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재즈 신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요즘 들어 대중음악에 활력(vitality)이 사라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니! 매일같이 신나는 음악이 빵빵 터지는데 무슨 그런 망발을! 하고 놀랄 이가 많겠다. 일리 있는 반문이다. ‘슈퍼스타 K’를 필두로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온갖 음악프로가 TV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게 요즘 현실 아닌가!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재즈 평론가 이종학이 몇 년 전에 쓴 글 중에 이런 게 있다. “청담동 재즈클럽에서 미국 유학파 여가수가 ‘배운대로’ 온갖 기교를 부리며 노래를 부르더라. 그런데 영 아니더라!” 청담동, 미국유학, 기교 같은 단어가 왠지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건 맞는 데 ‘노래 필’이 어설픈 양키 흉내에 그치고 있더라는 이야기다.

이 지적은 2012년 현실에 대입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실용음악과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재즈를 전공하는 이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지만 ‘이게 내 음악이오’하며 오리지널리티를 내세우는 이는 찾기 힘들다. 오죽했으면 평론가 김현준이 “매년 앨범이 수십 수 백 장 씩 나오지만 대개가 그렇고 그런 베끼기 일색”이라고 단언할까!

   

대중음악은 원래 계급장 없는 음악

음악에 활력이 사라졌다는 말은 창의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원래 대중음악은 계급장 없는 사람들이 야전(野戰)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던 음악이다. 가왕(歌王) 조용필이 버클리나 줄리어드를 다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가 음악교양교육을 받지 않은 건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음악은 큰 울림을 갖는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과 산업’ 논리가 모든 걸 압도하는 바람에 팔릴 제품만 만들어진다. 음악인들도 그걸 간파하고 미리 알아서 긴다. 물론 ‘자본과 산업’없이 대중음악 토양이 만들어지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심해도 너~무 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규격화된 교육과 정해진 코스는 이를 더 부추긴다. 버클리다 뭐다 해서 갈수록 기교는 향상되는 데, 죄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하다. 누군가는 이를 ‘온실 음악’이라고 표현했는데, 딱 들어맞는 말이다.

트럼페터 윈튼 마살리스(Winton Marsalis)는 연주자 테크닉에 대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테크닉이란 뮤지션에게 가장 초보적인 도의(道義)다. 만일 테크닉이 없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는 고차원적으로는 그 예술형식과 도의적으로 맺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맞는 말이다. 예술이란 기본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제도교육은 대부분 여기에만 매몰된다. 독창성 있는 음악을 가르치는 이도 드물고, 그런 게 필요하다고 보는 이도 드물다. 그래서 양산되는 건 연주 테크노크래트(Technocrat)다. 흡사 80년대 록 신에 기타 속주자들이 ‘누가 누가 빨리 치나’ 시합을 했던 것처럼. 결과는? 덩치는 산더미만한데 사고는 유아 수준에 머무르는 음악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감동이 없다.

고급화된 음악이 더 아름답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트럼페터 톰 하렐(Tom Harrell)을 만났던 경험을 예로 들어 테크닉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윈튼의 관점에서 보면 톰 하렐이나 쳇 베이커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연주자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클럽에서 만난 톰 하렐은 제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뭐라고 딱 꼬집진 못하겠지만 그건 엄청난 감동이었어요!”

정형화된 음악에서는 이런 공감을 느낄 수 없다. 작곡가 이건용은 “전문화 고급화된 음악이 반드시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야전에서, 누구도 보살피지 않았음에도 홀로 핀 꽃이 장엄하다는 말이다. 생명력은 바로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기타를 제법 만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기억하리라! 1981년도 일이다. 앨범 <Friday Night in Sanfrancisco>가 벽력처럼 출시되자 음악계는 흥분에 빠졌다. 고작 어쿠스틱 기타 3대였다. 하지만 명인 3인방이 펼치는 가공할 연주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감동을 안겼다. 이후 재즈록 역사는 이 음반이 방향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디오 마니아인 한 지인은 당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기타 몇 가락 튕기며 폼 잡던 놈들에게 결정적인 똥침을 날린 대사건”이라고.

이 라이브에 참여한 사람은 셋이다. 존 매클러플린(John Mclaughlin), 알 디 메올라(Al Di Meola), 파코 데 루치아(Paco De Lucia). 세 사람이 지닌 실력(테크닉)이 바탕을 이루긴 했지만, 아무렴 이들이 남긴 감동은 테크닉에만 기반하지 않는다. 각기 개성이 다른 연주자들, 특히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인 파코 데 루치아를 끌어들여 독특한 서정을 완성했다는 점, 세 사람 간에 이뤄진 기타 인터 플레이가 상승 작용을 통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미를 구축했다는 점이 감동을 준 원인으로 꼽힌다. 뮤직 신을 뒤흔든 이런 창조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안락한 중년들만 설친다면

비범함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 매클러플린이 기획한 라이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한 평생 매너리즘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온 몇 안되는 아티스트중 하나다. 그가 파코 데 루치아를 파트너로 지목했을 때만 해도, 이런 앙상블이 탄생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다이애나 크롤

솔직히 ‘소프트 재즈’의 대명사인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에게선 편안함이 묻어난다. 비올 때면 다른 사람 곡도 좋지만, 그녀가 부른 <Cry Me A River>가 가장 정겹다. 근데 이런 곡은 수십 년 전 곡들과 외양이 비슷하다. 단지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을 강조한 정도다. 문제는 이런 노라 존스(Norah Jones)나 다이애나 크롤이 재즈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활력을 불어넣을 신예는 보이지 않는데, 안온함에 기댄 중년들만 설치는 세상이 걱정스럽다.

어느새 음악하는 그들도 듣는 나도 ‘음악 기득권층’에 포함된 것은 아닐까? 아도르노는 이를 미리 간파했던 것 같다. 그는 “상업적인 곡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파시즘을 전파하는 파시스트와 같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처럼 극단적인 표현은 아니더라도, 동양 고전인 악기(樂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음악이 ‘지미초쇄지음(志微礁殺之音)이 되면 백성이 시름겹고 걱정하게 된다.” 지(志)는 급(急)을 말한다. 풀이하면 음악이 다급하고, 미약하고, 말라 비틀러지고, 줄어들면 ‘거시기’하다는 이야기다. 악기가 의도한 바는 따로 있겠으나, 창의력 있는 작품이 등장하지 않는 음악 신을 설명하는 글로는 이만한 게 없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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