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한의사 신협을 설립했죠. 한 5년간 내 집을 관련 사무실로 쓸 정도로 애착을 뒀죠. 한의원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조합에 가입해 여러 혜택을 나누도록 했습니다. 한의사들이 개원할 때 돈도 많이 부족하거든요. 그런 후배들이 보증 없이 신용대출 받을 수 있도록 지원도 하죠. 후배 한의사들에게 도움 되는 길을 닦아 놓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장이수 원장/사진 박민국 기자

늘 아픈 사람을 대하다 보면 장 원장 스스로 지칠 법도 하다. 그것도 40년 세월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 원장은 단호히 말한다.

“힘 빠지는 일은 딱 하나 있죠. 환자들이 약 먹고도 효력 없다고 말할 때죠. 반대로 큰 효능 봤다며 고맙다고 말하는 환자 앞에서는 힘이 절로 나지요. 저는 환자들이 뭘 생각하는지 우선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해 드립니다. 몸 아파서 오시는 분들, 특히 어르신들은 두 번 세 번 물어도 대답을 잘 안 해요. 그렇게 열 번 물어보는 것보다는, 뭘 원하는지를 빨리 알고, 그에 맞춰 마음 편하게 해 드리는 게 중요하죠. 우리 편한 쪽으로 접근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장 원장 스스로도 건강관리에 철저하다. 평생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떠 운동·목욕을 하고 환자 돌볼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건강에 신경 써야 할 나이다. 옆에 있던 작은아들이 걱정스럽게 한마디 했다.

“연골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운동을 너무 많이 하셔서 그렇습니다.”

장 원장은 특히 테니스를 특히 좋아한다.

“선수 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한 30년 전부터 취미생활로 했죠. 제 모교 테니스부 후원회장도 오랫동안 맡았죠. 후원회장 할 때는 좋은 선수들 스카우트하러 다니기도 하고 그랬죠. 전창대·전영대 같은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이 우리 모교입니다.”

장 원장은 주말이면 등산·골프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젊은 때는 술도 좋아했다. 하지만 2년 전 끊어보기로 한 결심을 지금까지 지켜나가고 있다. 1년에 3개월 정도는 스스로 처방한 한약을 먹고 있다.

이 모든 자기 관리는 ‘진료하는 사람이 건강해야 환자도 건강하게 돌볼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 때문이다.

“앞으로도 열심히 건강 챙겨서 100살까지는 진료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하하.”

장이수 원장과 장경근 한의사/사진 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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