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허영? 기골 있는 이단으로 불러다오

숨겨진 마이너를 사랑하다

80년대 초엽 이야기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음악을 무척 사랑했던 아티스트(?) 한 사람을 알고 지낸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흔히 보기 힘들던 트롬본을 연주했는데, 키도 크고 노래도 잘하는 편이어서 속으로 ‘스타일과 트롬본이 꽤 어울린다’고 느꼈다.

하루는 밴드 생활을 하던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트롬본 이게요! 미래가 없는 악기예요! 그래서 드러머로 전향하려고 해요” 그가 종목을 변경했는지는 이후 연락이 끊겨 확인하지 못했지만, 당시 그 말을 듣고선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7인조 밴드에서 색소폰, 트럼펫과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던 그였기에 속으로 “저 멋진 악기가 사라지다니!”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뉴웨이브니 뭐니 하며 전자 음악이 밀물처럼 짓쳐들어오던 시대, 대중음악 공간에서 트롬본이 설 자리는 없었다. 비주류, 혹은 마이너 음악에 대한 관심과 공감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떠밀려 사라진 멋진 악기 트롬본

재즈를 즐겨들은 지 어언 30년. 위대한 명인들이 남긴 족적에 환호하고, 재즈가 지닌 ‘천변만화 질감’을 변함없이 찬양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때 느꼈던 ‘슬픔’이 아직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니 유달리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음을 느낀다. 여기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악’이란 이른바 ‘주류’로 대접받지 않는 모든 음악, 아티스트를 통칭하는 나만의 조어(造語)다.

론-카터-스패니쉬-블루.

집에 소장하고 있는 재즈 앨범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래도 개중에는 색깔 있는 앨범이 몇 된다. 거장 베이시스트 론 카터(Ron Carter)가 1975년에 녹음한 <스패니쉬 블루(Spanish Blue)>는 그런 앨범 중 하나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풍 음률이 앨범 전반을 지배하는 독특한 작품인데, 오래전 후배에게서 선물 받은 후 지금까지 애청하는 음반이다. 론 카터의 음악적 넓이를 지긋이 느끼면서 플루티스트 휴버트 로(Hubert Law)가 전개하는 멜로디를 듣노라면 정통 주류 재즈에서 느끼지 못하는 묘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 감정이란 슬픔, 아련함, 후회와 같은 상념들이다. 이런 상념들은 곧잘 욕심을 제어하고, 정신을 순화시킨다. 그런가 하면 마이너, 비주류에 대한 동질감도 강화시킨다.

Hubert-Law.

스패니쉬 블루 그리고 버디 에몬스

페달 스틸 기타리스트인 버디 에몬스(Buddy Emmons)는 재즈에서 비주류 악기인 ‘스틸 기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단박 나를 사로잡은 사람이다. 팝이나 컨트리에서 자주 쓰이는 이 악기는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눕힌 기타라고 보면 된다. 에코음이 풍부해 대중음악을 잘 뒷받침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음이 늘어지기 때문에 재즈-특히 박자가 빠른 비밥사운드-와는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다. 하지만, 처음 앨범 <Steel Guitar Jazz>를 들었을 땐 “어! 굉장한데!”라는 감탄사가 바로 튀어나왔다. 스틸 기타 톤을 유지하면서도 재즈와 멋들어진 궁합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주류 악기가 가끔 싫증 날 때면 버디 에몬스를 듣곤 한다. 그 기저에 마이너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Buddy-Emmons.

회사에서 받아보는 정기 간행물 중에 <재즈피플>이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전문 재즈월간지다. 지난해부터인가 ‘숨겨진 명반의 재발견’이란 이름 아래 잊혀진 1960~70년대 명반을 더듬는 기획이 실리고 있는데, 참여 필자들이 펼치는 해박한 재즈 이야기에 늘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2012년 9월호는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었다. 몇 년 전 레코드점에서 구입한 조 자비눌(Joe Zawinul)의 <The Rise & Fall Of The Third Stream>이 ‘명반’으로 소개돼 있는 게 아닌가!

제목도 근사했다. ‘재즈와 클래식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보고서’였다. 이런 제목을 붙일 만큼 복잡한 좌표에 위치한 음악이기도 하지만, “ 의미 있는 앨범을 고른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뿌듯함 때문에 어깨가 더 으쓱거려졌다.

잊혀진 음악은 서럽다

사실 음악이란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세월이 흐르면 ‘단순 요약의 길’을 걷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시점에서 60년대를 대표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남긴 대표작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가 지닌 음악 세계를 폭넓게 조명할 시간과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틀즈를 되새김질 하는 음악 프로가 있다고 치자. 그 프로에 <Yes It Is>나 <If I Fell>같은 발라드 명곡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죄다 우수마발이 즐겨듣는<Let It Be>류다.

재즈도 마찬가지다.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 베스트 앨범에서 <When You're Smilin'>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특히 사랑한 이 넘버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동반자 레스터 영(Lester Young)과 펼친 연주 중 단연 최고다. 요즘 광고음악으로 종종 나오는 바람에-물론 딴 가수 버전이지만-다소 김이 새긴 했지만.

그래서 잊혀진 음악이나 아티스트는 서럽다. <숨은 명반>시리즈에서 보듯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일러 ‘숨어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것들이 부러 숨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조명을 주지 않으니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지적 허영? 기골 있는 이단으로 불러다오

마이너, 비주류에 대한 공감은 그러나 한편으론 음악 하는 이들이 종종 드러내는 ‘지적 허영’이기도 하다. “난 당신들이 모르는 이런 음악을 좋아해! 그러니 날 인정하라구!” 듣는 사람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다. 나 또한 알게 모르게 그걸 즐기고 있다. 포켓 트럼펫 연주자 돈 체리(Don Cherry)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은 흡사 그런 나를 비웃는 듯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21세기 음악 신(Scene)에서는 재즈 또한 비주류가 아닌가! 프랑스 역사가 이폴리트 텐은 ‘기골 있는 이단(異端)’이란 말을 쓴 적이 있다. 주류를 인정하되 거기에 영합하고 매몰되지 않는 ‘기품’을 말한다. 지적 허영이란 단어 대신 비주류와 마이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 정도로 표현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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