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거제] 눈부신 절경 뒤엔 일제 침략의 상처도

해금강·신선대·바람의 언덕·학동몽돌해변·여차홍포 해안 절경….

어디에 시선을 둬도 눈이 시리다. 어느 것 하나 덜하지도 않다. 거제는 마치 도도함을 내뿜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거제를 속 깊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게 된다.

근·현대사 페이지를 채울 만한 것들이 이 땅 곳곳에 스며있다. 비교적 알려진 포로수용소 같은 얘기 말고도 말이다.

거제 사등면 가조도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는 '취도(吹島)'가 자리하고 있다. 아주 작은 섬이다. 실제 면적이 165㎡(50평)밖에 안 된다. 지적도에는 이보다 10배 이상 넓은 것으로 돼 있다.

'러일전쟁 승전 기념비'가 있는 사등면 취도. /거제시

러일전쟁 당시 송진포(松眞浦)에 요새를 마련한 일본해군은 취도를 함포사격 연습 표적으로 이용했다. 이 작은 섬이 그 수많은 포탄을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했으니, 온전했을 리 없다. 만신창이 된 채 상단부만 남아 애처롭게 바다에 떠있다.

이곳에는 '러일전쟁 승전 기념비'가 있다.

1904년 일본은 진해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를 쓰러뜨린 바 있다. 러일전쟁을 자기들 승리로 돌려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35년 진해해군요항사령부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밤에는 이 섬을 목표로 함포 사격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수십 년 지난 후 '일제 잔재물'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철거 여부 논란이 계속되기도 했다.

송진포에 있던 러일전쟁 기념비석은 현재 거제시청 수장고에 보관해 있다. /거제시

취도를 향해 함포를 쏜 곳은 칠천도(七川島) 너머에 있는 송진포다. 오늘날 장목면에 속해 있는 곳이다. 송진포는 뒷산에서 대마도 관측이 가능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 역시 '러일전쟁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주 발걸음 하기도 했다한다. 해방이 되자 곧바로 마을 사람들이 나서 무너뜨리려 했다. 처음에는 사람 힘으로만 밀어보았는데, 쉽게 넘어갈 리 없었을 것이다. 해군 공병대 도움을 받아 다이너마이트로 몇 번 시도 끝에 폭파했다고 한다. 그래도 비석(碑石)은 글씨·형태 훼손이 덜 간 채 한동안 나뒹굴었던 듯하다. 널따란 돌판이라 파출소 입구 디딤돌로 사용됐다. 역사에 관심 깊은 공무원이 이를 알고서는 시청 수장고(收藏庫)에 옮겨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접한 일본인 누군가는 수십억 돈으로 비석을 사 가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은 송진포에 주둔한 해군에 공급할 어업기지도 필요했다. 제격인 곳이 장승포(長承浦)였다. 풍부한 수산자원에 노동력도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집단 이주촌이 형성되었다. 촌장 이름을 딴 '이리사 촌'이라 불렸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일본식 가옥이 남아있다.

일본인 집단 이주촌이 형성됐던 장승포. /박민국 기자

주택·학교·우편취급소 같은 것들이 들어서며 대단위 마을이 형성됐다. 1920년 들어서는 이 마을에 거주하는 이가 7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풍부한 수산자원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번영을 이어갔다고 한다. 특히 고등어잡이 근거지로 자리잡았다. 어부 100여 명을 태운 채 거제도·거문도·욕지도·제주도 근해뿐만 아니라, 경북 동해안·전남 남서해를 돌았다. 마구잡이로 끌어올리며 어장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1945년 8월에는 이곳 장승포항이 미군 공습을 받기도 했다. 이때 이곳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잘 입지 않는 흰옷을 입고 산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미군이 알아보고 포탄 세례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어장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착취당했다. 이러한 경제적 환경에서 저항감이 표출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를 중심으로 젊은 층 저항운동이 거셌다고 한다.

장승포 바다 아래쪽에는 지심도(只心島)가 자리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음심(心) 자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몇 년 전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찾은 이후 북적이고 있다. 어떤 이는 "더이상 한적한 섬이 아니다"라며 크게 아쉬워하기도 한다.

보도연맹원 학살로 수백명이 총살 또는 수장되기도 한 지심도. 지금은 동백섬으로 더 유명하다. /경남도민일보 DB

일본은 이곳 또한 현지인들을 내쫓고 군사 요새로 활용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1950년에는 보도연맹원 학살로 이곳에서 수백명이 총살 또는 수장되기도 했다.

오늘날 여유로운 동백숲과 어울리지 않게 지금도 포대 흔적이 남이 있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거제 북쪽에 자리한 저도(猪島) 또한 일제 군 시설로 활용되다 1954년 대통령 여름 휴양지가 됐다. 20년 전 그 용도에서 벗어났지만, 군 시설이라는 이유로 일반인은 발 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시가 관리권을 이양받아 관광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를 힘껏 하기도 한다.

도내 여러 곳에서는 임진왜란 승전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지역에 옥포대첩기념공원이 있듯 말이다. 그런데 거제 서북쪽에 자리한 칠천도에는 칠천량해전비가 있다.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한 해전이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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