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제대로 된 소리꾼 되는 게 목표지요”

약속장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에 있는 어느 전통찻집이었다. 먼저 도착해 잠시 기다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리꾼 박선희(47) 씨가 곧 나타났다.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전화통화 때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던 그 느낌 그대로다. 남편도 동행했다. 남편이 함께 나온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30대 중반 ‘판소리’에 빠져들다

박선희 씨는 그 오래전부터 국악에 관심 많기는 했다. 하지만 어찌할 여건은 못됐다. 집안 어른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귀 기울이는 정도에 만족했다.

소리꾼 박선희 씨./박일호 기자

고향 울산에서 20살 때 창원으로 왔다. 오빠·언니가 하는 인쇄소에서 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돈 벌기 위해 찾은 이곳에서 풍물패 경험을 하게 된다.

“1990년대 초 창원지역은 노조 결성 바람이 한참 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풍물패도 활성화됐죠. 지금 국악단 소리바디 고문이시기도 한 신성욱 선생님과 그때 인연을 맺었죠. 그러면서 풍물패 ‘문지방’ 창단 멤버로 참여하게 됐어요. 장구도 배워가며 국악이라는 걸 제대로 접할 수 있었던 시기였죠.”

그렇게 몇 년간 활동하다 32살 때 결혼을 했다. 자연스레 국악도 손 놓게 됐다. 하지만 그 열망은 마음속에서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던 듯하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소리꾼 박선희 씨./박일호 기자

“소리 배우는 동생과 함께 안숙선 선생님 공연에 갔습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라서 공연장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모니터로만 봤죠. 넋을 잃고 보고 있는 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안내원이 공연 중반 즈음에 들여보내 주더라고요. 들어가서는 판소리를 듣는데 뭔가 전율 같은 게 느껴졌어요. 지금 이 길의 시작이었던 셈이죠.”

그때부터 판소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서울 쪽에 있는 분들을 통해 배우려 했다. 그러다 아는 동생 소개로 대구에서 활동하는 주운숙(60)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까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분이다.

마흔을 앞두고는 대학 욕심도 났다. 주위에서는 말리기도 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이론 배울 시간에, 오직 실기에만 땀 흘리는 게 낫다는 조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 생각대로 실행에 옮겼다. 옳은 선택이었다. 대학 공부까지 하면서 국악에 대한 눈은 한층 넓어졌다.

그런 시간 속에서 이제 소리꾼 길에 접어든 지 10년 가까이 된다. 창원에 ‘박선희 판소리 연구소’를 마련해 개인 연습뿐만 아니라 교습도 하고 있다.

며느리․아내․엄마…

박 씨는 현재 중3 아들, 초등학교 6학년 딸,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두고 있다. 여전히 엄마 손을 타야 할 나이들이다.

“판소리를 막 시작했을 때 막둥이는 100일도 채 안 됐었죠.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연습실에 다니고 그랬지요. 한여름에 소리를 하면 등에 업힌 아이는 더위에 축 늘어져 있기도 했죠. 엄마로서 참 못할 짓이었죠.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물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내 욕심만 채워도 되느냐는 생각에 좌절과 갈등도 많이 했죠.”

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역시 가족이었다. 특히 시아버지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조언뿐만 아니라 힘나는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또한 멘토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저희 시아버님이 저에게 그런 멘토셨습니다. 시집살림 초기에 음식을 못해 찌개를 국으로 만들기도 했죠. 그래도 야단은커녕 칭찬만 하셨어요. 늘 식사하시고 나서는 ‘잘 먹었다’가 아닌 ‘고맙다’는 말을 건네셨어요. 제가 뒤늦게 소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시아버님이 계셨기 때문이죠. 어린아이들 걱정 없이 바깥 공연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든든한 시아버지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남편 역시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런데 시아버지와는 좀 다르다. 묵묵히 지켜봐 주며 기운을 북돋워 줬다.

“저한테 ‘뒤늦은 나이에 소리를 왜 하려 하느냐’라고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반대해도 제가 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사실 판소리 하기에는 제 목소리가 많이 가는 편이에요. 남편은 그게 늘 걱정되나 봅니다. 연습하러 가는 3년 동안 했던 말이 있어요. ‘그 목소리로 소리해도 되는지 선생님께 다시 물어봐라’고 말이죠. 제 목이 다칠까 봐 늘 걱정이 되나 봅니다.”

소리꾼 박선희 씨./박일호 기자

잘 챙겨주지 못한 아이들도 참 고마울 따름이다. 엄마가 소리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니 말이다.

“5살 된 막둥이와 함께 유치원에 갔더니, 선생님께 한참을 ‘우리 엄마예요, 우리 엄마예요’라면서 자랑하더라고요. 소리를 하고 파김치가 돼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과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죠. 그러면 아이들이 ‘엄마, 말하지 말고 손짓으로 우리한테 시켜’라며 오히려 도와줘요.”

이런 가족들을 떠올리면서 박 씨는 한 마디 덧붙인다.

“저는 참 복이 많은 여자인가 봐요.”

인터뷰 자리 함께한 남편

소리하는 이들은 ‘100일 공부’라는 것을 한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소리에만 집중한다.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골짜기면 더 좋다. 한번 들어가면 15~20일가량 바깥세상은 잊고 지낸다.

“보통 여름․겨울 두 번에 걸쳐 공부하러 들어가죠. 저는 8년째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움막 같은 데서 생활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펜션과 같은 연수원에서 생활하니 괜찮은 편이죠. 사람 없는 산골짜기다 보니 소리 공부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한 음이 틀리면 그 음을 맞추기 위해서 100번 그 이상을 연습합니다. 말 그대로 수련이죠.”

그렇게 공부를 끝내면 기운이 다 빠져 버린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배도 따끔따끔한 지경에 이른다. 그래도 그렇게 공부 마치고 돌아오면 아주 가볍고 시원해지는 느낌이 전해진다.

박 씨는 지난해 말 공연을 끝내고 올해 초 소리공부에 들어갔다. 경북 경주에 있는 어느 산골 자락이다. 그런데 주말을 이용해 잠시 나올 일이 있었다. 소리 공부 흐름이 끊겨 좋을 리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국악 일과 관련해 서류 떼고 제출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들어가면 한동안 가족 얼굴을 못 본다. 인터뷰 자리에 남편이 동행한 이유다.

남편은 “저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두 분 편하게 대화하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무심히 창문 너머 경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아내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 기울였다.

남편은 창원시 창동에서 ‘해거름’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고굉무(49) 씨다. 1980년에 문을 연 해거름은 너덜너덜한 LP판 수천 장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고 사장은 6년 전 이 가게를 이어받았다.

박 씨는 남편 이야기를 잠깐 했다.

“음악 듣는 걸 그렇게 좋아하더니,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아예 카페를 넘겨받았더랬죠. 가게에 가보니 혼자 밀대를 밀며 청소하는 뒷모습을 봤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런데 남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흥얼하는 거예요. 어쩌겠어요. 제가 뒤늦게 판소리를 시작했듯이, 남편도 말린다고 될 게 아니란 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장르는 다르지만 늘 소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으로 남편 카페에서 박 씨가 판소리 공연하는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두 사람은 “그럴 계획은 없어요”라면서도 “언젠가는…”이라는 꼬리표를 두기도 했다.

소리꾼 박선희 씨./박일호 기자

‘설 멋지게 하지는 마라’

박 씨는 여전히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소리꾼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오기로 버티며 끈기있게 가려 한다.

“소리라는 게 참 야속해요. 하루만 게을리해도 차이가 납니다. ‘하루를 쉬면 목이 알고, 이틀을 쉬면 청중이 안다’는 말이 있어요. 소리는 수행과 같은 거죠. 매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그 과정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죠. 특히 저같이 뒤늦게 시작한 사람은 더더욱 그렇죠. 스승인 주운숙 선생님으로부터 ‘설 멋지게 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어쭙잖게 하지 말라는 거죠. 남들보다 뒤늦게 시작한 저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말이기도 하지요.”

박 씨는 스스로 “아직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말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했다. 이 때문에 인터뷰 요청에 몇 번 사양하기도 했다. 그래도 먼 훗날 자신의 모습을 얘기할 때는 눈빛이 달라진다.

“올해 목표는 3~4시간에 걸친 ‘심청가’를 완창하는 것입니다. 흥이 나는 부분이 많으면 좀 나은데, 심청가는 슬픈 대목이 많아 몹시 어렵죠. 올 하반기에 완창 도전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판소리에 대해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 있도록 제가 도움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생각으로 열심히 가고 있지만, 나중에 머리 하얘졌을 때도 소리를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옆에서 듣던 남편이 거들었다.

“끝까지 가는 사람이 남는 겁니다. ‘우리 지역에서 제대로 된 소리꾼이 되겠다’가 목표가 되어야지요.”

인터뷰가 끝나자 두 사람은 나한테 점심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다른 약속도 있었거니와, 설령 없었더라도 두 사람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박 씨는 다음날 다시 경주 산골짜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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