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 삐죽이 솟은 비석·탑에 서린 창녕의 과거와 현재

창녕에는 유물·유적지가 곳곳을 채운다. 제 것 그대로이면 더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과한 덧씌우기가 있었거니와, 또 그 귀함을 몰랐던 탓이다.

영산면 동리에는 '영산호국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1973년 도시공원으로 지정됐다가 1982년 '전국 최초 호국공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3·1운동' '6·25전쟁' 같은 '3대 국란(國亂)'을 담고 있다.

'영산 만년교(보물 제564호)'를 지나 공원에 들어서면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3·1 독립운동 기념비' '6·25 영산지구 전적비'가 있다. 또 다른 것으로 '영산현감 전제 장군 충절사적비(靈山縣監 全霽 將軍 忠節事蹟碑)'가 있다. 전제(全霽·1558~1597)는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내며 의병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충절사적비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영산 박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화왕산성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역모에 몰렸다가 충절이 밝혀져 사후 호조참판으로 직이 올랐다'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충절사적비 옆에는 '임진왜란 화왕산 승전도'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전제 장군이 선두에서 용맹하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비문에도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선봉에 나섰던 전제 장군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전제 장군을 위한 공원이라 할만도 하다. 그럼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는 신통찮다.

전제 장군이 화왕산에 들어가 어떠한 전과를 올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곽재우 장군을 따라 화왕산성에 들어간 장령 가운데 다섯 번째 서열' '정유재란 당시 권율 장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같은 내용은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전제 장군 사적비

이렇듯 고증 부족, 혹은 왜곡 이야기는 오랫동안 심심찮게 나왔다. 유독 전제 장군에 대해 뒷말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전제 장군 14대손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건립 때인 1982년은 전두환 대통령이 한창 힘을 발휘하던 때다. 당시 창녕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알아서 머리를 조아린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도 공원 안에는 '전제 장군 충절사적비 건립추진위원회' 명단이 표지석에 박혀 있다.

전제 장군이 의병활동을 하고 영산현감으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후손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역사적 인물이 됐다.

이 지역 장마면 낮은 산등성이에는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예전에는 7기가 북두칠성처럼 자리해 '칠성바위'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길 닦다 6기가 날아가 버렸다. 지신(地神)이 화날 만한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0여 년 전에는 아주 기막힌 일이 있었다. 창녕읍 일대 도시계획도로 확장 때 고인돌 수십 기가 마구잡이로 훼손됐다. 또 어느 개인은 고인돌인지 모르고 조경용으로 집에 들고가기도 했고, 후에 한 번 더 대량 파손되는 일이 있었다. 인류 최초 석조물이라 할 수 있는 고인돌이 이 지역에서는 이래저래 수모를 겪은 것이다. 그 아쉬움은 훗날 더욱 뼈저리게 다가올 듯하다.

장마면 창녕 지석묘

창녕읍에 자리한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겉으로는 훌륭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 여러 차례 파헤쳐졌다. 금관·금동 장신구·토기 같은 것이 남김없이 빠져나갔다. 계성고분군도 논·밭으로 변한 곳이 많다 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교동·송현동 고분군

오늘날 창녕군은 '진흥왕 행차길'이라는 문화탐방로를 이어가고 있다. 20리에 걸쳐 교동고분군-진흥왕 척경비 원발견지-만옥정공원-진흥왕척경비 등이 이어진다. 이를 두고 "가야 후예인 이곳 사람들이 승자인 신라 관점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려는 뒤집힘이 있다"며 못마땅해하는 이도 있다.

시선을 달리해 대지면 본초리로 옮기면 국도 변에 '향군 농장개간 공적비'라는 것이 있다. 이 공적비는 창녕 땅 지난날과 오늘날을 잘 담고 있다.

향군 농장개간 공적비

창녕 물가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쓸 만한 땅이 아니었다. 버려진 땅을 논·밭으로 일구더라도 물이 흘러넘쳐 원래대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특히 대지면·유어면·이방면 같은 곳이 그랬다고 한다. 마른 땅이라 할 수 있는 창녕읍 위쪽 고암면·성산면 같은 곳은 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말 낙동강 상류에 댐이 들어섰다. 안동댐·영천댐 같은 것이다. 이를 바탕삼아 창녕에는 두 차례 걸쳐 대대적인 개간작업이 진행됐다. 유어면 같은 곳은 1978년 이후 전천후 농업이 가능한 지역으로 변했다. 그렇게 물 조절이 가능해지면서 제법 쓸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땅 한 뼘이 절실하던 이곳 사람들에게는 큰일임이 분명하다.

이 고장에는 낙동강 변을 따라 여러 벼랑길이 있다. 강가라는 '개', 벼랑이라는 '비리'가 합쳐져 '개비리길'이라 불린다. 이 가운데 남지읍 용산마을에 있는 '남지 개비리길'에는 개(犬)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다. 어느 집 수캐가 먼 곳으로 팔려갔다가 암캐를 만나러 이곳을 오가면서 길이 났다는 얘기다. '개'라는 말이 들어가다 보니 이러한 얘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