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후의 2000km 걷기] (5) 희망없이 행복하라

낡은 성당 부속건물 다락에 들어선 숙소. 비스듬한 지붕 아래 매트리스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하고, 나 역시 비스듬히 누운 저녁, 순례자들의 왁자한 수다 사이로 조용히 흐르는 모차르트를 듣고 있자니, 누군가가 왈칵 그리워졌다.

1.
새벽.
일출을 등지고 걷는다.
어스름 하늘은 강렬한 스페인 색.
붉은 대지와 그 흙으로 만든 집도 스페인 색.
시골 마을 그 라벨 없는 싼 포도주도 스페인 색.

/사진 이서후

2.
낡은 성당 한구석에서
조용히 촛불의식이 벌어졌다.
내가 말할 차례가 되자
나는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 길 위에서 행복하기를
이 길이 끝나고도 행복하기를.

모두가
마치 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사진 이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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