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구석구석]어이쿠나, 누운 부처가 온제 일어난다꼬?

“쪼갠만 있으모는 금세 볼 복까진다 아이가.”

눈앞으로 달려드는 산빛을 보며 진주에서부터 같이 간 일행이 던진 말이다. 뭔 말인가 싶어 쳐다봤더니 “단풍끼가 있다고!” 소리친다.

10월 초, 아직은 눈치 채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벌써부터 초록은 온통 긴장하고 있었다. ‘붉은 혁명’은 예고되어 있었다. 2주 쯤 지나면 단풍은 위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진군해 올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마루로, 그리고 골짜기로 순식간일 것이다.

전남 화순 도암면 영구산 기슭에 있는 운주사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아득했다. 갓 초가을로 접어든 햇살은 살갗을 뚫을 듯 따가웠다. 그리고 아찔하도록 투명하였다.

땅기운 한 쪽으로 기울어질까 호남땅에 세운 절

천불천탑의 성지라 일컫는 운주사. 세상이 뒤엎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열망하며 골짜기 안을 가득 채운 수많은 석탑과 석불들. 1980년대 후반 발굴 당시 절터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 있는 석탑과 석불은 세간의 관심을 단번에 끌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도 이곳은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찾아오는 걸음이 수월하지 않은 곳이었다.

“아이고, 옛날에 왔을 때보다 마이 달라졌구만.”

옆 사람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먼저 눈으로 빙 둘러본 운주사는 단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일주문에서부터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 야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데크로 이어져있고 야산 중간중간 경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었다. 대웅전을 복원하고 경내의 석탑과 석불은 예전보다 보존상태가 아주 좋았다.

90년대 중반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수십의 석탑과 석불을 이리저리 널어놓은 게 많은 마치 시골 마당 같이 어수선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런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고 갖가지 추정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전해지는 천불천탑 조성설과 미륵신앙 이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했다.

/ 권영란 기자

“우리나라에선 풍수지리라면 도선국사잖습니까. 아마 전국에 있는 오래된 절중에 도선국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게 제법 될 겁니다. 운주사도 도선국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고려때 비보사찰이라 하대요. 어느 날 도선국사가 나라 땅을 턱 보니까 이쪽 호남 땅기운이 쇠퇴해져 이눔의 나라 땅이 한 쪽으로 기울어질 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땅 기운이 쇠퇴하는 걸 막기 위해 지은 거랍니다.”

입구 주차장에서부터 우연히 동행하게 된 박지원 씨의 설명이다. 그는 대전에 사는데, 틈만 나면 혼자서 운주사 불상을 찍으러 온다고 했다. 이후 두어 시간동안 그를 길잡이 삼아 경내 곳곳을 둘러보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어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운주사는 낮은 골짜기 안 평평한 터에 세워진 절이다. 경남에서 보는 이름 있는 절이 대부분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가거나 물 좋은 계곡을 끼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처음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눈앞에 펼쳐진 많은 석탑들과 크고 작은 다양한 불상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어느새 낯설고 신비스러운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 차례의 발굴조사와 두 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1000기의 석불과 1000기의 석탑이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정유재란 이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 기만 남아있다.

‘퍼석돌’ 석탑은 어떻게 오랜 세월을 버텼을까?

일주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9층석탑(보물 제 796호)이다. 그 뒤로 7층석탑과 원형다층석탑 등이 차례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9층석탑은 탑 높이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있어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형식과 같아서 백제계 석탑이라 한답니다. 저기 탑신석 안에 겹마름모꼴 무늬와 네 개의 꽃잎 문양 보이시죠? 다른 탑과는 달리 아주 세련되어 보이죠. 환한 빛살이 중앙에서 하늘로 퍼져오르는 문양 때문에 비로자나탑이라 불리기도 하고 운주사 중심탑이라 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권영란 기자

박지원 씨는 탑돌이를 하듯 사방을 돌며 탑 문양을 찍어댔다.

그 뒤에 있는 7층석탑 2기는 9층석탑에 연이어있다. 옥개석(지붕돌)은 육중하면서도 날렵하다.

“안내서에도 나와 있지만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많이 닮았다네요. 그래서 신라탑이라고 한답니다. 이곳은 예전 백제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지 그게 의문이라네요.”

7층 석탑은 매우 안정적이며 단단한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 뒤로 운주사의 원형다층석탑(보물 제 798호)이 눈에 들어온다.

운주사를 얘기하자면 이 탑을 빼놓을 수 없다. 원형석탑이라는 것에 사람들은 먼저 눈길을 주지만 다음 순간 이 탑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현재 6층만 남아있으나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 호떡탑이다.”

불쑥 등 뒤에서 꼬마 아이가 커다란 둥근 석탑을 신기한 듯 올려다보며 외쳤다.

“하하, 옳지. 금방 구워낸 호떡을 얹어놓은 것 같구나.”

같이 온 듯한 노인이 아이의 말을 받아준다.

/ 권영란 기자

둥근 처마를 잘 빗어 내린 옥개석(지붕돌)과 둥근 탑신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석공이 주변 야산의 돌을 잘라내고 옮겨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무늬를 새겨 넣은 듯하다. 어떤 것은 섬세하고 어떤 것은 천진스럽다. 자연스런 조화가 빚은 아름다움이 크게 다가왔다.

“여기 자세히 보면, 기단석에 정으로 방금 쪼아낸 것 같은 자국이 보이지요.”

비바람에 깎였을 법한데 선명한 자국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신기하게도 운주사 석탑과 석불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모두 ‘퍼석돌’이다. 좋은 돌을 고르고 고른 것이 아니라 이 골짜기 천지에 널려있는 돌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퍼석돌’은 석질이 단단하지 않아서 탑으로는 제작이 힘들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만들었을까? 정말 석공을 뛰어넘는 도술같은 것이었던 걸까? 이런 ‘퍼석돌’로 만든 석탑과 석불이 어떻게 수많은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오만가지 표정의 불상들은 이렇듯 애틋하구나

운주사의 석불은 경내와 주변 야산 6군데 배치돼 있다. 한 곳마다 적게는 대여섯, 많게는 열이 넘게 무리를 지어 있다. 어떤 곳은 마을사람들처럼, 어떤 곳은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불상들은 정겹기조차 하다. 가만히 바라보면 애틋하기조차 하다.

대웅전까지 들어서는 길목에는 석불군 가, 나, 다, 대웅전 뒤로 석불군 라, 석불군 마가 이어지고 있다. 석불군 바는 왼쪽 야산 와형석불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이 골짜기 석불들은 부처님의 광명을 밝히는 비로나자불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 이어져있는 게 특징이랍니다.”

아무렇게 널려져 있는 듯했지만 그대로의 질서가 있었다.

/ 권영란 기자

9층 석탑 옆 바위너설 앞에서 석불군을 만났다. 가장 처음 만나는 이들 석불군은 부처상들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여느 절의 넉넉한 품에 위엄과 인자를 갖춘 부처들과 전혀 다르다. 이 특이함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얼굴과 몸피는 홀쭉하고 오랜 세월에 깎여진 얼굴의 눈과 코, 입은 바위에 그저 선을 그어놓은 듯 단순하다.

다음 석불군도 역시 바위너설에 크고 작은 불상들이 줄을 이어 있다. 마치 잔칫집에 온 듯한 마을 사람들 마냥 서 있다. 꼬마 아이가 서 있는 불상들을 신기하다는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 앞에 앉았다가 발로 툭툭 차다가 뒤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깜짝 놀란다. 꼬마에게도 ‘만만하게 뵈는’ 부처님들이다.

어떤 석불군은 참 아기자기하다. 보는 사람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머금어진다. 더러는 이 석불들을 아버지부처, 어머니부처, 아들부처, 딸부처라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냄새 나는 불상들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감실(부처를 모신 집) 안에 등을 맞대고 앉아있는 두 기의 불상을 들여다보느라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한다. 한 불상은 일주문을 넘어 세상 밖을 보고 있고 한 불상은 대웅전으로 향하고 있다.

‘안으로 보는 불상은 수행과 성찰이고, 밖으로 내다보는 불상은 늘 중생을 굽어본다는 뜻인가.’

이런저런 해석들을 달며 여러 석탑과 불상을 둘러보는 것도 운주사에서만 가질 수 있는 재미이기도 하다.

/ 권영란 기자

불상들이 기댄 바위너설은 마치 처마를 두른 듯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어느 정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돼 있다. 마치 법당에 모셔진 듯하다. 무심한 듯 만들어진 석불들에서 어느 석공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저리 오래 누버있으몬 등이 배길 건데…

천 번째 부처, 운주사 와형석불. 왼쪽 산중턱에 있어 와불 앞에 가면 운주사가 손바닥 위에 놓인 듯 훤하다.

“이런 형태의 와불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고 하네요.”

땅 바닥 자연석에 ‘앉아있는 부처’와 ‘서있는 듯한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둘다 10미터가 넘는 큰 불상들이다. 모로 돌아눕지도 않고 반듯한 자세지만 지형 그대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랍니다. 저기 아래, 불상들은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이라해서 이 두 분을 지키는 부처들이지요. 도선국사가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만드는데 마지막으로 만든 게 이 와형석불이래요. 다 만들고 이제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그만 새벽닭이 울더래요. 도선국사가 불상의 아랫단을 떼어내다가 멈춰선 채 통탄을 했대요. 그런데 그게 거들어주던 동자승이 졸리고 지치니까 빨리 일을 끝낼 요량으로 아직 새벽이 아닌데 닭울음을 흉내낸 거래요.”

천불천탑의 마지막 부처 와불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고 했다. 운주사 불상들은 여리디 여린 중생들과 다를 바 없이 초라하고 힘없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게 더욱 장하다. 더러는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듯 마중 나와 있는 듯하기도 하다. 함께 어울려 술잔을 나누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며 같이 새벽을 기다리고 싶다. 같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듯이.

“당시 백성들이 바라는 새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 권영란 기자

“글쎄요. 지금이 그때와 크게 다를 바 없고,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라는 것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와불을 일으키기만 하면 새 세상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려.”
와형석불은 가을 기운을 듬뿍 빨아들이며 드러누워 있지만 한 귀퉁이가 들려있는 것도 같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설 것처럼 말이다.

와형석불이 있는 산중턱에서 돌아나오는 길에는 경내 여기저기 무리지어 있는 석불들이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건네던지 머릿속은 시끄럽고 귓속은 북적북적대는 환청으로 가득했다. 그건 들끓는 절망이기도 했고 참담한 희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부처의 것이기도 했고 사람의 것이기도 했다.

일어나라, 일어나! 벌떡 일어나라, 와불이여!

일어나야지, 일어나! 등허리가 배겨서라도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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