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투사의 흔적을 찾아서] (1)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일제강점기 무수한 항일 운동가와 단체가 있었지만, 밀양 출신 약산(若山) 김원봉(1898~?)과 석정(石正) 윤세주(1901~1942)는 누구보다 치열했던 항일 '투사'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지역사회에서 제대로 조명을 못 받고 있다. 김원봉에 대한 서훈은 '월북'을 이유로 수차례 국가보훈처 문턱에서 가로막혔고, 윤세주를 기리는 움직임은 2010년 기념사업회 설립으로 첫걸음을 뗀 정도다. 다섯 차례에 걸쳐 두 열사의 활동과 의미를 재조명하고, 이들이 조국을 떠나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중국에 남은 '항일 유적'의 가치를 되짚고자 한다.

◇밀양에 남은 자취 =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와 880번지. 김원봉과 윤세주는 이곳에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어났다. 현재 생가를 보기는 어렵다. 약산 생가 터는 모두 허물려 흙바닥에 차들만 주차돼 있고, 인근 집들은 공사 중이다. 석정 생가는 남아 있으나 친척 아닌 이가 살아 내부를 못 보는 상태다.

2010년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가 세운 생가 터임을 알리는 작은 비석들이 두 열사를 추억할 뿐이다. 밀양시가 이 동네 도로명 주소로 쓰는 '약산로', '석정로' 역시 쓸쓸히 그들을 되새긴다.

밀양 곳곳에 김원봉과 윤세주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함께 다녔던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 이곳에서 1911년 4월 29일 메이지 일왕 생일 축하 행사를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변소에 처넣어 심한 구타와 퇴교를 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김원봉이 축구와 냉수욕을 즐겼다는 남천강변, 병서들을 읽으며 독립운동 뜻을 품었다는 표충사 등은 지금도 주민들의 안식처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남아 있는 김원봉 생가 터(왼쪽)와 윤세주 생가.

 

김원봉 생가 터임을 알리는 비석.

이후 밀양의 민족주의 사립학교였던 동화중학에서 만난 교장 전홍표(全鴻杓)는 두 소년의 항일 의지에 불을 지폈다. 일제 압력으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고향을 벗어난 생활도 본격화한다. 김원봉은 서울과 상하이를 거쳐 1918년 중국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 들어간다. 1919년 윤세주는 서울에서 3·1운동 시위에 참여하고, 고향에서 윤치형(1893~1970) 등과 함께 영남지역 대표 독립 만세운동인 3·13 밀양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매해 내일동 밀양관아 앞에서는 재현 행사도 펼쳐진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참여한 의열단(義烈團)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고향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밀양 폭탄 미수 사건'과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는 폭렬투쟁의 신호탄이 됐다.

폭탄은 쌀가마니에 숨겨 복잡한 경로를 거쳐 밀양 근처 진영역 앞 미곡상 창고까지 옮겨졌지만, 은밀하게 진행되던 작전은 밀고로 들통난다. 1920년 6월 윤세주 등 의열단원들은 서울에서 붙잡히고, 의열단과 의백(義伯·우두머리) 김원봉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폭탄은 발각되지 않고, 결국 거사에 쓰인다. 1920년 12월 역시 밀양 출신인 의열단원 최수봉(1894∼1921)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하나는 불발되고, 다른 하나는 힘이 약해 기둥만 파손됐다. 최수봉은 칼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했으나 체포됐고, 안타깝게도 다음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 밀양에서 시작한 두 열사의 항일 투쟁은 중국에서 계속되고, 또 끝을 맺기도 한다. 독립운동사에서 김원봉과 윤세주의 역할은 재평가되고 있다. 이들이 의열단으로 단순히 폭력과 저항만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3·1운동 이후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고민을 낳았다. 자본주의 국가만 존재하던 시절에서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근대 서양 세계가 두 개로 분열된 것이다. 이 사이에서 선택과 모색이 발생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도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김원봉은 1926년 중국 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27년 중국 공산당의 남창(南昌) 봉기에 참여했다. 중국 혁명 과정에서 군사 기술을 배우면서도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라는 리더로서 고민과 비전이 생겼을 것이다.

이와 관련, 김원봉은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일원화했다. 그것이 1935년 난징에서 창당된 민족혁명당이다.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당을 포함해 의열단도 여기에 참여했고, 김원봉은 총서기를 맡았다. 폭렬투쟁을 벌이던 의열단이 '민족혁명당'이라는 정치 조직으로 거듭난 셈이다.

   

◇풀리지 못한 죽음의 진실, 돌아오지 못하는 몸 = 정부는 1982년 윤세주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반면,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 씨 등이 2005년부터 여러 차례 서훈 신청을 했으나 정부는 번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으로 갔다'는 게 이유다. 거의 같은 행로를 걸었던 두 열사가 세상을 떠난 후 끝나지 않은 이념 싸움으로 한국사회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는 모습이다. 또, 김원봉의 죽음에는 숙청과 자결 등 여러 추측만 낳고 있다. 북한에서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1942년 중국 태항산에서 일본군의 총공세에 맞서다 전사한 윤세주는 중국 국립묘지인 진기로예(晉冀魯豫)열사능원에 모셔져 있다. 하북성 한단시에 있는 이곳은 우리나라 현충원과도 같다. 그래서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보다 우리나라 애국 열사를 높이 평가하는 아이러니도 발견된다. 그의 몸은 통일된 조국의 땅에 묻혀야 한다는 생전 자신과 후손들의 뜻에 따라 여태 그곳에 남아 있다.

※이 기사는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사업회 지원을 받아 중국 역사탐방 동행취재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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