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진주] 천년을 이어온 자존심, 진주사람 자존심 그 자체

덕유산과 지리산에서 솟은 물줄기가 진양호에서 만나 진주를 가로지른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넉넉한 '남강'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면 진주 안에서 남강 끝물은 대곡면과 지수면 사이가 된다. 적당히 굽은 물길과 하얀 모래밭이 호젓하게 펼쳐진 곳이다. 손을 덜 탄 풍경은 진주 시내에서 보는 그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드러낸다.

대곡면을 지나는 국도를 따라 북으로 향하면 단목리 입구에서 큰 비석 하나와 마주친다. '세덕사묘정비(世德祠廟庭碑)'라고 새긴 비석 뒤에는 진양 하씨 시조를 모신 사당 '세덕사'가 있다. 단목마을은 강씨·정씨와 더불어 진주 3대 성씨(姓氏)로 꼽는 하씨 집성촌이다. 마을에서 가까운 남강까지 거리는 1.6㎞ 정도. 그 사이 펼쳐진 너른 들판은 500여 년 전부터 이곳에 터를 정한 이들을 보듬었다. 예부터 아쉬울 게 없던 부촌(富村)이라는 여기 사람 말은 땅만 둘러봐도 그럴듯하다. 그렇더라도 이곳이 진주를 대표하는 부촌일 리는 없다. 그저 넉넉한 살림을 허락한 땅이 진주 울타리 안에 고루 뻗쳤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강·하·정씨를 비롯해 진주가 본관인 성씨(姓氏)는 80개다. 나라 안에서 경주(87개) 다음으로 많다. 본관이 자리매김한 시기는 대략 고려 초기로 본다. 진주는 통일신라시대 9주, 고려시대 12목 가운데 하나다. 오래전부터 왕이 지방을 다스리는 거점으로 삼은 땅이었다. 왕과는 통해야 했고 세가 뻗치는 땅에는 엄해야 했던 곳에는 늘 그런 일을 맡은 이들이 살았다.

진주에는 이미 일가(一家)를 이룰 만한 인물이 많았다. 진주가 불러들인 인물은 또 그 이름으로 진주를 널리 알렸다. 뭇사람조차 '진주 출신'이라는 소개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을 테다. 성씨 앞에 붙일 본관으로 삼기에 진주는 충분히 잘난 고장이었다. 그 위상은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오늘날에도 유난스럽다는 진주 사람 자존심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진양호.

울타리 안에서 아쉬울 게 없던 곳

진주에서 높은 산이라고 해봤자 600m를 넘지 않는다. 집현산(577m)을 비롯해 방어산(530m), 오봉산(524.7m) 등이 이곳에서 높다고 할 수 있는 산이다. 그나마 이 산들은 진주 외곽에 있어 산줄기가 안쪽까지 미치지 않는다.

진주시 전체면적(712.8㎢) 가운데 높이가 100m 이하인 땅은 69%, 300m를 넘는 땅은 고작 1.5% 정도다. 진주는 구릉과 너른 들판이 대부분인 곳이다. 이는 곧 남강이 위·아래로 펼쳐놓은 들판 덕을 고루 본 지역이라는 말이 된다.

망진산 봉수대에서 본 진주시내.

진주 안을 대강 둘러봐도 농사지을 땅이 아쉬운 마을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 땅은 옛 기록에 빠짐없이 적어놓을 만큼 매우 기름졌다. 여기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 때문에 굳이 바깥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됐다. 부족할 게 없는 이들은 어디서든 굽힐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여유는 변화에 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들이닥친 숨 가쁜 산업구조 변화에 진주 사람들은 예민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밖에 있었다. 근대 들어 이 나라 산업구조 재편은 철도와 항구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 중심에서 벗어난 땅은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변방 취급을 받았다. 1920년대 들어온 근대식 산업시설인 견직공장은 산업이 진주 환경을 탐한 것이지 여기 사람들이 산업을 탐낸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는 변화는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에게 볼썽사나운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일찍 자리매김한 섬유산업은 서서히 규모를 키우며 진주 산업을 이끈 바탕이 되기는 한다. 특히 1960·1970년대 정부는 섬유산업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이때는 전국 상인들이 진주비단을 사고자 진을 쳤다고 한다. 이어 1978년 상평공단 조성을 계기로 진주 섬유산업은 더욱 덩치를 키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진주비단 명성은 이때 바탕을 다진 것이다.

그렇더라도 산업에서 특징을 찾아 진주 앞에 이름붙이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너른 들판에서 나는 작물이 풍부하다 해도 진주는 농업을 앞세우는 도시가 아니다. '공업도시'라는 수식은 오히려 머쓱한 편이다. 관광으로만 먹고사는 도시도 아니고, 상업이 유난히 발달한 소비지역도 아니다. 이 같은 애매한 특성은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농가인구가 4만여 명으로 가장 많으나 33만 명이 넘는 진주 인구 가운데 10%를 겨우 넘기는 정도다.

제조업 종사자는 1만 3000여 명, 도·소매업은 1만 7000여 명, 숙박·음식업이 1만 3000여 명이다. 부족한 게 없는 도시는 대놓고 내세울 게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굳이 진주를 수식할 말을 찾는다면 '교육'이겠다.

진주 학생 인구는 8만여 명, 교육서비스업 종사자는 1만 2700여 명이다. 진주 사람 3~4명 가운데 1명은 학생 또는 선생이거나 교육 관계자인 셈이다. 경상대(가좌동)·한국국제대(문산읍 상문리)·경남과학기술대(칠암동)·진주교육대(신안동) 등 6개 대학을 비롯해 진주지역 초·중·고·대학교는 91개다. 특히 1923년 개교한 진주교육대는 영남권 최초 교육대학이다. '영남을 가르친 선생들이 진주에서 배웠다'는 여기 사람들 자랑은 근거가 분명하다. 진주 교육은 그 뿌리 또한 깊다. 경남 최초 근대식 학교인 '진주소학교'는 1895년 문을 열었다. 경남 최초 교육기관인 '진주향교'(옥봉동)가 창건된 해는 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에도 근대에도 경남 교육 시발점은 진주다. 오래전부터 진주는 '교육 도시'였다.

남강이 있기에…

해마다 10월이면 진주 안에 어여쁜 빛은 죄다 남강 위에서 흐드러진다. '진주남강유등축제'이다. 2002년 처음 시작한 유등축제에는 해마다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참여한다고 한다. 오늘날 진주는 물론 경남을 대표하는 축제다. 유등축제는 진주와 남강이 지닌 매력을 가장 짧은 시간에 극적으로 보여준다.

남강유등축제.

같은 시기에 진행하는 '개천예술제'는 나라에서 가장 오래됐고 규모가 큰 종합문화예술축제로 이름이 높다. 1949년 '영남예술제'로 시작한 축제는 1959년부터 '개천예술제'라는 이름을 얻었다. 행사 기간 문학·음악·미술·연극을 비롯해 8개 분야 예술 경연과 문화·전시 행사, 민속놀이가 진행된다. 진주 문화가 품은 유·무형 자산은 이 기간 아낌없이 쏟아진다. 개천예술제 무대 역시 진주성과 남강이다.

진주가 몸뚱이라면 남강은 척추다. 강은 너른 들판을 이 땅에 안겼고, 진주는 그 들판을 밑천 삼아 예부터 중심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강이 아니었다면 진주성 역시 경남에 흔한 산성보다 나을 게 없다. 성을 감싸고 도는 물줄기는 아군에게는 든든했고 적군에게는 늘 버거웠다. 임진왜란(1592년) 때 관군이 뭍에서 거둔 첫 승리는 진주성 싸움이었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다.

진주성.

진주 목사 김시민(1554~1592)이 진주성에서 적을 맞은 것은 1592년 10월이었다. 성을 포위한 왜군 2만여 명과 맞서 김시민이 지휘하는 병력은 고작 3800여 명. 김시민은 7일 동안 공방전을 버텨내며 적을 물리친다. 하지만, 자신은 적이 쏜 총알에 맞아 죽는다.

왜군은 이듬해 6월 진주성을 다시 공격한다. 9만 3000여 명에 이르는 왜군 정예부대는 진주성을 모질게 몰아붙였다. 8일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결국 진주성은 무너진다. 이 전투로 왜군에게 죽은 사람은 7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늘 베풀기만 하던 남강도 이번 만은 진주 사람 피를 흘려보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주 기생 논개(?~1593)가 왜장을 껴안고 '의암(義巖)'에서 남강으로 뛰어든 것도 이맘때다.

촉석루.

나라 안에서 최고로 꼽는 누각 '촉석루' 역시 남강 덕을 봤다. 비록 집 생김새가 빼어나긴 하나, 남강이 없었다면 '제일'이라는 이름까지 얻기는 어려웠을 테다. 잘생긴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의젓한 물줄기는 주변 풍경과 더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곤 했다. 나라에서 글 좀 쓴다는 묵객들은 촉석루에 저마다 글귀 하나씩을 남기곤 했다. 더불어 누각은 벼슬아치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고 그 유흥을 널리 퍼뜨리는 곳이기도 했다.

강은 평민들에게도 살가운 곳이었다. 아낙들은 강가에서 빨래를 했고, 넓은 모래밭에서는 소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사람들이 뒤엉켜 놀던 곳은 일이 있을 때면 집회 장소로 적당했다. 아울러 강을 낀 주변 풍경, 특히 '새벼리'·'뒤벼리'라 불리는 강가 벼랑은 늘 보는 사람들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풍경이다.

여유로운 사람들이 누린 멋과 가락

진주수목원.

유흥을 찾던 옛사람들에게 으뜸은 평양 기생, 버금은 진주 기생이었다. 진주에 부임한 벼슬아치들이 한양에서 누렸던 유흥은 주로 교방을 통해 이식됐다. 여기 사람들은 유흥과 음식 모두 한양 출신 어른 입맛에 맞춰야 했다. 그 솜씨가 제법 괜찮았는지 진주에서 즐기는 유흥은 나라 안에서도 유명했다. 오늘날까지 진주에 남아 있는 무형 자산은 대체로 한양 것이 교방으로 이식되는 경로를 따랐다. '진주검무'는 그런 자산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으로 꼽힌다. 진주검무는 춤 전반부에 색한삼을 양손에 끼고 추는 게 특징이며 옛 궁중 검무 원형을 잘 보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진주검무는 중요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됐다. 이와 더불어 놀이춤 '한량무', 궁중가무 '진주포구락무', '진주교방굿거리춤', '신관용류가야금산조' 등 멋스러운 몸짓은 경남도가 지정한 무형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진주시전통예술회관(판문동)은 이 같은 귀한 춤사위를 보존·전승하고 있으며 정기공연도 한다.

교방문화가 지킨 옛 멋과 흥은 진주 출신 예인에게 이어진다. 특히 이 나라 대중가요는 여기 출신 예인들에게 진 빚이 많다. 먼저 국내 첫 창작가요 〈강남 달〉을 작사·작곡한 김서정(본명 김영환·1898~1936)이 진주 출신이다. 김서정은 이후 〈세 동무〉·〈봄노래〉·〈강남제비〉 등을 발표하며 창작가요 시대를 열었다. 대중적으로는 훨씬 알려진 가수 남인수(1918~1962)도 진주 출신이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황성옛터〉·〈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1000여 곡을 불렀다.

이밖에 〈타향살이〉·〈목포의 눈물〉·〈아빠의 청춘〉 등을 작곡한 손목인(본명 손득렬·1913~1999),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 더욱 유명한 작곡가 이봉조(1932~1987), 〈대머리 총각〉·〈육군 김 일병〉 등 대중가요를 비롯해 〈개구리 왕눈이〉·〈아톰〉 등 만화영화 주제가도 작곡한 정민섭(1940~1987) 역시 진주 출신이다. 이 같은 흥(興)은 오늘날 진주 사람들 유전자에도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기개 앞에서 오히려 하찮았던 신분

전통이 뿌리깊은 고장에서 신분 차이는 엄했다. 하지만, 신분은 달라도 진주 사람은 진주 사람이었다. 정도를 넘어설 때는 받아칠 줄 아는 결기는 여기 사람들 성정이었다. 그 성정은 논개를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祠)'에 시를 남긴 기생 산홍에게서 엿볼 수 있다. 기생 산홍은 을사 5적으로 당시 권세가 드높던 이지용(1870∼1928)이 첩을 삼으려 하자 매몰차게 거절하고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고도 이지용이 단념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

1862년 일어난 진주농민항쟁 또한 가혹한 수탈에 대항한 조직적인 농민 운동이었다. 비록 항쟁은 10여 일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퍼져 나가는 마중물이자 30여 년 뒤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진 불씨가 됐다.

형평운동기념탑.

이 나라 근대사를 통틀어 눈여겨봐야 할 인권해방운동 가운데 하나인 '형평운동'이 일어난 곳도 진주다. 1894년 갑오년 칙령으로 평민이 된 백정들은 제도로는 평등했으나 관습으로는 차별받아야 했다. 모진 사람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있는 것도, 백정 자식이 자기 자식과 공부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러운 백정들은 당시 신지식인 강상호(1887~1950)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강상호를 비롯한 지식인층은 그 당연한 호소에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해 답한다. '백정은 인간이 아니더냐'로 시작하는 '주지문'은 1923년 5월 13일 진주 시내에서 선포된다. 이후 형평사는 이 운동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단체에 맞서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하지만, 이듬해 형평사 지도부 사이 분열을 시작으로 활동이 움츠러들면서 1935년에는 기능을 거의 잃게 된다. 석류공원(가좌동) 입구에는 형평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강상호 무덤이 있다. 그리고 지난 1996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진주성 앞에 '형평운동기념탑'을 세웠다. 두 남녀가 문을 지나 하늘로 곧게 뻗은 평행선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한 이 기념탑이 담은 의미는 오늘날에도 무겁다.

진주정신

'진주 오방리 오방재'(미천면)는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1347~1416)과 아버지 하윤린, 조부 하시원을 모신 재실이다. 오방재 뒤로 산길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면 하륜 일가 묘가 있으며, 50m 정도 더 들어가면 하륜 묘가 나온다. 이들 하씨 문중 묘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무덤 양식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 귀한 자료로 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심지였던 진주는 조선 초기 영의정을 내면서 그 위세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조선 말까지 1000년 남짓 중심지로서 위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1896년 이곳에 경남도청이 들어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들어 진주는 느닷없이 변방이 된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떠나고 지금까지 진주는 낯설기만 한 변두리 처지에 머물고 있다. 애초에 없던 사람들보다 가졌던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 느끼는 설움은 더욱 컸다. 어디서 주눅이 들 일이 없었던 진주 사람들은 뿌리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내려다보는 꼴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러운 만큼 오기는 더욱 단단해졌다. 유난스러운 진주 사람들 자존심이 바깥사람과 부딪치는 일은 예전보다 잦아졌다.

마진리 이씨 고가.

애초부터 넉넉한 사람들은 아쉬울 게 없었다. 배움도 깊었고 흥을 즐길 줄도 알았다. 그냥 놀았던 게 아니라 나라에서 가장 고급문화를 누렸던 사람들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부딪칠 줄 아는 결기 또한 남달랐다. 여기 사람들 얘기에 종종 섞여 나오는 뿌리 깊은 '진주정신'은 그렇게 여물었고 단단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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