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 지역문화의 바이러스가 됩시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예상이라도 한 듯 그것을 금방 낚아채, 말 보따리를 술술 풀어놓는다. 그는 말 보따리를 푸느라 바빠 보였고, 기자는 ‘과연 저 입담은 유전일까, 아닐까’가 궁금증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유난히 그의 입에서는 ‘마산 촌놈’이 자주 튀어나왔고, 구수한 사투리를 내뱉는 것이 친숙한 ‘옆집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송성안 학예사(48)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문화에 발을 디디고 있다면 그를 모를 리 없다. 학예사뿐만 아니라 경남대 사학과 겸임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례조사위원, 마산도심재생 위원회 자문위원, 마산문화원 성신대제 보존회 학술위원 등 맡은 게 많고, 지역을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가 올해 상복이 터졌다. 창원시가 선정한 ‘10월의 베스트 공무원’과 (사)경상남도박물관협의회(회장 박용한)가 뽑은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중진 부문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아들도 입담이 장난 아닐 것 같아요.

“뒷감당이 안 되지예.(웃음) 저는 우리 영감님과 아들내미 딱 그 중간입니다. 한 철학과 교수가 ‘너거 아버지 논리는 못 따라간다. 최고다, 최고’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가 말을 잘하셨지예.”

-입담은 타고나셨네요.

“제가 말을 잘합니까? (웃음) 여자들은 재미없다고 하던데…. 내성적인 면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말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

송성안 마산박물관 학예사 / 사진 김구연 부장

-경남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과에서 석사(고려시대 전공), 영남대 국사학과에서 박사(삼국 및 고려시대사 전공) 학위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중학교 2학년(1978년) 세계사 여선생 때문이죠. 그때가 유신시절이었는데, 머리도 빡빡 깎아야 하고 교복도 입어야 하고…. 개인적으로 답답했었죠. 그분이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했는데 수업할 때 보면 중학생이 느끼기에도 좀 뭔가 현 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 사회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구나, 사학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예. 사실 우리 집안이 4대째 기독교를 믿고 있어 신학을 하려고 했는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개인구원보다는 사회공헌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2남 3녀 중 장남이니, 부모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대학교 때는 어땠습니까. 

“제가 노는 걸 좋아했고 2학년 때는 과대표도 했어요. 총학생회직선제를 쟁취하고자 학생들 모아서 뛰어나오기도 하고…. 그때 한국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거든요. 부모님께서는 그대로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며 ‘2학년 마치고 군대 가라’고 했고, 비겁하게 군대로 도망을 갔습니더. 그때 군대 안 간 친구는 깜빵(교도소) 다 갔지요.”

-원래부터 학예사가 꿈이었나요? 요즘 학예사가 ‘고학력, 저임금, 비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취업하기가 어려운데. 그때 당시에도 인기 직종이었습니까.

“애당초 학예사는 꿈도 안 꿨습니더. 흔히 갈 수 있는, 조그만 관심만 있으면 갈 수 있었죠. 요즘은 힘들지만. 그때 당시 박물관도 몇 개 없을뿐더러 학예사는 보수도 적고…. 거의 뭐 관심이 없었습니더. 군대에 2년 6개월 있으면서 신학은 나한테 너무 어렵고 힘들고 내가 선택하는 길이 아니다, 공부를 계속해 대학교수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제가 학예사가 된 건 ‘150만 원’이라는 빚 때문이었지예. 빚이 원래 없었는데 (웃음) 박사학위를 따면서 이래저래 빚이 생겼거든요. 아내한테 갚아달라고 할 수도 없고, 현금서비스를 받았는데 갑자기 까마득하더라고요. 1996년부터 경남대에서 시간강사를 했는데, 강사월급으로는 턱도 없었죠. 150만 원 빚을 갚으려고 채용공고를 뒤졌고 때마침 마산박물관이 개관을 앞두고 학예사를 뽑고 있었습니더. 1년에 연봉이 1400만 원 정도였는데, 그게 어딘가? 우선은 150만 원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지원서를 넣었지예.”

-경남대에서만 강의를 했나요?

송성안 마산박물관 학예사 / 사진 김구연 부장

“제가 경남대 대학원 석사(한국사) 1호입니다. 석사를 4년 만에 졸업하고…. 좀 길었지예. 1996년 영남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4년 만에 학위를 받았지예. 박사학위는 빠른 편입니더. (웃음) 1996년부터 시간강사를 했는데, 원칙이 있었습니다. ‘경남대만 간다. 모교만 간다.’ 은사님이 ‘자네를 위해 강의를 준비해났네. 하시게’라며 제안을 했지만 정중히 사양했습니더. 그때 당시 박사과정 애들은 한 주에 20~30시간씩 강의를 했지만 난 6시간만 했으니 버는 돈이라곤 뻔했지예. 나머지 시간은 배우는데 만 집중했습니더.”

-외도는 안 했습니까? 학원 강사를 한다든지….

“과외나 학원 강사가 수입이 꽤 괜찮았지예. 그 당시 (1990년대 초) 한 시간당 1만 8000원부터 최고 3만 원까지 준다고 했는데, 한 번도 학원 강사나 과외 해 본적이 없습니더. 단 일 년이라도 빨리 졸업하고, 그 이후에 인문학 위기가 온다 해도 배추장사나 해야겠다 생각했지예.”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석사 4년, 공백 2년, 박사 4년. 어떻게 생활을 하셨어요?

“1994년에 결혼을 했는데, 군대 제대하면서 알게 된 여동생 친구였죠. 석사를 졸업하고 2년 동안 다른 대학원을 준비한다고 힘들었는데, 꿋꿋하게 무능력한 남편을 좋아했죠.(웃음)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근데 단순하면 됩니다. 없으면 안하면 됩니더. 그때는 아침에 도시락 2개를 싸서 아침 7시 40분 집사람 출근할 때 같이 나와 밤 10시 40분 막차를 타고 집에 왔죠. 박사과정에 들어서는 일주일에 2~3번 마산과 대구를 왔다 갔다 했는데, 말도 못합니더. 새벽 4시 20분에 마산서 비둘기(기차)를 타고 밀양 삼랑진 역에 내려 경산으로 갔죠. 저녁 수업 마치면 10시 30분인데, 마산 오는 기차가 없어. 영남대서 다시 경산, 부산으로 가 구포에서 택시 타고 사상가서 마산 합성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더. 그리고 집에 오면 새벽 1시 40~50분 됐죠. 두 달 정도 했는데, 신경질 돋아서 안 되겠데예. 모텔에서도 몇 번 자고 했는데 시끄러워서 안 되겠더라고요. (웃음) 차 파는 친구한테 전화해 중고 프라이드를 샀죠. 두 달 죽다 살아났습니더. 그런데 본의 아니게 (영남대)교수님한테는 성실한(?) 모습으로 비췄는지, 장학금도 챙겨줘 학비는 하나도 안 들었습니다.”

-박물관 일은, 마산박물관에서 처음 해봤겠네요.

“아닙니더. 경남대 박물관에서 1991년 10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조교로 일을 했지예. 고성연당리유적 발굴조사와 창원 덕천리유적 발굴조사 등에 참여했고, 그때 있으면서 석사 논문 테마를 잡았지예. 박물관에서 도자기 파편을 만지다 보니 고려시대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들었던 자기소(磁器所)는 어떤 곳이었을까, 어떤 기술력으로 어떤 도자기를 만들었을까 궁금했습니더. 그래서 ‘고려전기 자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 자기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를 받았어예.”

-마산박물관 학예사로 뽑히고 나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전 마산 떠날 생각도 없었고. 부모님도 마산에 계시고 난 장남이고…. 부모님 얼굴도 볼 수 있고 얼마든지 뛰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더. 고향 등지고 살면 재밌겠습니꺼? 영남대 지도 교수님은 졸업식 때 인사도 안 받아줄 정도로 화가 나셨습니다. 학교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학예사 그것도 계약직으로 들어가니…. 2000년대 들어 지자체에서 공립박물관을 1시‧1개씩 만들면서 학예직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제가 영남대서 ‘학예사 첫 빠따’가 된 이후 줄줄이 학예사가 나왔으니 좋다고 봐야죠.”

-옛 마산시 개항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마산박물관이 2001년 9월 21일에 개관했는데 그때 뽑혀서 할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장난이 아니었습니더. 2000년 4월 1일 토요일 임명장을 받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해서, 박물관 관계 자료를 받는데…. 뼈다구만 세워났지, 유물 한 점 없었서예. 1시간 반 만에 교수님한테 전화해서 ‘그만두면 안 됩니까’라고 했어요. 교수님이 ‘너의 고향 마산이고, 네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못할 것 아니가. 할 때까지 해봐라’고 했습니더. 빼도 박도 못하고 밀어 붙었죠.”

-어떤 일부터 했습니까.

송성안 마산박물관 학예사 / 사진 김구연 부장

“일단 사람들부터 만났죠. 술도 묵었고. 박물관 개관 무렵에는 새벽 2, 4시에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찌할꼬 싶어서 박물관에서 에어컨 박스 깔아놓고 누워서 생각하기도 하고…. 토, 일요일 없이 날 밤새울 때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집안이면, 술은 안 먹었을 것 같은데….

“원래 안 먹었지예. 석사 때 힘들기도 하고 원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입에 댔죠. (웃음) 많이도 만났습니더. 박물관, 문화 쪽 관계되는 사람이라면 주구장창 만나 대안을 찾았습니더. 최근 돌아가신 이상길 경남대 교수에게 조언을 많이 구했고, 개관일정이니 프로그램, 마스터플랜 등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지예. 유물은 제쳐놓고(?) 박물관 비전을 입으로 때웠는데, 그거 지금 다 하고 있지 않습니꺼? (웃음)”

-2000년 4월 ‘유물공고’를 신문에 냈다고 했는데, 반응은 어땠습니까?

“좋을 리 없지예. 그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유물이라고 하면 돈이라고 생각합니더. 안타까운 건 박물관이 늦게 지어졌다는 거예요. 마산이 도시화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거 환경이 바뀌었지예? 그러면서 지역사 관련 자료가 훼손을 많이 당했어요. 이사하면서 다 없어졌지예. ‘박물관에 볼 게 뭐 있노? 박물관이 뭐 필요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제일 먼저 나는데, 이 차이가 지역문화 자산을 계속 보존하느냐, 못 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지역문화, 박물관 등에 대해서 관대하지요?

“박물관 개관할 무렵에는 박물관 1% 내외였지만 지금은 10% 두 자리 숫자가 됐습니더. 체감하는 거지예. 이전에는 제가 ‘지역문화전도사’라고 생각하고 부르면 어디든지 갔습니더. 여성대학, 노인대학 등에서 마산 역사를 강의하면 노래 네 곡 불러가며 했어예. 이은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면 모릅니더. 가고파 노래 한 곡 부르면 퍼뜩 알지예. (웃음) 그때 당시 식자계층도 ‘지역문화의 정체성이 뭐고, 그게 뭔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뜻을 이해하지예? 그런것은 자기 스스로 아는 게 아니라 학습에 의한 거거든요. ‘우리 다, 지역문화의 바이러스가 됩시다’라고 박물관 수강생을 대상으로 외쳤던 것이 효과를 보네예.”

-가장 기억나는 유물 기증자가 있습니까? 그 중 사이비도 많을 것 같은데, 당하시진 않았는지요?

“유물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 많지에. 저는 사람 보는 눈은 타고 났습니더. (웃음)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김영주 씨가 2005년 300여 년 동안 전해 내려온 마산 가포동 안동 김씨 문중에서 만들어진 호구단자 31점, 호적 4점, 토지매매 관련 문서 17점, 인감 2점, 임야소유증명서 8점 등 모두 90여 점의 유물들을 박물관에 기증했서예. 기증을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김영주 씨는 무상으로 기증을 했습니다.”

-150만 원을 갚고자 학예사가 됐고, 지금은 13년째 일하고 있는데.

“한 번 계약하면 최장 5년을 할 수 있는데, 3번 계약을 했습니다. 안 짤리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마산은 특별합니더. 일단 내가 태어났고, 할아버지 묘가 있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곳입니다. 마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지예.”

송성안 마산박물관 학예사 / 사진 김구연 부장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례조사위원, 마산도심재생 위원회 자문위원. 마산문화원 성신대제 보존회 학술위원, 3.15 기념사업회 의거지 편집위원… 많은 것을 맡고 있네요.

“온 전신에 찾아와서 특강을 요청한다 아닙니까? (웃음)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저를 많이 찾지예. 지역사람으로서 지역문화의 좌‧? 하나의 관계지예. 관계라는 것은 시간에 따라서 변할 수도 있고…. 정말 지역을 살리려면 균형감 있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쪽 가서 저런 이야기도 듣고, 이쪽 가서 이쪽 이야기도 듣고. 지역문화와 박물관에 실질적 도움이 됐으면 합니더. 몸은 고달프지만….”

-개인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교육프로그램과, 음악회 등도 다른 공립박물관에 비해서 많고.

“개인기가 없으면 안 했지만 강의가 되니까 교육프로그램도 하고, 음악회도 내 아는 사람 풀어 넣고. (웃음) 마산박물관 대학을 수료한 분들을 중심으로 문화유산답사회, 골포문화지킴이, 박물관문화자원봉사회 등 자발적으로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십니더. 박물관 문화가족인 셈이지에. 저는 답사 갈 때 지도교수로 따라가 설명해주고 몸으로 때웁니더.”

-공립박물관 학예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납니다. 경상남도에 있는 박물관(공립) 학예사는 대부분 한 명인데, 다원화되어 있는 박물관 기능을 다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예. 주5일제 근무가 되면서 박물관이 문화 콘텐츠를 구축하는 허브가 됐는데, 혼자 하려고 하니까 힘들고 대부분 못하고 있습니더.”

-천 개 박물관 시대라고 하는데, 박물관의 양적 성장만 주력하는 거 아닙니까.

“박물관 많이 만들면 좋습니더. 이제는 박물관 안을 채워줘야 하는데, 그런 작업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아이를 무조건 많이 나면 좋다고 했지만 이제는 아들 교육도 잘 시켜야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지 않습니꺼? 박물관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더.”

그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직업병은 있냐’고 물었다. “있지예. 개인적으로 너무 오래 앉아 있다 보니까…”하고 재치 있게 웃어넘기다가 “내가 속이 뿌라지지만 서도 박물관에 들어오는 순간 나라는 것을 감추고 친절하게 바뀝니더”라고 답했다. 그는 그것을 쉽게 말해 양면성이라고 했다.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든 생각은 송성안 학예사는 ‘뼛속까지 마산인’이고 ‘뼛속까지 지역문화 전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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