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인]"지역 팬들과 마주하는 무대 소중해…"

이주미(29) 씨는 재즈 보컬리스트이다. 서울과 부산 그리고 일본과 대만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1 자라섬 국제 재즈 콩쿠르’(이하 자라섬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으며 단번에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자라섬 콩쿠르’는 대상 상금이 1000만 원인 국제적인 재즈 대회다. 수상 이후 이주미 씨에게는 섭외가 밀려든다. 그래도 그는 부산에서 정기 공연은 빼놓지 않고 선다.

이주미 씨 공연은 동영상으로 접했다. 무대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를 공연장에서 접하고 싶었으나 창원에서는 공연 일정이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산교육대학 앞에 있는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무대 아래에서 이주미 씨는 시종일관 웃음이 많은 밝은 사람이었다. 공연 영상에서 본 매서운 눈빛은 찾기 어려웠다. 다만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변하는 눈빛은 자유로운 재즈 선율처럼 변화무쌍했다. 재즈에 대한 열정은 그 눈빛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지역에서 재즈 공연 기반에 대한 현실을 얘기할 때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이 조금 더 버텨줬으면 하고 바랄 때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주미 씨를 무대가 아닌 카페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재즈 보컬리스트가 아닌, 자기 이야기를 경쾌하게 풀어놓는 이야기꾼 이주미 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즈 보컬리스트 이주미 씨.

어렸을 때부터 무대체질

이주미 씨는 창원 상남동 출신이다. 그는 창원중앙여고를 졸업하고 부산예술대학에 진학하면서 부산으로 집을 옮겼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무대를 꿈꿨다. 웅남초등학교 재학 시절 수학여행 때는 전교생 앞에서 팝송을 부르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는 맞벌이 하셨던 부모님 때문에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동생이 한 명 있지만 10살 터울이죠. 학교 갔다 와서 주로 혼자 TV를 보면서 놀았는데 우연히 ‘머라이어 캐리’의 뮤직비디오를 봤어요. 보자마자 바로 ‘아, 저거다’ 싶었죠. 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그때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그 뒤로 무대만 있으면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한마디로 무대 체질이었다. 그렇게 노래하기를 좋아하던 이주미 씨는 초등학교 때 마산MBC에서 주최한 가요제와 ‘경남 청소년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그 무렵부터 자식이 평범하기를 바랐던 부모님도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재즈 보컬리스트 이주미 씨./김구연 기자

“처음에 부모님께서는 예능을 전공해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셨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라셨죠. 하지만 가요제 나가서 상금과 부상을 받아 오니 점차 재능을 인정해 주셨어요.”

이주미 씨는 이후에도 종종 노래 대회에 참여했다. 노래만 해서는 평범하다 생각했는지 오카리나 연주까지 곁들였다. 매일 꾸준히 연습한 오카리나는 대회 때마다 그를 돋보이게 했다. 수상 경력은 더욱 늘었다. 한 번 호기심이 발동하면 무섭게 파고들어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 노래와 연주에 모두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꽂히기도(?) 한다.

“한때 영화평론가를 꿈꿨어요. 영화를 정말 많이 봤지요. 영화 본 흔적을 남기려고 영화 제목과 짧은 감상평에 별점까지 매기면서 메모를 모았어요. 나중에 영화책이 사전보다 두꺼워지더라고요. 학교에서 친구들이 돌려봤지요. 나중에는 수학 선생님도 빌려갔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네요.”

노래와 영화에 빠졌던 고등학생 이주미 씨. 그가 갈림길에서 선택한 것은 노래였다. 이주미 씨는 부산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 진학했다. 그는 학교에서 노래를 실컷 부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재즈가 다가온다.

공연을 하고 있는 재즈 보컬리스트 이주미 씨.

“팝송을 좋아했지요. 그런데 재즈 과목을 이수하면서 재즈 세계를 접하게 됐어요. 자유로운 선율이 매력적이었지요.”

그때부터 재즈는 이주미 씨에게 모든 것이 된다. 성실하게 연습하며 준비하던 그는 지난 2007년 경성대 앞에 있는 재즈 클럽인 ‘몽크(MONK)’에서 첫 무대에 선다. 7월 5일, 그는 날짜도 잊지 않는다.

“평생 잊지 못하지요.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기분을 잊을 수 없어요. 익숙한 팝송을 부르는 것은 늘 자신 있었지만, 재즈를 부르는 것은 자신이 없었어요. 벌거벗은 채로 거리에 선 느낌이었지요.”

성장판을 열어준 스승

무대에서 스스로 재즈가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재즈는 경험할수록, 연습할수록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래도 첫 무대 이후 그는 부산에 있는 재즈 클럽을 돌며 보컬리스트로 무대에 섰다. 하지만, 2010년 들어 그에게 고비가 찾아왔다. 가수였지만 앨범도 없었고, 매일 오르는 무대는 늘 같았다.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였다.

“혼자 연습해봤자 발전을 없겠다는 판단을 했어요. 선생님을 찾아가 노래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우연히 EBS <스페이스 공감>을 보게 됐어요. 재즈 보컬리스트 이부영 선생님 무대였지요. 첫 소절을 듣자마자 ‘내 선생님은 저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앨범 커버 이미지.

이부영 씨는 로테르담대학 대학원에서 재즈를 공부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재즈 보컬리스트다. 그에게 처음 듣는 이부영 씨 음색은 너무 독특했다. 노래하는 내내 보이는 여유도 부러웠다. 그는 당장 지인에게 이부영 씨 연락처를 알아내 연락했다. 개인 레슨을 부탁하는 그에게 이부영 씨는 실력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 테스트를 받았고 이부영 씨는 그에게 선생님이 된다. 이주미 씨는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장은 2011년 열린 ‘자라섬 콩쿠르’ 대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는 대상 수상금으로 데뷔 앨범 <The Rising Sun>을 발매했다. 앨범 제목에는 ‘슬럼프를 이겨내고 떠오르는 해처럼 다시 시작한다’는 뜻을 담았다. 독특한 목소리는 마니아들에게 곧 관심을 끌었다. 마니아들은 그를 ‘나윤선, 웅산을 이을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라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앨범 이미지.

그는 2009년부터 부산에서 ‘재즈포인트’라는 팀을 결성하고 보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주미 씨 이름이 더욱 알려지자 재즈포인트는 일본에서도 종종 공연을 한다. 일본 공연 때 객석은 항상 가득 찬다.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Asian Month Festival'에 초대 받았어요.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을 초대해서 약 한 달 동안 펼쳐지는 축제죠. 작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했어요.”

후쿠오카에서 공연을 계기로 큐슈와 기타큐슈에서 진행한 투어 콘서트도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재즈 클럽에서 주로 공연했어요. 그러다보니 관객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죠. 술도 한잔씩 하면서 공연을 즐기시는 편이에요. 음악 중간에 환호도 해주시고 가볍게 몸을 흔들면서 즐기는 분들이 많고요. 반면에 일본관객은 음악이 시작하면서부터 끝까지 부동자세죠. 음악에 집중해 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이 끝나면 일어나서 박수를 쳐주시거나 환호해주시지만 음악 중간에는 반응이 없죠. 양국 모두 제 노래에 집중해주는 에너지는 같아요. 소중한 팬 분들입니다.”

지역에서 귀한 무대 ‘몽크(MONK)’

무대에서는 늘 카리스마 넘치는 이주미 씨. 일상에서 그는 그저 푸근한 언니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친구나 제자가 힘들어하면 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실 무대에서 모습을 현실에서도 유지하는 것은 너무 지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무대에 서지 않는 날에는 여행을 즐겨요. 나를 내려놓고 쉬는 거죠. 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노래하는 여행자’라고 했으면 좋겠네요.”

이주미 씨는 재즈 가수이면서도 보컬 선생님이기도 하다. 부산예술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실용음악과 학생들을 가르친다.

“역시 음악에 대한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음악은 돈을 벌거나 나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 아니지요. 음악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래해야 합니다. 저는 음악을 즐기는 마음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재즈 보컬리스트 이주미 씨./김구연 기자

재즈는 다른 음악 장르보다 대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 각자는 대부분 마니아 수준에 가깝다. 대부분 재즈 팬은 공연을 직접 즐기는 편이라고 한다. 이주미 씨는 대부분 팬들을 공연장에서 만나기 때문에 팬들과 친밀도도 높다. 팬들과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일상이다. 하지만, 재즈를 즐기는 이들이 소수인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혼자 나를 알아봐 달라고 외치는 느낌이에요. 한국에 재즈가 점점 뿌리내리기 때문에 점점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것이라고 믿어요.”

대중성이 약한 만큼 그에게는 무대 하나가 매우 소중하다. 부산 경성대 앞과 창원 상남동에 각각 한 군데씩 있는 재즈 클럽 ‘몽크(MONK)’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이유다. 몽크는 이주미 씨가 데뷔한 무대인만큼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는 공연 때마다 몽크 간판을 보면서 ‘몽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몽크와 같이 적은 관객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지닌 장점도 있다. 바로 관객 반응에 따라 관객들이 원하는 곡을 즉석해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남·부산에서 재즈만 전문으로 공연하는 클럽은 손에 꼽힐 정도다. 부산에는 두 곳 정도 있고, 경남에는 ‘몽크’가 거의 유일한 재즈클럽이다. 이주미 씨는 지역에서 공연하던 선·후배들이 공연장이 없어 서울로 떠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동료들은 열심히 활동하기보다 그저 견디는 것이라고 전했다.

70살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

상황이 어려운 건 재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장르 다양성은 파괴된 지 오래다. 몇몇 인기 있는 아이돌 가수와 제작사에 수익이 집중되는 구조다. 특히 기형적인 음원 수익 분배 구조는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음원 수익이라는 게 창작자와 가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적은 수익만 분배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주미 씨도 이 같은 구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인터뷰 하는 재즈 보컬리스트 이주미 씨./김구연 기자

“음원수익에 대해서 할 말 많죠.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정형돈 씨가 음원수익으로 4만 원가량 받았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했어요. 그 분은 음원 다운로드 순위 1위를 지켰던 분이에요. 저는 오죽하겠어요. 며칠 전 처음 음원 수익이 입금 된 통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죠. 한 곡 다운로드 할 때마다 가수에게 1원이 돌아가는 구조는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1원이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한 곡당 100원이 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주 수입원은 보컬 수업료다.

이주미 씨는 부산 ‘몽크’에서 격주 토요일, 서울 ‘블루문’에서 매주 목요일 등 정기 공연을 꾸준히 할 계획이다. 창원에 있는 재즈클럽 ‘몽크’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재즈계에서 주목 받는 신예인 이주미 씨 활동 계획은 어떨까.

“제가 신예 맞죠? 1집 가수로 끝나지 않도록 열심히 활동해야죠. 일본·대만·서울 그리고 부산과 창원을 오가면서 제 음악을 최대한 알리고 싶어요. 또 다른 나라에도 더 진출하고 싶어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취적인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는 게 꿈이에요.”

이주미 씨는 70살이 되어서도 계속 재즈 가수로 살고 싶다고 한다. 저명한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 보다 작은 공연이라도 꾸준히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다.

일본에 진출해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지만 아직도 지역 팬들과 마주하는 무대가 소중하다는 이주미 씨. 그가 바라는 대로 지역 공연 문화가 활성화되어 지역 가수들이 공연무대를 찾아 서울로, 외국으로 떠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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