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 잘 나가는 증권맨 오페라 전도사 된 사연

한때 경남을 일컫던 수사 가운데 하나가 ‘문화 불모지 경남’이었다. 아직도 전국에서 문화예술 관련 예산이 가장 적다느니, 대표할만한 예술가가 없다느니, 문화 향유권이 제한되어 있다느니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지역 밖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내 예술인 그리고 도민들 사이에서 자조적으로 흘러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해 ‘문화 경남’을 이루려는 노력은 도내 각 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메세나 운동’이다. 도내 메세나 운동은 지난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규모가 작고 영세한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기업 후원을 통해 문화예술인들 창작 여건을 넓히고, 기업들에게는 감성 경영의 토대를 만들어주고 있다. 한데 도내에 메세나 활동이 정착되기 훨씬 전부터 메세나에 버금가는 활동을 실천해 경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모범이 된 사람이 있다. 이른바 도내 ‘문화를 이용한 감성 마케팅 선구자’로 불러도 손색없을 사람. 경남오페라단 정찬희(63) 단장이다.

정찬희 경남오페라단장./김구연 기자

한때 대우증권에서 일하며 수백 개 전국 지점 중에서 늘 평균 3위권 안의 실적을 보일 정도로 탁월한 증권인이었던 정찬희 단장은 지난 2000년부터 경남오페라단 단장을 맡고 있다.

정 단장은 증권사 재직 시절 활발한 업무 추진 능력과 뛰어난 영업 실적을 남겨, 지금도 지역 증권가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한다. 비단 영업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마케팅 기법을 도입해 지역을 넘어 전국에서 인정받았다. 바로 ‘문화 마케팅’이다.

정 단장은 대우증권 마산지점장으로 있던 지난 1995년 전국 금융기관 지점 가운데 최초로 ‘고객사은음악회’를 연 장본인이다. 대우증권 본사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비 250여 만 원을 들여 행사를 치렀다. 지금이야 금융업계에서 고객사은음악회가 자연스러운 행사이지만 당시에는 고객에게 주는 생필품 등 사은품이 주된 고객 관리 이벤트였다.

이런 상황에 무형의 ‘음악’을 사은품으로 제공한다는 발상은 획기적이었다. 첫 음악회가 성공을 거둔 후 사장을 직접 찾아가 면담한 끝에 회사 차원에 지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 마케팅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음악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애정은 줄곧 이어져 지난 1998년에는 지점장 재직 중에 보름간 휴가를 내 경남스틸 최충경 회장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가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서머 뮤직 스쿨도 다녀왔을 정도다.

이 모두 대우증권 내에서도 상위 1% 안에 드는 뛰어난 영업 실적이 뒷받침해 준 결과다. 이렇게 사장 마음까지도 흔드는 능력을 가진 잘 나가던 증권맨이 갑작스레 오페라단 단장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정찬희 경남오페라단장./김구연 기자

죽어서도 창원에 묻힐 창원토박이

-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요?

“창원에서 태어나 평생을 창원에 살았고, 죽어서는 창원에 묻힐 영원한 창원 토박이입니다.”

- 형제는 어떻게 되나요?

“위로 누님이 두 분, 형님이 두 분이 계십니다. 큰 형님은 중학교 졸업, 작은 형님은 초등학교 졸업이 마지막 학력입니다. 그래도 통신강의록 들으면서 큰 형님은 철도 공무원, 둘째 형님은 교육공무원으로 자수성가 했어요. 지금은 모두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지요.”

-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것으로 압니다.

“제 나이 9살 때입니다. 정말 엄한 분이셨어요. 천자문 못 외운다고 회초리를 수 없이 맞았어요. 어린 나이에 돌아가실 때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일찍 여읜 게 많이 아쉽죠.”

- 아버지 돌아가신 후 집안 살림은 어땠는지요?

“막막했죠. 남의 집 농사 지어주며 살았죠. 어머니는 미나리를 다듬어 내다 팔기도 하고, '달비'라고 가발에 쓸 머리카락 수거 등도 하시면서 자식들 키워냈습니다.”

-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끼가 남달랐다는데, 유전인가요?

“아버지가 시조창을 참 잘하셨다고 해요. 음률을 타면서 가락을 흥얼거리는 게 그렇게 듣기 좋았답니다.”

- 어릴 적 각종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도 하셨다면서요.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이런 적이 있죠. 옛날엔 동네마다 콩쿠르가 있는데, 한번은 브라더 미싱이 1등 상품으로 나왔어요. 일종에 홍본데, 일단 걸어두고 노래 잘 하는 사람을 섭외한 다음 1등상을 주고 상을 도로 받는 거죠. 솔직히 사기죠. 여기에 밥·술 얻어먹고 노래 불러주곤 했어요. 옛날 KBS에는 톱싱어(Top Singer) 대회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몇 주 동안 1등을 하기도 했죠.”

정찬희 경남오페라단장./김구연 기자

- 학창시절 학교 성적은 어땠습니까?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전 학년 반장, 학생회장 놓친 적이 없어요.”

- 마산상고에 진학하신 이유는?

“먹고 살기 어려울 때니까 취업을 하기 위해서였죠.”

- 대우증권이 첫 직장이신가요?

“앞서 몇 군데 있었는데 오래 있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첫 직장으로 보면 됩니다.”

- 대우증권에서는 몇 년을 일했나요?

“1974년부터 영업사원부터 창원지점장(이사)까지 만 29년을 일했네요.”

- 대우증권 당시 영업실적이 탁월했다던데. 비결은?

“추진력이 남다른 데가 있었어요. ‘생각하면 행동하라’가 내 신조인데, 어느 시점에 필요하다고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실천을 했어요.”

대중음반 취입 무산된 사연

- 지난 1980년대 후반 당대 최고 가수인 나훈아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는데.

“친구 중에 박곤옥이라고 크리스탈 호텔, 성안백화점 나이트를 모두 운영했어요. 이 친구를 통해 나훈아를 알게 됐죠. 마산상고 친구 중에 박승규라고 주현미 매니저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이 친구도 나훈아를 잘 알더라고요. 이렇게 어울려서 자주 골프를 치고는 했죠.”

- 현재도 연락을 하나요?

“나훈아, 최성수는 90년대 들면서 끊겼어요. 지금은 대중가수 쪽에는 조영남하고, 정지용 시 ‘향수’를 노래 만들어 부른 이동원 씨가 있죠.”

정찬희 경남오페라단장./김구연 기자

- 지난 1987년에는 대중음반을 취입하려다 무산됐다는데?

“나훈아하고 골프 치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내가 나훈아 노래만으로 음반을 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바로 나훈아가 녹음실을 내주고, 박승규가 작곡을 하나 해 주기로 의기투합했죠. 당시 돈으로 700만 원이면 되더라고요. 때마침 만기일이 돌아오는 1000만 원 짜리 적금이 있어 한창 준비를 하는데, 일하는 지점에서 4100만 7000원짜리 현금 사고가 났어요. 음반이냐 사고 수습이냐 고민하다가 결국 수습하는데 1000만 원을 보탰죠.”

- 음악적 관심이 대중음악에서 클래식으로 돌아선 계기가 있다면서요?

“음반 취입이 무산되고 한 동안 음악을 멀리했죠. 그러다 한번은 당시 마산학생과학관 갔다가 우연히 ‘장안사’라는 노래를 듣게 됐어요. 바리톤 음성이 너무 좋아 노래 부른 사람을 수소문했는데, 이 사람이 현재 창원시립소년소녀합창단 지휘를 맡고 있는 김성중 씨였어요. 이때부터 김성중 씨 팬이 됐고, 잠시 밑에서 노래를 배우기도 했죠.”

시대를 앞선 문화마케팅 펼치다

- 금융기관 최초로 고객사은음악회(1995년)를 열었다면서요.

“우연히 책을 통해 국외 한 기업은 사내에서 클래식 공연을 한다는 내용을 보게 됐죠. 우리나라에서도 주택은행 여의도 본점 로비에서 챔버 공연을 하는 걸 봤는데 참 좋더라고요. 이를 보고 마산지점에서 시작했죠. 증권사는 직원이고 손님이고 다들 숫자에 민감하니 감정이 메말라 있어요. 분위기도 바꿀 겸 사비 250만 원을 들여 시작했죠. 경남대 음대 출신 반, 창원대 음대 출신 반을 섞어 시작했죠.”

- 당시에 남은 이야깃거리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첫 행사 이후 지역에서 뒷말이 나오더라고요. 지역 음악계에서 힘 좀 있다는 사람들이 저를 아니꼽게 본 거에요. ‘음악인도 아닌 게 나선다는 둥’ 뭐 등등. 이게 내 귀에 들어왔죠. 이때 ‘오냐 너희가 얼마나 대단하냐’ 생각하고는 다음부터 백남옥, 김관동, 엄정행, 신동호, 김태연 등등 당시로서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을 대거 초청했어요. 이후에는 실력적으로 안 되니까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요.”

- 본사 지원을 받는데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면서요?

“한번은 사장이 부산지역 지점장들 격려차 부산에 왔어요. 이를 듣고 초청도 안 했는데 저녁 만찬 자리에 찾아갔죠. 분위기 무르익을 때 사장님 옆 자리에 앉았서는 다짜고짜 ‘덕분에 잘 되고 있습니다. 음악회 감사합니다. 성공적으로 잘 하겠습니다’고 말했죠. 이랬더니 사장이 영문도 모르고 ‘그래 잘 해’라고 말해요. 이때는 내가 워낙 실적이 좋아 사장이 나를 눈에 두고 있었어요. 이렇게 어물쩍 답을 받고는 다음날 본사에 전화해서 ‘사장이랑 이야기 다 됐다. 사장이 해 주라고 했다’고 대뜸 지원금을 내놓으라 했죠. 담당 부서고 비서실이고 내막은 몰라도 사장이 하라고 했다니까 결재가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사장도 술자리서 약속 한 게 생각이 나니 안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제 전략대로 지원이 이뤄지게 되게 된 거죠. 추진력으로 밀어붙여서 지원을 따 낸 거죠.”

- 회사 지원은 어느 정도 이뤄졌습니까?

“이후 8회까지 무난하게 했죠.”

-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오페라 단역 등에 출연했다면서요.

“공식적으로 선 것은 아니고, 창신대 산학협동과정 다니며 음악 배울 때 오페라 <까발레나 루스타카나> 주교역으로 한 번, <라보엠> 등 거쳐 4~5번 정도 얼굴만 비췄죠.”

우여곡절에도 한결같은 음악사랑

- 본격적으로 성악을 배우신 과정을 설명해 주신다면요?

“앞서 김성중 씨한테 코르위붕겐 성악 교본을 받아 레슨을 받기로 했는데, 첫 레슨 받는 날이던 1991년 12월 31일 날 제가 서울로 발령이 난 거에요. 때문에 1년 동안은 서울 추계대학에 모 교수를 통해서 저녁마다 개인 레슨을 받았죠. 마산에 와서는 지난 1997년에 창신대에서 산학협동과정 모집 공고를 보고 야간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죠. 재밌는 게 오디션을 볼 때 반주자를 데리고 가야하는지 모르고 혼자 갔다가 떨어질 위기였어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심사위원들한테 ‘이왕 온 거 노래만 부르고 가겠다’하고 노래를 불렀죠.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잘 본 거에요. 덕분에 합격을 했죠. 이듬해엔 재학 중에 빈 서머스쿨도 다녀오고요.”

지난 2006년 공연된 경남오페라단 제13회 정기공연 오페라 '나비부인' 커튼콜.

- 오페라단을 맡게 되신 건 언제인가요?

“지난 2000년에 대우증권 본부장으로 있을 때 맡았습니다.”

- 맡으신 과정이 험난했다면서요.

“처음에 나는 경남오페라단 후원자였어요. 이때 최충경 회장하고 나하고는 후원자 중에서도 주력 멤버였죠. 그런데 오페라단을 만든 창원대 강영중 교수가 5회 공연을 준비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 틈을 비집고 지역 음악계 재야에 속하는 사람들이 당시 공민배 창원시장 선거대책본부장을 등에 업고 ‘창원오페라단’을 만든 거예요. 헌데 이쪽도 돈이 없고 후원이 따르지 않으니 제대로 된 운영이 어려웠죠. 이에 경남오페라단을 후원하는 주류 인사들이 창원오페라단에게 경남오페라단 역사를 계승하는 조건으로 흡수를 하라고 용인해줬어요. 이내 경남오페라단 이름으로 공연 준비를 하는데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2000년 9월에 실무를 보던 이들이 모두 손을 놔버린 거예요. 공연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말이죠. 때문에 이를 수습할 인사가 필요했는데, 당시 최충경 회장하고 나한테 의사 타진이 왔어요. 하지만, 당시 최 회장은 다른 도 단위 기관장을 하나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제가 한 달 동안 돈을 마련해 어렵게 공연을 치렀죠. 이후 적자가 극심해 오페라단을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후원 창구를 넓혔어요. 이렇게 사단법인 경남오페라단으로 전환한 후 현재까지 맡고 있죠.”

- 한때 그만두겠다고 공개선언을 하신적도 있다는데요?

“한 5년을 일하니 너무 힘이 들었죠. 그래서 2005년 성산아트홀 VIP실에서 지역 신문·방송, 은행장들, 기관장들 다 모였을 때 그만두겠다고 공개선언을 했죠. 정말 진심으로. 이 말을 듣고는 경남은행장이 다 같이 좀 도와서 계속하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이전에 막상 후원때문에 가면 앓는 소리하면서 입도 못 떼게 한 적이 많았거든요. 하는 수 없이 미안하지만 그만 하겠다고 손을 들었죠. 이러고 나니 당시 김혁규 도지사가 좀 보자고 하더군요. 만난 자리에서 경남은행장을 보라해서 찾아갔어. 이때 협의 끝에 구두로 3년 정기후원을 약속을 받았어요. 그런데 약속 이후 행장과 부행장이 모두 바뀝니다. 또 다시 비상이 걸렸죠. 다시 부랴부랴 도청에 찾아가 이번엔 김태호 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했죠. 이렇게 일을 맡다보니 계속하는 것으로 돼 버렸어요.”

- 오페라 단장으로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입니까?

“후원을 얻는 일이죠. 경남오페라단 예산이 한 해에만 7억 원이 소요됩니다. 이 가운데 그랜드 오페라 한 편에 5억, 나머지 갈라 콘서트와 이수인 가곡의 밤, 연말 후원의 밤을 2억 원 선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모두 후원으로 채우는 일이 만만치 않은 일이죠. 매년 경남도와 창원시, 경남은행 등지에서 나오는 스폰서십을 빼면 4~5억은 제 손으로 후원을 받아야 합니다.”

존폐 기로에 선 오페라단

- 경남오페라단 작품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작품은 뭔가요?

“꼽자면 세 개가 있습니다. 순수 지역 작품인 <논개>, 국내 초연작이었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그리고 지난해 올린 <춘향>이 생각나네요. 특히, <춘향>으로 지난해 제5회 대한민국오페라 대상에서 금상을 받았어요. 대한민국오페라대상이 창작 작품 이외에는 상에 인색한 편인데, 이번에 저희가 지역에서 만들어 금상에까지 올라 기쁨이 더했죠.”

지난해 공연된 오페라 '춘향'커튼콜.

-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는 작품은요?

“지난 2001년 <라보엠>이 기억나네요. 사단법인 전환 이후 도내 투어를 하다가 거창에서 사고가 났어요. 안전교육을 마치고 연습을 하는 도중에 배우가 그만 무대에서 떨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친 거예요. 우리는 최선의 보상을 다 했는데, 이분이 거창문화센터에도 배상을 청구했죠. 문화센터 측은 보험사를 통해 배상을 했고요. 그런데 이 보험사가 우리 쪽으로 다시 구상권을 청구한 거예요. 때문에 현재 우리 오페라단이 3500만 원에 이를 안 내면 매년 10% 이자를 물게 생겼어요. 문제는 이 때문에 현재 오페라단이 문을 닫게 생겼다는 겁니다. 기업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사정상 이 후원금을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 막막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 도내 오페라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근본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더 화려한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페라에 대한 편견은 오페라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집니다. 이들을 극장으로 부르고 편견을 걷으려면 제대로 만든 수준 높은 좋은 작품이 아니면 안 됩니다.”

- 앞으로 남은 꿈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꿈은 없고요. 현재보다 한 걸음 더 나은 삶을 살자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지난해 오페라 '춘향' 공연에 앞서 출연진과 함께.

삶의 모토를 ‘생각하면 행동하라’로 정해놓은 정찬희 단장. 언제든 열성을 쏟을 일을 찾고 행동을 실천해서 한 단계 한 단계 꿈을 이뤄가자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에서 어긋나지 않되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수십 년 간 돈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증권사 지역본부장 자리에, 한 해 연봉도 1억 6000~7000만 원 정도의 고수익을 내면서도 여윳돈으로 부동산 등 투기 목적의 자금 운용은 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강직한 성품을 읽을 수 있었다.

방 하나짜리 월세에서 시작해 두 칸 월세, 한 칸 전세, 두 칸 전세, 내 집 마련 후 현재 51평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남부끄러울 일 없이 착실하게 한 푼 두 푼 모아 안정된 생활을 이끌며 살아온 자수성가형 인생은 어려운 시대에도 ‘아이디어와 노력’ 하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표본과 같다.

더불어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지역에 문화예술을 살찌우는데 사회적 헌신을 다 하는 모습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역시 깨닫게 해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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