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재발견-창원] 철기시대의 흔적, 그 위에 세워진 계획·공업도시

창원에서 바다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삼귀지역(귀산동·귀곡동·귀현동)이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달랐다. 도심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지금 팔룡동 창원종합시외버스터미널은 조선시대 때 포구·염전이 있던 자리다. 봉곡동 지귀상가 일대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곳은 물고기 많기로 유명했다. 빨래하던 여인네들이 방망이로 대구를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때 명곡로터리 일대도 땅 아래 짠물이 흘러 식수로 이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해수면 변동으로 바닷물이 후퇴해 지금 모습에 이르고 있다.

'성산패총(城山貝塚)'은 이 지역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공단지역에 다소 뜬금없이 자리한 것과 달리 말이다.

'성산패총(사적 제240호)'은 삼한시대 조개껍데기무덤이다. 조개껍데기가 있었다는 것은 이 일대 역시 바다였다는 의미다. 이곳에서는 '야철지(冶鐵址)'도 발견됐다. 초기철기시대 쇠를 녹이던 장소다. 이는 곧 1970년대 기계공업단지 조성 명분이 되었다. 삶의 터전을 내줘야 하는 주민이 "왜 하필 우리 지역이냐"고 하면, 국가는 "선조들 야철지였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이 점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창원이 '철의 도시'라 불리는 배경이다.

초기철기시대 쇠를 녹였던 '야철지'.

이곳 사람들은 국가 개발 앞에 희생을 강요당했다. 옛 창원군에는 3개 면이 있었다. 창원면·상남면·웅남면이다. 계획도시 설계로 이곳 주민은 삶 터를 내놓아야 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난 1990년 '삼원회(三元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빛나는 창원을 이어가는 세 뿌리 모임'이란 의미다. 외지인이 90% 넘는 창원에서 이들은 '원주민' 자부심을 드러낸다.

자로 잰 듯한 계획도시는 주거·상업·공단 지구를 구분했다. 그렇다 보니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는 곳, 먹는 곳, 일하는 곳이 또렷이 나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음료수 하나 사기 위해 가게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와야 했다"고 전한다. 걸어서 가능한 생활권이 아니었다. 차가 필요했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자전거도 한 자리 차지했다. 잘 설계된 도로, 평평한 지형 덕에 자전거 타기 좋았다. '누비자' 같은 공용자전거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겠다.

'계획도시 창원'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하나 있다. 창원·마산·진해지역 경계에 자리한 '정밀공업진흥탑'이다. 1974년 착공한 창원기계공단을 기념하기 위해 1979년 세운 것이다. 높이 25m인 기다란 탑은 미사일 모양을 하고 있다. 방위산업기지 의미가 담겨있다. 탑 아래에는 '우리 민족사에 찬란한 정밀공업의 금자탑을 세우자'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 글씨가 새겨져 있다.

창원기계공단을 기념하기 위해 1979년 세운 '정밀공업진흥탑'.

북면 쪽으로 눈 돌리면 '마금산온천' 얘길 빼놓을 수 없다. 역사가 꽤 깊다. 조선 초부터 문헌에 등장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온정이 부에서 북쪽 18리 거리의 초미흘에 있는데, 욕탕이 3간'이라고 나와 있다. 즉 '당시 도호부로부터 북쪽 7km 지점에 있고, 욕탕 규모는 5.4m 정도'라는 것이다. 조선 초 이미 '각종 질환에 효험있는 온천'이라는 소문이 났다. 전국에서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귀찮을 일이었다. 이 때문에 폐쇄된 채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1927년 돼서야 어느 일본인 의사가 옛이야기를 듣고서는 다시 온천을 개발했다. 환자요양시설로 활용하면서 엄청난 이득을 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시간이 또 지나 자유당 정권 때는 이기붕 부통령이 요양을 위해 찾았다 한다. 정치인들 왕래가 잦아지면서 한동안은 그들만의 밀담 장소로 활용됐다. 1981년 온천지구로 지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창원을 두고 어떤 이는 '조각술이 뛰어난 고장'이라고 한다. 그 배경으로 드는 것이 몇 있다.
불곡사(佛谷寺)는 통일신라 10세기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는 보물 제436호인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佛谷寺 石造毘盧舍那佛坐像)'이 자리하고 있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모습 등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불곡사 일주문은 특이하다. 사찰 일주문 기둥은 보통 두 개다. 그런데 이곳은 네 개다. 창원도호부 객사 문으로 사용되던 것을 1934년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이 일주문 역시 화려한 조각이 담겨있다.

대암산 아래에는 일명 장군바위에 불상을 새긴 '삼정자동 마애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8호)'이 있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이 느껴진다.

장군바위에 불상을 새긴 '삼정자동 마애불'.

시선은 자연스레 김종영(1915~1982)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근대 대표 조각가다. 창원이 고향으로 소답동에 그 생가가 남아있다. 이 생가는 또 이원수(1911~1981)와 연결된다. 이원수가 작사한 '고향의 봄'에는 '울긋불긋 꽃 대궐'이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김종영 생가를 묘사한 것이다. 이원수는 양산에서 태어났지만, 동읍·소답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소답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원수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친일 작품 부분까지 함께 담고 있다.

친일 글 관련 부분이 언급돼 있는 이원수 문학관.

동읍 신방초등학교 뒤편 언덕에는 '신방리 음나무군'이 있다. 수령 400년 이상 된 것으로 1964년 천연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마귀를 쫓는다 하여 그 옛날부터 보살핌 받았다고 한다. 애초 일곱 그루였는데, 태풍 탓에 네 그루만 남았다.

도계동 쪽에는 '부부의 날 발원지'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매년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권재도 목사가 법정기념일 제정운동을 펼쳐 2007년 그 성과를 이뤘다. 권 목사가 활동하는 교회가 곧 '부부의 날 발원지'인 셈이다.

창원은 마산·진해와 합쳐지며 통합 창원시가 됐다. 창원이라는 지명은 1408년 처음 등장했다. 의창현(창원지역)·회원현(마산지역) 중간 글자를 따왔다. '창'이 '원'보다 앞에 있는 것은 좀 더 번성했다는 의미겠다.

창원 국가산업단지 전경. 

이후 1908년 창원부·웅천군(진해)이 통합돼 창원부가 됐다. 1914년에는 마산부와 창원군으로 분리됐다. 1931년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됐다가 1955년 진해시로 승격 분리됐다. 1973년에는 상남면·웅남면·창원면이 마산시에 편입됐고, 웅천면은 진해시에 편입됐다. 1980년 창원시 설치로 창원군은 의창군으로 개칭됐다가 1991년 다시 창원군으로 돌아갔다. 1995년 동면·북면·대산면이 창원시로, 진전·진북·진동·구산·내서면은 마산시로 편입됐다.

그러던 것이 2010년 7월 창원시·마산시·진해시가 합쳐진 통합 창원시가 탄생했다.

결국, 창원·마산·진해는 헤쳐모여를 반복하다 오늘날 하나가 된 것이다. 통합 단계 이후 지금까지 시 명칭·청사 문제 등을 놓고 갈등 골이 깊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럴 일도 아닌데 말이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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