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구석구석 2]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숨겨두었던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며 고뇌하던 청년 윤동주.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후 벌써 74년이 지났다. 그동안 밤하늘의 별들만큼, 그리고 시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의 시를 연애편지에 적어 내려가던 연인들의 무수한 이별만큼 셀 수 없는 시들이 쏟아졌고 시인이 나왔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고전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시인 윤동주를 못내 애틋한 심정으로 떠올리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낯설었다. 예상치도 않은 곳에서 옛 애인을 만나듯 의외의 장소에서 ‘윤동주’를 만났다.

남도 포구마을에서 윤동주를 만나다

모르고 들린 길이었다. 선암사를 취재하고 영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순천에서 하동으로 넘어오기 직전이었다. 왼 편으로 한낮의 가을 햇살아래 누워있는 개펄이 편안해 보였다. 기억 속에 들어앉아 있던 오래 전 망덕포구의 옛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정말 잠시 방향을 틀었을 뿐이었다.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

망덕포구

이곳은 전북 진안 데미샘에서 시작된 섬진강 물줄기가 남으로 남으로 이어져 바다와 만나는 경계지역이다. 기억 속의 길들은 엉키고 설켜 조금 헤매었다. 하지만 이내 작은 포구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수 년만에 들른 망덕포구는 여느 어촌에서 만날 수 있는 예전의 포구가 아니었다.

띄엄띄엄 새로 지은 건물도 있고, 바다를 따라 길게 이어진 좁은 도로는 훨씬 넓어졌고, 마을 입구에는 새로운 조형물과 공원이 들어섰고, 섬진강 물길이 바다로 이어지는 것을 조망할 수 있는 데크 로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오종종하니 서로 기대어 있던 낮은 처마의 지붕들은 여전히 정겨움처럼 남아 있었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길 한 쪽에 바다 전망대가 있었다. ‘윤동주와 망덕포구’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

‘윤동주가 여길 왔었던가. 음, 그럴 리가? 아닌데. 도대체….’ 

나루터횟집 주인 길윤주 씨가 신문스크랩을 펼치며 망덕포구와 시인 윤동주 사연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안내판에서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는 글을 읽고, 전망대와 바다 데크 로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시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부산을 떠는 눈길 끝에 섬진강을 가로질러 잇는 고속도로와 그 옆 섬진강 휴게소가 얼핏 보일 뿐이었다. 선창가에는 정박한 고깃배들이 띄엄띄엄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곳에서 시인 윤동주를 만났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의 문학여정의 새로운 흔적을 더듬을 수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생애에는 항상 태생지인 북간도 명동촌, 생가가 있는 중국 길림성 용정, 문익환 목사와 다녔던 은진중학교, 연희전문, 그가 죽음을 맞이한 후쿠오카 감옥 등의 지명이 뒤따랐다.

그런데 이 남도땅에 있는 작은 포구가 윤동주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싶었다. 뜬금없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들린 길은 불쑥불쑥 다가선 궁금증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는 시간들이었다.

시인 윤동주가 망덕포구의 상징이 된 사연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바다를 따라 길게 이어진 집들을 따라 갔다. 대부분 횟집이었다. 눈에 띄는 식당이 있었다. ‘30년 전통 나루터 횟집’이라는 간판이었다.

시비가 있다는 ‘망덕포구와 윤동주’ 바다 전망대.

길윤주(47) 씨. 부산에서 시집와 시아버지가 하시던 식당을 물려받아 남편과 같이 횟집을 운영한다고 했다.

“아버님은 직접 고깃배를 타고 나가 잡아와서, 그걸 식당에서 팔았지요. 이제는 연세가 많아서는 배 타고 나가지는 못하시고, 우리도 안 되니까 여기 고기 잡는 사람들한테 바로 사서 하지요. 제가 한 지가 벌써 십 수년 됐네요.”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고운 윤주 씨의 손마디는 굵었고 젖어있었다.
“정병욱 가옥이 어딨나요? 윤동주 육필 원고를 보관했던 곳이라는데… 안 보이던데.”

“여기 오는 길에 부림수산이라고, 그 옆에 바로 있는데… 못 봤어요?”

이렇게 틔어진 이야기는 급기야 윤주 씨가 자신의 살림집에서 신문 스크랩한 파일뭉치를 들고 오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기 이 신문사에서 처음 취재를 해서 알렸대요.”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근대문화유산 341호

스크랩 된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윤주 씨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거기 가면 마루 밑에 원고를 숨겨놓았던 것도 볼 수 있어요. 그 집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정병욱 씨라고, 지금은 돌아가셨다는데, 그 분이 어릴 적 살던 집이래요. 시인 윤동주하고 친구였고요.”

아하, 궁금증이 하나씩 풀어지고 있었다.

망덕포구에는 윤동주의 후배이자 친구인, 지금은 작고한 정병욱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의 옛집이 있었다. 이 집에 윤동주의 육필 원고가 남몰래 보관되었다는 것.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 가까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고가 여기에 있었다.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가 젊은 시절 친구와 둘이 찍은 흑백사진에 나오는, 알고 보면 익숙한 인물이었다. 윤동주의 동생이 정병욱의 여동생과 결혼했다하니 두 사람은 사돈이기도 하다.

윤동주 육필 원고를 숨겼던 정병욱과 어머니

윤주 씨는 길을 되돌아 조금만 가라고 했다. 무심결에 지나쳐 왔는데, 건축양식이 남다른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망덕포구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 이 가옥은 2007년 근대문화유산 341호로 지정되었다. 1920년대 점포를 겸한 주택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에는 양조장과 주택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1942년 일본 유학을 가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를 3부 만들어, 1부는 스승 이양하 선생에게, 1부는 친구 정병욱에게, 1부는 자신이 가져갔다고 한다.

한 지역신문에 실린 윤동주와 정병욱

정병욱은 윤동주가 검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 또한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이 원고를 맡겨 보관토록 했다. 만에 하나, 두 사람이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 해방되었을 때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을 목숨처럼 여기며 원고를 보자기에 꽁꽁 싸서 이 집 마룻장 아래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해방이 되어 아들이 살아 돌아오자 비로소 바깥에 내놓았다고 한다.

이양하 선생과 윤동주 자신이 갖고 있던 원고는 없어졌으나, 그렇게 해서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원고만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유고시집은 1948년에 출간됐다. 여기에는 친구 정병욱의 힘이 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식민지 조국의 청년의 고뇌와 인간애가 깃든 그 순정한 시들은, 시대를 아우르는 불멸의 문학세계는 이렇게 우리에게 왔다. 시도, 시집도, 시인도 이토록 간절하게, 독자에게 오롯이 안겨오는 경우는 한국문학사에서 드문 일일 게다. ‘시 나부랭이 따위’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윤동주의 시 한 두 구절은 읊고 있으니.

여기까지가 남도 작은 마을인 망덕포구에 깃든 사연이다.

하지만 시인 윤동주와 이곳과의 인연이 알려지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 광양시는 망덕포구를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명소로 만들어가고 있다. 잠시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기대도 하고 우려도 했다.

망덕포구가 상업성으로 덧칠하는 것만이 아닌 시인 윤동주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마을, 많은 사람들이 ‘별 헤는’ 마음으로 시인을 만날 수 있는 마을, 그러면서도 원래 포구마을로서의 아늑하고 정겨운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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