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스페인’ 희망없이 행복하라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길을 여전히 멀고, 등산화는 비에 젖은 지 오래고, 우비마저 무겁다고 느껴져,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그 순간, 몇 시간째 인적이 없던 그 길에, 낡은 페도라를 쓰고 우산을 받쳐 든, 구부정한 할아버지 한 분, 불쑥 나타나 이봐! 힘내! 소리치고는 저만치 걸어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할아버지마저 사라져버리면, 이 길 위에서 더는 누구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그를 쫒아 어기적거리기 시작했다.

1.
이제부터 우린
은하수를 따라 걷게 될 거야,
라고 캐린이 말했다.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꼬박 사흘을 걸어
피레네 산맥을 넘고 난 뒤였다.

‘2012년 5월 스페인’ / 사진 이서후

그건
이제부터 서쪽을 향해
걷게 될 거란 말이다.
그 끝에
콤포스텔라
즉, 별들의 들판이라 불리는 도시
산티아고가 있다.

‘2012년 5월 스페인’ / 사진 이서후

2.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강을 따라
닷새를 더 걷고서
나는 캐린과 헤어졌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다.

종일 비가 내렸다.
안내서에도 없는 길을 걷다

그리하여 결국,
이곳 팜플로나에 왔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산 페르민 축제 때
소떼와 사람들이 뒤엉켜 달리는
골목을 따라
헤밍웨이 동상이 있는
투우장까지 걸었다.
그저 덤덤했다.
그때 저 앞으로
개를 앞세운 여자가
우아하게 길을 건너는 걸 보았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 도시에 온 이유.

‘2012년 5월 스페인’ / 사진 이서후

그건
헤밍웨이 때문이 아니었다.
일주일을 같이 걸으면서
익숙하고 편해진
캐린을 떠나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오롯이 혼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제
진짜
페레그리노(순례자)가 된 것이다.

별들의 들판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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