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노래 흥얼대며 대학건물 청소하는 나의 어머니

나는 경남대 신문방송학과 학생이다. 수업 시간에 ‘인터뷰 실습’ 과제를 받았다. 본능적으로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나를 가장 사랑하고 또 사랑해줄 어머니 이경숙(1966년생) 씨다. 돈 한 푼 낭비하는 일이 없고, 항상 가족을 사랑하며, 퇴근하자마자 가족들 저녁밥을 지으시는 어머니. 이번 과제를 계기로 어머니에 대해, 그동안 모르던 사실을 새로이 알 수 있음에 나에겐 뜻 깊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인터뷰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일교차가 큰데 감기에 걸리진 않으셨나요?

“열심히 일 하고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하는 편이라 잔병은 잘 안 걸려요. 오히려 지금 감기 걸린 아들 녀석이 걱정이죠.”(웃음)

너무도 어린 날의 생이별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싶어요.

“9남매 중에 6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왕손의 후손이라 재산이 많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친척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고 목숨까지 노렸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살기 위해 도망을 나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하셨대요.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 후 사랑과 가족이라는 정이 고파서 자식을 많이 낳게 되었어요. 어려운 형편 때문에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진 와중에 저까지 태어나게 된 거죠. 그렇게 지내고 있었는데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 당시 아버지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희귀한 꽃을 파는 일을 업으로 삼으셨는데, 단골 손님이던 한 부부가 키울 아이가 필요하다고 집에 간청을 했다고 해요. 어릴 적의 나는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원래 자식이 많고 살기가 어려워 제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과 함께 양부모님의 집으로 가게 되었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혹시 기억이 나시나요?

“죽고 싶었죠. 어리긴 했어도 함께 살던 가족과 어느 날 갑자기 생이별을 해야 하는 것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손에 이끌려서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게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슬픈 이야기네요. 양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양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오고, 양어머니는 서울대를 나왔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쌓으신 분이었어요. 교양과 인정이 넘치셨죠. 양부모님은 슬하에 아들이 3명 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딸을 가질 수가 없었대요. 그러던 중에 저를 들이게 됐죠. 이것도 예전이니까 가능한 이야기네요.”

냉정하게 보면 다행인 부분도 있는 것 같네요. 양부모님이 잘 보살펴주셨나요?

“아무래도 정말 간절히 원하던 딸이 생긴 거니까 그만큼의 보살핌을 받지 않았나 해요. 교육이나 환경면에서도 부족한 면 없이 자랐어요. 두 분 모두 단 한 번도 저에게 매를 드신 적이 없고, 귀하고 좋은 물건이 있는 무조건 저에게 먼저 주곤 하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두 분은 부부싸움도 안하고 아직까지도 서로 존대를 해서 여러모로 좋은 면만 보고 자랄 수가 있었어요.”

언제나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던 소녀

어릴 적 사진 많이 보진 못했지만, 행복했을 것 같군요. 어떤 소녀였나요?

“저는 성격이 차분한 편이었어요. 튀는 성격도 아니었고 조용하고 조심조심했죠. 그런 것 같아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양부모님으로부터 좋은 면도 보고 적응을 잘했기 때문에 문제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았어요. 새로이 갖게 된 ‘천주교’라는 종교도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역시 제 예상대로 맞네요. 주변 어른들로부터 예쁨도 많이 받았겠어요?

“제 자랑 같지만 그랬던 것으로 기억해요.(웃음)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니지만, 말과 예의로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예쁨을 받았어요. 예를 들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자를 선물 받는 따위의 일이 많았어요.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가끔 궁금하기도 하고, 그 분들과의 일도 분명 추억의 일부라고 생각을 해요.”

학창시절 이야기 들려주세요. 궁금해요.

“주변 어른들과는 잘 지냈지만 친구들과는 그러기가 힘들었어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인 반면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친해지는 과정이 저에겐 너무나 어려운 과정이었죠. 극소수의 친구와의 우정만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정말 커요. ‘내가 더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갔다면 학창시절을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죠.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이것도 나름의 제 기억의 조각이니까요.”

학창시절에 어떤 꿈을 꾸었나요?

“천사가 되고 싶었어요. 티 없이 맑고,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천사 말이에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웃음), 모든 사람이 서로 트러블 없이 행복하고 세상이 편안하길 기도하는 나날이었어요.”

평생의 짝, 그리고 새로운 시련

   

결혼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이모 할머니의 친구 분이 지금의 시어머니셨어요. 이모 할머니께서 ‘참한 애가 있는데…’ 라고 하시고 시어머니는 ‘그러면 내 아들을 보여 주겠다’ 이렇게 된 거죠. 그 이후 남편이 밤에 기차를 타고 제가 있는 서울까지 왔어요. 처음이 아직까지 생생하네요. 여의도의 진주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처음 보게 되었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63빌딩을 구경하며 데이트를 했죠.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은 그 때 이미 결혼을 결심했다고 하더라구요.(웃음) 데이트를 다섯 번도 안 하고 결혼한 셈이죠. 그 때 제 나이가 지금 막내아들 나이인 스물 세 살이었어요.”

단칸방에서부터 살림을 꾸리기 시작하셨죠?

“태어나 처음 밟는 경상도 땅에서 시작했기에 우선 적응을 해야 했어요. 우선 환경이 너무 낯설어서 달라진 환경이나 생활 패턴에 저를 맞추는 노력들을 했죠. 어릴 적엔 서울의 양부모님 집에서 부유하게 산 편이었는데, 결혼해서는 어려운 살림이었기에 남편의 월급으로 알뜰살뜰 잘 꾸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당시 사회 환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심각했던 걸로 기억해요. 거리에서 데모하는 현장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시기였고, 심지어는 최루탄도 터졌죠. 사회적으로 많이 불안했던 시기였어요.”

결혼한 해에 바로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죠?

“네. 연초에 결혼을 하고 10월 말에 딸을 출산했어요.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결혼해서 새로운 집에 살기 시작했던 것과 고향이 그리웠던 것. 의지할 사람이 남편 밖에 없는 상태에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 라는 다짐을 했지만, 시어머니는 알아듣기도 힘든 경상도 사투리로 저를 구박했어요.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고 말예요. 시어머니는 병원으로 오지도 않으셨고요. 3년 후에 아들을 낳고서야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한 편으론 허무했죠. 물론 이것도 다 옛날 얘기라 하는 거랍니다.”

안팎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인생의 위기가 크게 찾아온 적이 있나요?

“남편이 둘째 아이 4살 때 크게 다친 적이 있었어요. 금속회사에 다닐 때였는데 용광로에서 작업하는 일을 하다가 등에 큰 화상을 입어서 입원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도 그 54일을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요. 크게 놀랐고 너무나 무서운 시간들이었어요. 매일매일 기도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그 후에도 남편이 다리에 깁스를 한 달 정도 하기도 했어요.
또 외환위기의 절정인 97년에 IMF로 인해 남편이 직장을 잃게 되었죠. 그 시간이 한 달, 두 달을 넘기더니 나중엔 2년이나 되더라고요. 집 사려고 모아놓은 돈을 그 시기에 거의 다 쓴 것 같아요. 그리고 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돈 때문에 연락을 끊고, 거의 사기를 당하다시피 했죠. 남편이 돈을 받아와준 적이 한 번 있기 하지만 그 때 느꼈던 정신적 충격은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돈은 10년지기 친구도 한 순간에 멀어지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비싸게 배운 셈이라고 생각해요.”

얘기만 들어도 화가 나네요!

“사람 사귀는 게 참 무서운 거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니 비록 안 좋게 헤어지긴 했지만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쯤은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어요. 어찌됐건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 당시에 외로움, 슬픔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무조건 가족이에요. 부족한 형편이지만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는 나의 자식들과 단 하나 뿐인 사랑하는 남편 생각을 많이 했죠. 사랑의 힘이 없었다면 정말 바닥까지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가 그 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길을 지나다 우연히 가수 김경호의 노래를 듣게 되었어요. 2집 앨범 타이틀 곡인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곳인데 그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아직까지도 앨범을 사고 응원을 하고 있답니다.”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서 일을 오래하고 계시는데 왜 그런가요?

“항상 생각하고 다짐하는 게 있어요. 지금 내가 일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최선의 방법이고 노력이라는 것을요. 일을 해서 가정을 지켜야 하고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에 파트타임이라도 아르바이트를 지속적으로 했었던 것 같아요.”

다시 만난 옛 가족

   

그동안 왕래가 없던 친가와 어떻게 연락이 닿게 되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남동생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아마 남편의 이름을 알아냈나 봐요. 하지만 처음에는 만나지 않았어요.”

왜 만남을 피하셨죠?

“아무래도 가족에게 미움이 많았기 때문이겠죠. 나를 남에게 줬다는 그 상처가 너무 커서, 떨어져 지낸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굳혀져 버렸어요. 그러다 연락이 닿았는데 그 중에 막내인 여동생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짠하고 조금씩 풀리더라고요.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게 4년 전쯤이에요. 이제는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에게도 이 때야 뒤늦은 고백은 했는데 고맙게도 다 이해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가족 다 같이 가보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어요. 사실 친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예상 외로 두 분 다 살아계셨는데 건강은 많이 악화된 상태였어요.”

찾아뵈니까 예상했던 모습이었나요?

“사실 실망이 컸어요. 왕의 후손이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다니시던 아버지가 아파서 거동조차 불편했다는 게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과도 하지 않으셨죠. 그러곤 1년을 더 살다가 건강이 악화되어서 돌아가셨어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군요.

“착잡했어요. 진작 더 찾아뵐 걸… 후회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가장 큰 후회는, 다시 찾아뵀을 때 ‘아버지’라고 따뜻하게 불러드리지 못한 거예요. 한동안 정말 슬펐어요. 그래도 이번 추석 연휴 때 어머니를 보니 많은 위안이 되었어요.”

오늘을 후회 없이 사는 힘찬 아줌마!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대학교에서 건물 내·외부를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되면 굉장히 귀찮고, 더럽고, 성가신 일로만 인식하는 일이 많은데 어떻게 보면 학생을 가르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학교의 청결을 책임지는 일이니까요. 고생 속에 보람을 찾는 게 좋더라고요. 물론 처음에는 텃세도 심하고 일하는 양도 많아서 적응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몇 년 째 하다보니까 즐기면서 일을 하고 있어요.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말이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모든 사람은 적응하면서 사나 봐요. 그리고 어린 학생들을 대하니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젊어지는 것 같아요. 뭐든 좋게 생각해야죠.”

일하는 스타일은 어떤가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미련하리만큼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사람을 대하다 보면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거든요. 하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겠죠? 돈은 쉽게 벌면 안 되는 거잖아요?(웃음) 지금 제가 일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보니 더불어 어떤 일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들어서는 더 긍정적으로 달라진 것 같아요.”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바라는 모습이 있나요?

“물론 있죠! 우선 외모 면에서는 지금보다 키도 더 컸으면 좋겠고, 예쁜 얼굴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지금은 아무래도 부족하니까요. 그리고 튼튼하게 태어나서 뭐든 잘하는 더 나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직 바라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남편이 건강했으면 좋겠고,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 모든 부모의 마음과 같죠. 욕심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구요.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누구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저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사실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들이긴 하지만 이 엄마를 인터뷰해줘서 참 고마워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의 짐이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동안 궁금해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자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소녀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부모님 속 썩여드리지 말고 가족의 무한한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보답하는 그런 아들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사랑을 받기 보단 먼저 주고, 보답을 바라기 보단 먼저 베푸는 어머니의 삶을 본받아 내일도 언제나 오늘처럼 힘차고 보람 있는 행동을 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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