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거제] 버릴 것 없는 어장...사계절 내내 쉴 틈 없었다

거제 바다는 넉넉하다.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어장이 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어장이 여럿 있었다. 가조도·능포 앞바다 같은 곳이다.

거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옛 기억을 떠올린다. "갈치는 하도 많아서 퇴비로 사용하고 그랬죠." "멸치 같은 건 어린아이들이 불 하나 들고서 수두룩하게 잡았습니다."

봄·여름·가을에는 갈치·멸치·고등어·조기 같은 난류성 고기가 몰려든다. 겨울에는 또 대구가 찾아온다. 이곳 어부들은 1년 내내 손놀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일제 그늘은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나라 물 좋은 어장 대부분은 일본인 손아귀에 들어갔다. 1908년 저들 압박에 '대한제국 어업법'이 제정되었다. 외국인이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이들은 어업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제는 자국 땅 사람들에게 이를 적극 알리며 이주 희망자를 모집했다. 일본과 가깝고 더없이 좋은 어장인 거제는 가장 먼저 군침 흘릴 곳이었다. '가시이'라는 일본인 수산업자가 '거제도~가덕도에 이르는 대구어장을 20년간 취득'했다. 이때부터 여기서 잡힌 대구는 사정없이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가시이 생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2~2월이 되면 외포항은 대구로 넘쳐난다. /이승환 기자

이 지역 어민들은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일본인 업자 아래로 들어가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신세를 마다치 않았다.

당시 어민 가운데는 교육과는 거리 먼 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영민한 이들은 일본 어업기술을 어깨너머로 알음알음 터득하기도 했다. 훗날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나서는 이때 배운 재주를 발휘하기도 했다. 수산기술이 한 단계 나아지는 계기는 된 듯하다.

오늘날 돌아보면 '가시이'가 어업권을 취득한 어장 가운데 이순신 장군 첫 승전지도 포함돼 있다. 지금 인근 능포 앞바다는 비록 조선소를 마주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고기 많은 곳이다. 대물을 낚으려는 강태공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진을 친다.

조선시대 때 동해는 명태, 서해는 조기, 남해는 대구가 대표 어종이었다고 전해진다. 입이 커서 이름 붙여진 대구(大口)는 동해에서 부산을 돌아 진해만으로 들어온다. 11월 말에서 이듬해 2월까지다. 이때 산란도 한다. 바다가 조용하고, 성장하기 알맞은 온도 때문이다.

외포항에 널려 있는 대구. /남석형 기자

흔하디흔한 대구는 1950년대 들어서 그 양이 줄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마구잡이 어획 탓이 크다 하겠다. 거제 사람들은 1981년부터 인공수정란 방류를 했다. 지금까지도 매해 계속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250억 개 넘는 인공수정란이 바다에 풀렸다. 공들인 효과는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 어민들은 지난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만 4년 이상 된 완전히 자란 것들만 끌어 올린다. 그 아래 것들은 잡혀도 다시 놓아준다. 동해에서도 대구가 잡히기는 한다. 그런데 몸집이 작은 어린 것들이다. 특히 사시사철 잡아 올려 맛이 여기만 할 리 없다. 진해만에서 올라온 것들에게만 '겨울철 대구'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겨울철 이 지역 외포항을 찾으면 대구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제는 굴양식으로도 유명하다. 전국 굴 생산량 40%가량은 거제·통영에서 나는 것들이라 한다. 이는 수하식 양식, 미국 수출 같은 것들이 배경에 있다.

수하식은 먼저 빈 굴깍지를 줄에 꿰 유생이 붙게 한다. 이를 썰물 때 노출해서 단련한다. 그리고 양식장 물 아래서 성장하게 하는 방식이다. 1924년 일본에서 이 방식을 도입했다는 사실이 거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한다. 많은 이가 일본 땅에서 배워 올 수는 없고, 서적을 뒤적이며 이래저래 연구한 듯하다. 그러한 끝에 1960년대 들어 수하식이 정착되었다.

거제면에는 굴 껍데기가 산더미 처럼 쌓여있다. /박민국 기자

이즈음 '굴 수출' 얘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양식업 주역은 단연 김이었지만, 1950년대 이후 수출이 감소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대안을 찾게 되었을 터이다. 그것이 굴이다. 1972년 '한미 패류협정'에 따라 거제·통영 일원 4곳이 미국 수출용 생산해역으로 지정됐다. 오염물질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한 청정관리를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둔덕면·거제면·동부면을 끼고 있는 거제만이 그러한 곳이다. 굴 산업은 노동집약적이다. 그러면서 채취·굴 까기 같이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지역 아낙들 일손이 바빠지며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거제 바다가 이러한 지난날을 담고 있기에 수산업협동조합이 전국 최초로 이 지역에 설립되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1908년 '거제 가조어기 모곽전 조합'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거제에서는 해녀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1900년대 초 제주도에서 일부가 장승포·지세포·구조라·옥포 같은 곳으로 조금씩 넘어왔다고 한다. 학동몽돌해변에서는 한쪽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질하는 해녀 모습이 관광객 너머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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