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저 사람들을 버렸다면 내가 돌봐야겠다'

국내 최고 권위의 의료봉사상인 제29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을 받은 권현옥(50·진주시 대안동 권현옥산부인과의원) 원장의 진료실에 들어서면 벽면 가득 채워진 수많은 사진과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권 원장이 만난 사람들인데, 마치 그 사람들이 매일 권 원장을 지켜보고 함께 호흡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울지마 톤즈’로 널리 알려진 고 이태석 신부가 받았다는 그 큰 상을 받은 권 원장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 인터뷰를 잡았고, 진료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만났다.

룸비니에서 마씨다 엄마를 만난 것은 운명

권 원장은 인터뷰를 많이 해서 웬만한 것은 다 공개됐다며 다른 얘기부터 꺼냈다.

4년 전 네팔 룸비니(인도와 네팔의 경계지점, 부처님이 태어난 불교의 성지)에서 만난 첫 환자 얘기였다. 마씨다라는 여자아이로 청각과 언어 장애아다. 그날 마지막 환자는 아리라는 남자아이로 언청이(구순구개열)였다. 보호자가 달라 처음에는 몰랐는데 남매였다. 마씨다 가족과의 만남은 그에게 의료봉사의 긴 여정에 이정표를 만들어 주었다.

네팔에서./권현옥 제공

“그곳에서 여자가 장애인 둘을 낳았다. 어떤 의미인지 아세요. 전과 10범보다 더한 죄인입니다. ‘네가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장애아를 둘씩이나 낳아’라는 눈총 때문에 엄마는 완전히 죄인이었지요. 그녀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있었습니다. 태어나서 표정이 그렇게 어두운 사람은 처음 봤어요.”

권 원장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마씨다 엄마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애아를 낳은 것이 엄마의 죄가 아닌데 그 엄마는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우리가 같은 21세기를 사는데. 말이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분하기까지 했다.

그 엄마 때문에 시작한 것이 ‘108 자비손’이라는 의료봉사단체이다. 처음부터 108 자비손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모임에서 그 엄마와 아이들의 얘기를 했다. 그 자리에서 선뜻 도와주겠다는 의견이 모였다. 수술시켜주자는 의견도 나왔다. 자연스럽게 단체로 발전했고 1000만 원 정도가 모였다. 한국으로 아이들을 데려오면 수술비 등으로 3000만 원이나 들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2시간 정도 이동해 인도에서 수술하면 100만 원이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그 소식을 알렸고 아리는 수술을 하고, 마씨다에겐 보청기를 사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룸비니에)열 번은 오겠다고 약속했다.

“1년에 두 번씩 열 번을 와서 내 손길이 더 필요하고, 나도 오는 것이 즐거우면 더 올 수도 있고, 더 의미를 찾는다면 병원을 차릴 수도 있을 것”이란 공약(?)을 했다.

관습과 무지로 죽어가는 여성과 아이들

권 원장의 이야기는 엑따(35)라는 난소물혹 환자로 이어졌다. 난소물혹은 맹장수술보다 더 간단한 수술로도 완치된다. 방치하면 물혹이 커져 숨을 호흡곤란으로 죽는다. 1년 뒤에 다시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수술을 하지 않았기에 빨리 수술하라고 했다. 수술비를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6개월 만에 다시 갔는데 일주일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는 정말 많이 분개했다.

“엑따는 아픈 몸에도 항상 나의 손을 잡고 환한 미소로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 맑은 눈과 미소가 아직도 마음 깊이 남아있어요. 지금도 룸비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하늘을 보면 엑따가 저를 반기며 힘들고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곳에서 여자는 노동력과 출산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여자 나이 35살이면 이미 생산력이 떨어져 수술을 하더라도 쓸모가 없었다. 수술할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면 아이도 낳고, 새로운 노동력도 생긴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들은 집안의 재산으로, 남자 아이만이 부모가 죽어 화장할 때 불을 댕길 수 있다. 그래서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모는 천당에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루만 고생하면 가 볼 수 있는 거리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권현옥 씨./박일호 기자

권 원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네팔에서는 15세에서 35세의 가임 여성 대부분은 산모이거나 수유 중이다. 유산이 된 채 복통과 하혈을 해도 자연적 치유만을 기다리는 경우도 흔하다. 심지어 5개월 된 산모가 태아가 사산된 것을 한 달 동안 모르고 배가 아프고 하혈을 해도 분만 날만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권 원장은 인터뷰 중에도 안타까움이 밀려오는지 “의료 오지는 지구 반대편의 모르는 사회가 아닌 하루만 고생하면 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라며 함께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씨다를 보면서 권 원장은 ‘신이 저 아이를 버렸다면 내가 저 아이의 보호자가 돼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마씨다는 말은 못하지만 몇 번 만나면서 자연스레 웃으면서 다가온다. 갈 때마다 따로 선물을 챙겨주니까, 자기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얼굴이 밝아졌다. 생각도 달라졌다. 권 원장이 마씨다를 귀하게 여기니까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마씨다를 예뻐한다.

“기회가 되면 인공 귀를 달아주고 싶습니다. 가능성은 모르겠어요. 설사 안 된다고 하더라도 시도를 하는 것과 안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지요. 0과 1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1과 100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주변에서는 의료봉사를 한다고 갑자기 달라지는 게 아니지 않으냐는 말도 합니다. 뭐 하러 가느냐는 말이지요. 하지만, 안 해본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가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권현옥 씨./박일호 기자

친구와의 약속 지키려 해외의료봉사 나서

봉사활동에 나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구 얘기가 궁금했다.

“10년 전 친구의 죽음이 나의 길을 돌렸습니다. 아마 그 친구의 죽음이 아니었으면 저도 제 주머니만 채우고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그 친구가 죽고 나서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내일 갈 수도 모레 갈 수도 있겠구나 싶은…. 그 친구가 다 놓고 가더군요.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도 놓고 가더라고요.”

그 친구와 권 원장은 20년 지기였다. 대학동창이자 같은 산부인과 의사였다. 3년간 암 투병할 때 권 원장이 따라다녔다.

“나에게 남은 인생이 10년이라면 저 친구와 5년씩 갈라주세요.”

라고 부처님께 빌었을 정도다.

“친구가 죽은 뒤 6개월간은 정신을 못 차렸어요.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숨 쉬는 게, 아침 눈 뜨는 게 귀찮았어요. 우연히 진주성 안에 있는 호국사에 들러 법당에 앉았는데 비로소 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법당 안에서 2시간 정도 울고 나니 시원해졌습니다. 그게 치유였지요. 그때 결론을 내렸습니다. 10년만 더 살다가자, 친구가 먼저 갔으니까라고 마음을 다잡았던 거지요.”

권현옥 씨./박일호 기자

권 원장과 그 친구는 나이가 들면 함께 해외의료봉사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그 친구가 죽고 심하게 앓고 나서 내린 결론이 ‘더 늦기 전에 그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해외봉사 이후 권 원장의 생활도 확 달라졌다. 출퇴근 때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탄다. 떡국이 쉬어도 버리지 않고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다. 흔한 테이크아웃 커피나 유명 메이커 옷도 사지 않는다. 화장품도 싼 것을 산다.

“돈을 쓸 때마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까 저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해졌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해외봉사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모를 때는 내가 많이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니까 내가 많을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누면서 사는 게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지요.”

권 원장의 해외봉사론은 확고했다.

“사람들은 봉사할 때 행복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볼 때 가장 행복하고 희열을 느낍니다. 봉사를 하면서 동시에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의료봉사입니다. 의사들만의 특권이지요. 한국에서 맛볼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우리가 가진 의료기술은) 소 잡는 칼인데 우리는 연팔 깎고 있습니다. 소 잡는 칼은 소 잡는 데 사용해야 그게 칼다운 칼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 제가 가는 그곳에서는 여자가 의사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희망이 됩니다. 남자로 태어나야 사람 대접을 받는데 저 나라에서는 여자도 의사가 될 수 있고,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라는 것만 보여주어도 그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그녀가 후배들에게 하는 말들은 열정으로 가득 찼고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 지를 스스로에게 새기는 말이었다.

베트남에서./권현옥 제공

“우리나라의 병은 아주 풍족하면서 나눌 줄 모르는 것이 병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조금 모자랄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우리 애들이 불쌍합니다. 컴퓨터만 보고 있고 나눌 줄 모르지 않느냐. 한국인들이 더 행복하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행복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귀영화 다 갖춰도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먹는데 1을 먹을 때는 1이 행복합니다. 100까지는 100이 행복합니다. 하지만, 200을 먹는다고 200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200을 먹으면 110이 행복합니다. 내가 먹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는 200이상, 300이상 행복하게 돌아옵니다. 이런 기분을 아니까 (봉사를)하는 것입니다.”

성폭력 상담 등 다양한 국내 봉사활동

권 원장은 부산출신이고 남편은 대구 사람이다. 결혼 후 남편이 경상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주에서 정착했다. 진주 사랑이 각별하다.

“내가 가장 잘한 것은 남편을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진주에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권 원장은 특히 진주성을 아주 사랑한다. 10년째 매일 아침마다 간다. 친구를 잃은 아픔을 달래준 곳도 진주성이다. 매일 만나는 진주성 관리 직원들과도 친하다.

“진주성은 나라에서 관리해주는 내 정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고 할 정도다. 2011년 진주시민상을 받았을 때 상금이 있는 줄 알고 진주성 관리직원들에게 ‘겨울 점퍼 하나씩 돌리겠다’고 약속했다가 상금이 없어 결국 사비를 털어 약속을 지켰다. 이번 상을 받고 상금으로 진주성 관리직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권 원장은 사실 해외봉사 이전에 국내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 15년 전 마산에 근무할 때 성폭력 상담을 한 것을 시작으로 범죄피해자예방센터나 여성쉼터, 성폭력상담소 등에 관여하면서 소외된 이들의 인권 회복과 사회적 편견을 줄어 나가는 데 힘을 보탰다. 이후 진주시의사회의 장애아동봉사단체인 나누미도 탄생시켰다.

2004년부터는 경상남도의사회·경상대병원·열린 의사회 등을 통해 우즈베키스탄·캄보디아·베트남·네팔·인도·아프리카의 오지로 해외 의료봉사를 나섰다. 이후 해외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11년에는 ‘진주시민상’을 받았다.

2009년 12월쯤 혼자서 룸비니지역으로 봉사를 떠났다. 불자라서 그곳에 한번은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떠난 봉사였지만 권 원장이 그곳에서 마주친 실상은 처참했다. 5일간 머물면서 청각과 언어장애인 마씨다와 운명적인 만남을 했던 것이다.

‘집착없이 베푸는 보시’ 행하고파…

그녀에게 오랜 해외 봉사활동에서 몇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2006년 경상대와 함께 우즈베크 봉사를 갔다가 고려인마을에 들렀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우리를 마치 피붙이처럼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다른 민족 이웃들에게 모국의 의료진을 자랑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보고 나의 행복이 타인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2008년에 베트남 봉사에서 안님이라는 선천성 성호르몬 장애인 21살의 기형여성을 만났는데 3년치 피임약을 보내어 주었더니 월경을 하게 되어 그 동네에서는 권 원장을 ‘신의 손을 가진 의사’라 불리고 있단다. 권 원장은 한국에서 하찮은 피임약이 의료 오지인 어떤 곳에서는 기적의 생명수로 태어나는 현실을 실감했다.

캄보디아에서./권현옥 제공

같은 해 캄보디아에서 아리 엄마라는 갑상선 환자를 진료했다. 이미 심장이 망가진 말기 환자였다. 3일 진료를 하는 동안 문 앞에서 자기 목숨을 살려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애원의 눈빛으로 권 원장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갑상선 약도 없었고 검사도 치료도 어려워 영양제만 주었다. 그 뒤 전화를 해보니 생활비를 벌고자 벽돌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권 원장은 아리 엄마에게 6개월치의 약과 생활비를 보내고자 아들의 과외를 두 달 쉬었다.

권 원장에게 불교는 삶의 지렛대였다. 불자인 그는 평소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집착없이 베푸는 보시)’를 가슴에 새기고 산다.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마음의 짐이 될 수 있기에 항상 이 글귀를 되뇐다. 그런 그에게도 보령의료봉사대상은 고마웠다. 룸비니로 가는 돈이 마련됐다는 것에 감사했다.

“속되지만 앞으로 열 번은 더 다녀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돈이 떨어져 흔들릴 때 돈이 생긴 것을 보면 룸비니와 나의 인연은 아마 운명인 것 같습니다.”

우즈벡에서./권현옥 제공
아프리카에서./권현옥 제공
인도에서./권현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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