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 거제

속을 발라낸 대구가 바닷가에 길게 내걸려 있다. 어민들은 대구 건조를 볕과 바닷바람에 맡긴다. 거제시 장목면 외포항에서 마주치는 풍경이다. 대구는 11월 말에서 이듬해 3월까지 외포항을 드나든다. 외포항 둘레에 자리를 정한 상인들은 대구 거래로 분주하다. 항구 한쪽에서는 어민과 상인이, 다른 한쪽에서는 상인과 행인이 서로 셈을 맞춘다. 그 너머에는 수족관을 대구로 가득 채운 식당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든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 거제에 있는 크고 작은 항구는 117곳이다. 거제는 항구다. 그리고 거제 아침은 항구에서 시작한다.

같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도로를 가득 채운다. 길을 메운 오토바이와 자전거 행렬은 바깥사람들에게는 낯설어 그 느낌이 이국적이다. 거제 중심가와 아주동, 장평동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아주동에는 대우조선해양, 장평동에는 삼성중공업이 있다. 규모로 나라를 대표하는 조선소다. 조선업은 제조업과 더불어 경남을 대표하는 산업이다. 그 조선업 심장은 거제에 있다. 거제 아침은 조선소에서 시작한다.

뭍이 부럽지 않았던 섬

거제에 사람이 살았던 시기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제면 법동리에 있는 산달도(山達島)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패총이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토기와 석기 등 신석기시대 유물 230여 점이 나왔다. 사등면 청곡리에 있는 고인돌, 즉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이다. 지석묘는 청곡리를 비롯해 둔덕면 학산리, 일운면 소동리, 지세포 일대, 연초면 당공리 등에서도 발견된다. 거제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었다.

신선대 일대 풍경./박민국 기자

뭍과 멀지 않은 섬은 옛 사람들이 넓은 강 주변만큼 터를 정하기 좋아했다. 무엇보다 바다가 내놓는 수산물이 풍부했다. 섬사람들은 땅을 일군 사람들만큼 살림을 재어놓지는 못했지만, 웬만해서는 배를 곯을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뭍과 가까운 섬이 모두 살기 좋은 땅은 아니다. 거제에 오랫동안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다와 더불어 민물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섬에서는 귀하다는 물이 거제에는 유난히 풍부했다. 섬 전체에 고루 뻗은 산줄기는 제법 넉넉한 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규모는 동부면 구천리에 있는 구천댐에서 엿볼 수 있다. 1987년 완공된 구천댐은 거제 공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한다. 길이 231m, 높이 50m에 저수량은 어림잡아 1000만t에 이른다.

거제 전체면적(402.01㎢) 가운데 경지(67.46㎢)는 16.8% 정도다. 중앙에서 섬 전체로 고루 뻗친 산줄기 때문에 들판 대부분은 해안에 있다. 가라산(580m)을 비롯해 계룡산(566m)·옥녀봉(554m)·노자산(559m)·선자산(523m)·산방산(507m)·앵산(507m)이 500m를 넘고, 대금산(437.5m)·북병산(465m)·국사봉(462m)·망산(397m) 등이 솟아 있다. 거제를 대표하는 이 11개 봉우리는 이곳 자랑거리가 바다에만 펼쳐진 게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내세운다.

넓지 않은 들판은 그래도 넉넉한 물과 따뜻한 날씨 덕에 쏠쏠한 농산물을 내놓았다. 곡물과 더불어 감·배·유자 등 난대성 과수 재배는 농업과 어업을 겸한 이곳 농민들 살림에 제법 보탬이 됐다. 그렇다고 해도 거제가 품은 가장 큰 자산은 바다다. 280㎞가 넘는 섬 둘레 곳곳에는 예부터 어항이 발달했다. 현재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어항'은 지세포·구조라·외포·능포·다포·금포 등 6곳이다. 경남도가 관리하는 '지방어항'은 18곳이며 거제시가 관리하는 어촌정주어항(82곳), 소규모 어항(11곳)을 보태면 거제시 어항은 117곳에 이른다. 특히 거제 바다는 예부터 나라에서 손꼽을 만큼 물이 깨끗하고 난류·한류성 어족이 고루 잡히는 곳이었다. 옛 기록을 보면 능포리·옥포리 앞바다에 궁중에서 관리하는 어장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제 바다는 풍부한 어장을 품은 남해안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예부터 일본이 눈독을 들인 곳이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가시이(香椎源太郞)가 거제 바다를 독점해 이 일대 생선을 모조리 훑어가기도 했다. 그때 거제에 살던 어민들은 일본인에게 고용돼 생계를 유지했다. 그나마 어깨너머로 앞선 어획 기술을 배워둔 게 뒤에 거제 수산업을 키운 동력이 되기는 했다.

거제 외포항./박민국 기자

바다가 내놓는 자산은 수산물로 그치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이 '관광 거제'를 자랑한다면 그 근거는 바다에 있다. 구조라·농소몽돌·덕원·덕포·명사·물안·여차몽돌·와현·학동몽돌·함목·황포·흥남으로 이어지는 섬을 둘러싼 해수욕장은 바깥사람들에게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경남 조선산업의 심장

지금은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해도 조선업은 제조업과 더불어 경남을 대표하는 산업이다. 그리고 경남을 넘어 이 나라 조선 산업을 대표하는 업체 두 개가 거제에 있다. 바로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다.

1978년 공사 진행이 부진하던 옥포조선소를 넘겨받은 대우조선해양은 1981년 그 모습을 드러냈다. 4.3㎢ 땅에 조성된 조선소에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100만t급 독이 있다. 또 900t 골리아스 크레인을 비롯한 최신 설비로 생산하는 건조 규모는 270만t에 이른다. 대형상선을 비롯해 각종 특수선박, 육·해양 플랜트, 산업설비 등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퇴근시간 무렵의 조선소./박민국 기자

1977년 신현읍 장평리에 있던 우진조선소를 사들이며 들어선 삼성중공업은 고부가 가치 선박 생산으로 경쟁력을 내세우고 있다. 세계 최초로 건조한 쇄빙유조선을 비롯해 LNG선,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삼성중공업을 대표하는 제품이다. 또 원유 시추 설비와 해양설비 그리고 풍력발전기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경남 경제를 살찌운 이들 조선업체가 거제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조선소가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 그 변화는 이곳 사람들에게 숨 가빴다. 거제시 살림 상당 부분은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조선소 사람들이 쓰는 돈에서 나온다고 보면 된다. 거제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고현과 옥포는 조선소 노동자 소비를 밑천으로 덩치를 키웠다.

섬을 드나드는 바깥사람이 많아지면서 도시 또한 번잡해졌다. 인심 넉넉하고 온순한 섬사람들에게 닥친 변화와 바깥사람들은 한동안 감당하기 버거웠다. 이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흉흉해진 인심, 늘어난 범죄 원인을 종종 조선소에 돌리곤 한다. 더불어 섬 전체를 감싼 맑은 바다 상당 부분을 조선소에 내준 것 또한 한쪽에서는 섭섭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또 경남에서도 유난한 이곳 물가 역시 조선소 탓이라고 흘겨보는 눈이 많다. 물자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섬이라 원래 높았던 물가를 조선소 사람들 소비가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래도 거제 경제 규모를 키운 동력이 조선소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거제대교와 거가대교

견내량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 좁은 바다다. 1971년 이 해협을 가로질러 '거제대교'를 놓으면서 뭍과 섬은 연결된다. 길이 740m, 폭 10m인 이 다리 덕에 조선산업은 거제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더불어 거제대교는 섬에 갇힌 사람들에게 더 넓어진 생활권을 안겼다. 거제대교 주변 둔덕면·사등면·거제면·동부면 사람들 중 상당수는 '통고(통영고) 나왔다'고 할 정도로 통영과 다름없는 생활권을 누렸다.

뭍 사람들 또한 거제대교 건설을 반길 만했다. 통영 바닷가에서 보면 눈앞에 보이는 섬 주변은 바라보고 끝내기에는 아까운 풍경을 보듬고 있었다. 하지만, 풍경을 즐기고자 감당해야 할 수고 역시 만만찮았다. 그러던 것이 도로가 다리를 타고 넘어가 거제 구석구석에 뻗치면서 섬은 훨씬 가까워졌다. 섬을 찾는 사람들은 많아졌고 이들이 쓴 돈은 거제 살림에 보탬이 된다.

1980년대 들어 늘어난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견내량에는 1999년 새 다리가 놓인다. 길이 940m, 폭 20m로 거제대교 위쪽에 놓인 이 다리는 '신거제대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뭍에서 섬으로 통하는 길은 더욱 넓어진다.

부산 가덕도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거제 바다 풍경은 남해안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다채롭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을 굳이 통영 한산도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섭섭할 정도다. 넓고 맑은 바다, 오목조목 머리를 내민 섬과 더불어 사람들 눈길을 끄는 것은 가덕도와 거제를 잇는 긴 다리다.

섬과 섬을 잇다가 물속으로 잠겨 다시 섬과 섬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 다리 길이는 8.2㎞에 이른다. 2010년 개통한 '거가대교'다. 이 다리가 놓이면서 부산과 거제는 부쩍 가까워진다. 창원, 고성, 통영을 거쳐 거제 고현까지 2시간 넘게 걸리던 길은 50분 거리로 줄어든다. 섬은 경남과 더불어 부산까지 같은 생활권에 둔다.

하지만, 대도시와 이어진 이 다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만은 않다. 거가대교 건설 때부터 이 다리가 안은 문제점에 달라붙었던 경남도의원 김해연은 한마디로 '희망과 절망을 품은 다리'라고 정리한다. 부산과 경남을 잇는 통로로서 새로운 경제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희망이다. 반면, 지나친 통행료(소형차 1만 원)와 민간업체에 대한 지나친 소득 보전, 이로 말미암은 지방재정 부담은 절망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거가대교는 잘못된 민자사업 사례로 종종 꼽히기도 한다.

거가대교에 대한 여기 사람들 감상 또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대도시와 생활권을 공유하면서 유난스러운 이곳 물가를 붙들 수 있겠다는 기대가 하나다. 다른 하나는 거제에서 긁은 돈이 부산에서 풀릴 것에 대한 우려다.

아름답지만 외롭고 아팠던 섬

해금강, 외도, 대병대도, 소병대도 등 거제를 둘러싼 섬은 62개다. 이들 섬 상당수는 손을 타지 않아 날것 그대로 매력을 뽐낸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때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거제 주변에 널린 해수욕장 역시 남다르다. 거제 해변에서는 모래밭보다 모난 데 없이 잘 깎인 돌멩이가 흔한데 이 돌을 '몽돌'이라고 부른다. 거제시는 몽돌을 시 상징물로 삼아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역사를 더듬어보면 거제는 외로운 섬이었다. 아니, 섬이기에 외로웠다.

뭍과 떨어진 섬은 은둔 또는 유배할 곳으로 적당했다. 거제도에 유배당한 인물 가운데 기록에 남은 첫 인물은 고려 왕 의종(1127~1173)이다. 의종은 정중부(1106~1179)가 일으킨 난 때문에 섬으로 쫓겨났다. 조선시대 유배당한 인물 중에는 최숙생(1457~1520 )과 송시열(1607~1689 )이 있다. 연산군 때 벼슬을 지낸 최숙생은 기묘사화(1519) 때, 송시열은 효종(1619~1659)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인 당쟁에서 밀려 유배당한다.

6·25 때 포로수용소(고현동)가 들어선 것도 이곳이 섬이기 때문이다. 1950년 11월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제산지구에 설치한 포로수용소에는 인민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등 포로 17만 명이 수용됐다. 사상이 다른 사람을 갈라놓을 배려까지는 없었던 수용소에서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위태했던 안정은 1952년 미국인 준장 도드(Francis T. Dodd)가 납치되면서 순식간에 깨진다. 이 사건은 고현에 있던 제76 수용소에 있던 인민군 대좌 이학구(?~1963)가 지휘한다. 사건 가담자들은 포로 대우 개선, 포로 송환 중지 등을 요구하며 UN군과 대치했다. 또 반공 포로를 인민재판에 부쳐 처벌하기도 했다. 이 기간 죽은 반공 포로는 105명에 이른다.

이 사건은 도드 준장이 구출되며 매듭지어지나 포로 사이 적대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결국 반공 포로와 공산 포로는 따로 수용된다. 고현동에 있는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당시 시설과 포로 생활상을 재현해놓았다.

섬이 겪은 아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2005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엮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를 보면 거제는 경남에서 상처가 가장 깊은 곳 가운데 하나다. 1949~1950년 거제 일대에서 군·경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8건으로 희생자는 어림잡아 2000명에 이른다. 섬은 외로웠고 외로워서 더욱 아팠다.

군사독재의 끝과 민주정부의 시작 사이에서

14대 대통령 김영삼(1927~)은 거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태어났다. 1951년 장택상(1893~1969) 국무총리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김영삼은 1954년 27세 되던 해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된다.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에 반발, 자유당을 탈당한 김영삼은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한다. 1960년 부산 서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재선한 그는 정치 무대를 부산으로 옮긴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잠시 활동을 멈췄던 그는 1963년 민정당 후보로 3선에 성공한다. 1970년 김대중·이철승과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신민당 대통령 경선에 나선 김영삼은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게 밀린다. 그러나 1971년·1973년 총선에서 연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곧 정치력을 회복한다.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와 맞서며 김대중과 더불어 야권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다.

1987년 군부독재 만행에 분노한 국민은 '6월민주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얻어낸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이 끝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치른 13대 대선에서는 민정당 후보로 나선 노태우가 당선된다. 이어 이듬해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2야당이 되면서 김영삼은 정치적 입지가 매우 약화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빌미가 된다. 1992년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선에 나선 김영삼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김영삼은 취임 초기 강력한 개혁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군내 조직인 '하나회' 제거, 국군보안사 조직 축소, 금융실명제 등 핵심적인 개혁안이 처리된다. 특히 전두환·노태우를 12·12사태와 비자금 사건 책임을 물어 구속한다. 하지만, 한보비리사건과 아들 김현철이 국정 개입 물의를 일으키며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더불어 집권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상황에서 IMF관리체제를 받아들이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장목면 외포리에는 생가와 함께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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