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가득했던 꿈을 먹고 자랐다, 성찬영 선생이 이듬해 고향

오늘날 창녕은 양파 최대 생산지는 아니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도다. 도내에서도 합천에 밀린다. 그럼에도 이 지역 사람들은 창녕 양파 이야기가 나오면 '시배지'라는 점부터 풀어놓는다. 국내 작물 역사는 대부분 지형적 조건에서 출발한다. 창녕 양파는 다르다. 이 지역 사람들 정성이 좀 더 크게 작용했다.

◇수십 년 정성이 빚어낸 결과 =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는 2006년 조성된 '양파 시배지 조형물'이 있다. 더불어 '성씨 고가'도 자리하고 있다. 양파를 우리나라 전역에 퍼뜨린 집안이다.

양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0년대 초다. 일본에서 건너와 1908년 서울 뚝섬 원예모범장에서 시험재배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거주하던 성찬영 선생이 처음 재배에 나섰다.

하지만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종자 역시 일본에서 수입해 왔는데, 한 홉에 쌀 두 말과 바꿔야 할 정도로 비쌌다. 1946년 돼서야 영산면에 거주하던 원예교사 조성국 선생 손에서 종자 생성이 이뤄졌다.

   

그 이후에 성재경(1916~1981) 선생이 등장한다. 첫 재배자였던 성찬영 선생 손자다.

성재경 선생은 땅을 소작농들에게 맡기고, 한동안 서울에서 출판사 일을 했다. 1951년 1·4 후퇴 때 다시 고향 땅을 밟았는데, 그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듯하다. 당시 보리농사로 생활하던 이곳 사람들은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이에 성재경 선생은 지금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재배작물에 눈 돌렸다. 할아버지 손을 거쳐 간 양파였다. 스스로 일본 책을 뒤져가며 재배 및 종자 채취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아 재배 방법을 가르쳤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설이던 농민들도 많았다. 하지만 앞서 시작한 이들을 보니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보다 10배 이상 되는 수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양파 재배에 팔을 걷어붙였다.

성재경 선생은 또 다른 일에 나섰다. 1963년 그를 비롯한 13명이 모여 '경화회(耕和會)'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었다. 재배기술을 좀 더 발전시키고, 농민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팔 곳 없으면 소용없다' 하여 판로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0년경 재배 농가는 6000여 호에 달했다. 오늘날 1700여 농가라는 점과 비교하면 어느 수준인지 짐작된다. 이미 다른 지역까지 양파 재배가 퍼져 있을 때였지만, 창녕에서 나는 것이 전국 생산량 가운데 35% 이상을 차지했다. 이곳 사람들은 가난을 옛 기억으로 돌릴 수 있을 정도까지 됐다.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자리한 양파시배지 조형물. 그 뒤편에 성씨 고가가 보인다. /남석형 기자

1975년 경화회지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양파가 나의 꿈을 키워주었고,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는 이 양파! 나는 양파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친하면서 석동 골짝의 초가를 밀어버리고 기와집으로 바꾼 사연을 밤이 깊도록 양파와 더불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물론 사람들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토질·기온이 양파와 궁합이 맞았다. 낙동강 변에 자리해 칼슘·마그네슘·유효인산·유황 같은 성분이 풍부한 땅이다. 파종 전 강수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아 풍부한 수분 속에서 자란다는 점도 더해진다. 오늘날 창녕 양파는 95%가량 논에서 재배한다. 벼농사 짓는 땅에서 하다 보니 병해충 피해도 비교적 덜하다고 한다.

지난 1992년 양파연구소가 전국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2007년에는 전남 무안보다 먼저 지리적 표시제에 등록했다. 한동안 '양파장류축제'를 열었는데, 지금은 '우포누리 농특산물 한마당축제'에 포함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파' = 양파는 '백합목 부추과 부추속'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애초 '둥근 파'라 부르다 '서양에서 들어온 파'라 하여 '양파'라는 이름이 되었다. '다마네기'는 일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어 '어니언(onion)'은 큰 진주(unio)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산지를 두고 중앙아시아·지중해 연안, 이란·서파키스탄, 북이란부터 알타이 지방이라는 등 여러 추측만 있다.

양파는 마늘과 더불어 가장 오랜 시간 이어진 작물 가운데 하나다. 이는 다양한 기후·토양에서 자라고, 건조 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000년 페르시아에서는 부적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000년 들어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식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은 마늘과 함께 양파를 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7~8세기에는 고대 그리스 올림픽 참가자들이 갈아서 주스처럼 마셨다 하며, 인도에서는 심장·눈·관절을 위한 약으로 썼다고 한다. 전염병 돌던 16~17세기에는 껍질 벗긴 것을 병원에 두기도 했다.

음식으로는 계층별로 용도가 달랐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구워 먹는 일상식량이었고, 좀 있는 이들은 고기를 이용한 음식에 곁들여 사용했다. 오늘날은 전 세계에 걸쳐 조미료 등 첨가재료로 다양하게 사용된다.

생산량은 2009년 기준으로 중국이 28.7%로 가장 많고, 인도 19.0%, 미국 4.6%, 이집트 2.5% 순이다. 우리나라는 1.6%로 12번째다.

양파 종류는 겉껍질 색, 출하 시기, 모양, 맛에 따라 나뉜다. 창녕에서는 종자를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다. 20년 전만해도 국산종이 많았는데, 이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 퍼져 나갔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로부터 로비를 받은 판매상들이 농민들에게 적극 권한 것이 이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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